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68)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68화(68/325)
< 68. 복귀해야지 >
다음 날 아침,
한길은 해가 뜨자마자 루시우스를 강제로 깨워서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일찍 나올 필요 있나?”
“본 무대 전에는 리허설해야죠.”
“리허설?”
“어제 만든 머랭 하나만 더 만들어 주세요.”
입이 찢어지라 하품만 하던 루시우스는, 머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싫으면 다른 제빵사에게 부탁하죠.”
“누가 싫대?”
어제의 그 노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이런 엄청난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루시우스는 툴툴거리면서도 계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한길은 증류주를 확인했다.
증류주는 처음 만들어 보는 탓에 시행착오를 조금 겪었다. 첫 잔은 맛이 텁텁하고 지저분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증류액을 제대로 걸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도부터는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액체를 버리고 중간부터 흘러나오는 증류액만 사용했는데, 그러니 맛이 한결 깔끔해졌다.
세 시간 간격으로 맛을 확인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당장은 시간이 없어 증류주는 두 종류밖에 만들지 못했다.
하나는 귀족들이 애용하는 서렌틴 와인을 사용했다. 단맛과 산미가 동시에 살아있고 볼륨감도 뛰어난 와인인데, 그 증류액은 새콤달콤한 포도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증류주는 무화과 와인을 사용했다. 무화과 증류주도 달달했지만, 포도 증류주와는 또 달랐다. 꽉꽉 찬 밀도 높은 단맛이 아니라, 삼삼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은은한 단맛이었다.
와인에서 나는 깊은 발효의 향은 없었지만, 대신 각 과일 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 목구멍이 화악하고 타오르는 감각은 있었지만, 이 열기는 불을 붙이면 날아간다.
“오늘 쓸 것만 간신히 나오겠네요. 새로 오는 와인도 들어오는 대로 동일하게 작업해 주세요.”
작업이 끊이지 않게 지시를 내리자, 루시우스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로 완성된 머랭을 내밀었다. 어제보다 속도가 올랐다.
“그래서, 뭘 하려고?”
“그냥 한번 보세요. 꽤 재밌을 겁니다.”
한길의 입에 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플람베의 위력을 확인할 시간이다.
한길은 우선 기다란 와인 국자를 들고 왔다.
로마에서 사용하는 와인 국자는, 생김새로만 보면 약수터에 놓인 바가지와도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플라스틱 재질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손잡이가 매우 길다는 것.
플람베의 불은 통제하기 어렵다.
목재나 숯 같은 물체를 태우는 게 아니라, 알코올 표면에 있는 기체를 태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깊숙이 기체를 가둬둘 수 있고, 옷에 불이 옮겨붙지 않게 먼 거리에서 태울 수 있는 국자가 안전하다.
한길은 국자 안에 포도 와인 증류주를 조금 넣고, 숯불에 살짝 데워주었다.
과일로 만든 증류주는 약간의 열기를 더해주지 않으면,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다.
적당히 국자를 달구고 기다란 성냥 같은 횃불을 갖다 대자,
화르륵!
불이 붙었다.
푸른색과 선명한 주황색이 얽혀있는 불이.
주먹만 한 크기로 덜어둔 머랭 위에 국자를 기울이자, 불꽃은 그대로 머랭 위에 올라탔다.
불길이 사그라지자, 남은 건 잘 그을린 연갈색의 표면.
“한번 맛을 볼까요?”
한길은 마법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루시우스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을린 머랭은, 그냥 먹는 머랭보다 훨씬 맛있었다.
일반 머랭은 계란 특유의 비린 향이 연하게 남아있었는데, 불길은 그런 잡내를 깔끔하게 잡아서 날려버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캐러멜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길게, 오랫동안 태워야겠네요.”
그 후로 몇 시간은 실험의 시간이었다.
불을 얼마나 고루 퍼트리느냐, 얼마나 오래 태우느냐에 따라 맛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포도 증류주와 무화과 증류주도 맛이 달랐고.
이번 디저트는 무화과 아이스크림을 사용하니, 조금 더 가벼운 무화과 플람베가 어울릴 것 같았다.
포도 플람베는 조금 더 강하게 향이 느껴져 육류에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실험에 몰두해 있는 사이,
“아피카타 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도착했다.
#
“이 집에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런가?”
“정확히 11년 만이에요.”
“그렇군.”
오랜만에 아피키우스의 로마 저택을 찾아온 아피카타는, 정겨운 풍경을 보자마자 향수에 젖었다. 느긋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었지만,
“일단 연회장으로 들어가지.”
언제나 그렇듯, 아피키우스는 서두르고 있었다.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듯이.
연회장에 들어서며 아피카타는 불편함을 느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자리에는 항상 다른 손님이 있었다. 단둘이 있어 본 건 정말 오랜만이다.
“아이들은?”
“집에 두고 왔어요.”
“왜?”
“미열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군.”
또 대화가 끊겼다.
아버지와는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대화다운 대화를 못 한 지 오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더욱.
“이번에 시민 만찬이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해 아피카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날, 옥타비우스도 만찬을 열었다면서요? 그런데 시민들은 다 아버지 얘기만 한다고 해서….”
“정치 얘기는 그만두지.”
‘하아….’
아피키타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아버지는 자신을 예뻐했지만, 동시에 엄격하기도 했다. 특히 여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만큼 보기 흉한 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공통된 대화 주제가 없었다.
아버지는 문학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치와 요리에만 관심이 있는데, 둘 다 아피카타는 다룰 수 없는 주제였으니.
“그래서, 오늘은 어떤 요리를 만드시죠?”
“일단 보고 나서 얘기하자더군.”
“……”
또다시 불편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데, 반가운 인물이 나왔다.
요리사인 마르쿠스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오늘 특별한 요리를 준비했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어요.”
“요리는 아니고 간단한 디저트입니다. 아피카타 님의 의견도 듣고 싶어서요. 혹시 디저트는 좋아하시나요?”
“물론, 좋아하죠.”
“다행이네요.”
모처럼 부담 없는 소소한 대화가 오가니 마음이 놓였다.
마르쿠스가 고갯짓을 살짝 하자, 연회장 안으로 여러 명의 노예가 들어왔다. 노예들은 아피카타와 아피키우스 앞에 각자 하나씩 그릇을 내려 놓였다.
그릇 위에 있는 건 하얀 덩어리.
주먹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덩어리는 특이한 생김새였다.
“이건 뭐죠?‘
“이름은 아직 붙이지 못했습니다. 한번 시식해 보시고 적당한 이름을 붙여 주시면 좋겠네요.”
신기한 요리였다.
폭신한 거품 같기도 하고.
새하얀 설산 같기도 했다.
설산은 울퉁불퉁했다.
표면에 정교한 회오리바람 같은 문양이 조각상처럼 새겨져 있었다.
‘스푼은 왜 안 주지?’
재촉하면 철이 없어 보일까 봐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는데, 기다림이 조금 길다.
이윽고 여러 명의 노예가 다시 등장했다.
조금 특이한 도구를 들고서.
국자, 그리고… 횃불?
“잠시 뒤로 물러나서 앉아주세요.”
“네?”
“너무 그렇게 가까이 계시면 다칩니다.”
요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상한 주의를 주더니, 국자 하나를 들고서 아피키우스의 앞에 섰다.
“이 요리는, 식탁에서 완성하는 요리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있는 노예가 국자에 횃불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화르륵!
국자에 불이 붙었다.
“…..!”
불이 붙은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불꽃의 색이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푸른 불이다.
처음 보는 신비로운 색감.
베스타 여신의 신전에 있는 성스러운 불꽃도 이런 빛을 내지는 못한다.
비현실적인 불꽃은 물결치듯 활기차게 굽이치며 움직였다.
요리사가 국자를 살짝 기울이자, 국자 안의 불은 그대로 설산에 내려앉은 후, 고루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하얀 덩어리는 화염에 휩싸였다.
화르륵! 탁! 화르륵!
중간에 작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이 테이블까지 옮겨 붙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지만, 일렁이는 불길은 접시 위에만 머물다가 사라졌다.
요리사는 또 다른 국자에 불을 붙이고는, 이번에는 아피카타의 접시 위에도 똑같은 마법을 부렸다.
화르륵!
푸른 불꽃은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홀린 듯이,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조용히, 감상만 하게 된다.
불길이 사라지자, 설산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올통볼통 튀어나온 표면은 짙은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꿀꺽.
이상하게 그을린 자국을 보는데 침이 고여왔다. 목구멍에서 손이 뻗어 나갈 것 같았다.
“이제 드셔도 됩니다.”
아피카타는 노예가 건네준 숟가락을 받아들고 설산 위에 올렸다.
푹!
숟가락에 닿는 감촉도 특이하다.
가볍다.
너무나도.
일단 숟가락 한가득 하얀 구름만 올렸다.
그 맛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예법에 맞게 행동해야 하니까.
구름의 그을린 부분은 맛깔나게 굳어 있고, 그 아래 있는 하얀 부분은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차분하게 숟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하얀 덩어리는 미끄러지듯 혓바닥 위로 올라탔다.
폭신했다.
입안에 들어온 구름은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깨물어 먹을 수도 없는지라 구름이 올려진 혓바닥을 입천장으로 밀어 올리자,
“….!”
하얀 덩어리가 살짝 뭉개지면서 쾌감이 몸을 뚫고 지나갔다.
황홀할 정도로 진한 단맛.
입천장에 무언가 끈적하게 달라 붙어있었는데, 처음 맛보는 달달함이 느껴졌다. 과일을 먹을 때 느끼는 단맛과는 차원이 다른 단맛이다.
아피카타는 처음 느껴보는 순수한 캐러멜 향이었다.
입천장에 눌어붙은 캐러멜을 혀끝으로 건드릴 때마다 짜릿한 단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동시에, 입안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폭신함이 느껴졌다. 구름은 생각보다 쫀쫀했는데, 입안에 머무르는 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으음…..”
저도 모르게 눈꼬리가 내려가고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랭만 드시지 마시고 안에 있는 내용물까지 함께 드세요.”
“이 구름 같은 게 머랭이에요?“
“네.”
민망함에 바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그릇 위의 요리에 집중했다.
푹!
숟가락을 조금 더 세게 누르자, 이번에는 머랭과 함께 그 안에 가둬진 단단한 무언가가 함께 담겼다. 입에 넣어 보니,
“앗, 차가워!”
반사적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차갑다고?
방금 전까지 불타고 있던 덩어리를 먹는데?
조금 놀랐지만, 온도에 익숙해지자 그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덩어리는 놀랍게도, 얼음이 아니었다.
얼음과 수프를 섞은 것 같은 특이한 음식이었다.
벨벳처럼 호화로운 질감을 가진 크림은 매우 부드러웠다. 꿀과 무화과의 향이 느껴지면서 묵직하고도 풍만하게, 입에서 녹아내렸다.
묵직한 크림과 가벼운 머랭.
두 가지 맛이 대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따로 먹는 것보다 함께 먹으니, 각자의 매력이 더욱 도드라졌다.
정말 절묘했다.
지상에서는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정신을 차리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버지는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으로.
“넌 맛있는 걸 먹으면 항상 그렇게 어깨를 으쓱였지.”
그러고 보니.
저도 모르게 입에 숟가락을 물고 몸을 좌우로 들썩이고 있었다.
“네 어머니도 그런 습관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을 닮는다고 생각하면 신기하단 말이지.”
느릿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아직 철없이 맨발로 뛰어다니던 시절 자주 보여주던,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상하게,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며 올라왔다.
“아빠…..”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이미 터져 나온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 너무 무서워요…..”
#
한길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는 아피카타를 보며 당황했다.
한길은 로마를 떠나기 전, 아피키우스를 도와주고 싶었다. 적어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게끔 가능한 만큼 손을 써두고 싶었다.
위험요소인 세야누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딸을 초청하자는 말을 꺼내긴 했다.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세야누스에 대해 질문을 할 생각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아피카타는 수많은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걸 내가 들어도 되나?’
조금 위험한 얘기를.
아피카타는 지난 몇 달 사이에 세야누스가 이상해졌다고 했다.
평소에도 야심이 많은 사내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조금 위험한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아직 네 살배기인 딸 유닐라를 황족에게 시집보내면 어떻겠냐는 말을 꺼냈다는 거다.
그 소리를 듣고 아피카타는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남편이 분에 넘치는 자리를 욕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황족은 아무나와 결혼하지 않는다.
아피카타의 집안도 나름 명문 집안이긴 하지만, 황족과의 결혼을 꿈꿀 정도는 아니다.
세야누스는 농담이라며 웃어넘겼지만,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불안했다고 한다.
확실한 증거나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여왔다고 한다.
아피키우스는 조용히 딸의 말을 들어준 후, 잠시 방에 가서 쉬라며 아피카타를 내보냈다.
그리고 바로 한길을 바라보았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아피키우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몸 전체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은퇴를 너무 빨리 한 모양이야. 로마로 다시 돌아와야겠어.”
아피키우스는 바로 업무를 닦달하는 상사의 태도를 취했다.
“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상황이 변했네. 단순히 만찬을 성공 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다시 미식 자문의 자리를 맡아달라고 애걸하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만찬을 성사시켜야 하네.”
“네.”
“자네가 만든 디저트는 훌륭해. 보기에도 좋고, 불과 얼음의 맛을 동시에 보여주는 건, 가히 신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가장 강렬한 부분을 마지막으로 미뤄둬서는 안 돼.”
“물론, 마지막으로 미뤄둘 생각은 없습니다.”
“전채와 메인은 어떻게 할 거지?”
한길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방금 보여드린 대로 할 겁니다.”
“뭐를?”
“처음부터 끝까지, 식탁을 불태울 겁니다. 주피터의 벼락을 맞은 것처럼요.”
< 68. 복귀해야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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