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92)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92화(92/325)
< 92. 첫 만찬 >
“식사는 어떠셨나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군요.”
식사를 마친 한대훈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냅킨을 쥐며 입가를 닦을 뿐.
일순, 코끝을 살짝 찡긋거리는 게 보였다. 콧물이 살짝 흐르기 직전, 강하게 숨을 들이마실 때 나올법한 작은 찡긋거림.
‘저건가?’
슬아가 말한, 아마도 기쁠 때 나오는 표정.
신뢰성 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불만은 없는 듯했다. 불만을 속으로 꿍꿍 담아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비서실장에게 얘기하시면 됩니다.”
한대훈은 가볍게 말을 꺼내며 냅킨을 내려놓았고, 한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말해도 됩니까?”
한대훈의 동공이 살짝 확장되는 걸 보니 예의상 가볍게 던진 말 같았다.
하지만, 주어진 기회는 놓칠 수 없다.
이 한 끼는 완벽하지 않으니까.
아직은.
“소믈리에를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소믈리에?”
“메뉴가 메뉴다 보니 와인을 곁들이면 좋을 텐데, 제가 와인에는 조예가 없어서요.”
“아, 와인 페어링이 제대로 되면 좋을 것 같긴 하군요. 심 실장.”
한대훈의 한 마디에 옆에 있는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로.
다행이다.
한길이 직접 알아볼 수도 있지만, 알맞은 와인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것도 시간이 들어간다.
그리고.
한길은 정말 와인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면 그 업무는 수셰프에게 넘어갈 테고, 이 이상 수셰프에게 부담을 짊어주기는 싫었다.
“그게 다입니까?”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서려는 분위기였지만, 한길은 다시 주어진 기회를 덥석 물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건네주신 자료를 보니 만찬 장소가 갤러리던데, 혹시 홀 내에서 조리를 해도 될까요?”
이번에는 한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찬 장소는 TG 카드에서 운영하는 한 갤러리의 꼭대기 층에 자리한 홀이다. 갖은 행사를 위한 장소 대관도 하고 있어 작은 주방도 딸려 있다.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한대훈의 눈이 묻고 있었다.
주방에 있는데 굳이 왜 홀에서 조리를?
“이 요리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갑니다. 그 규모의 주방에서는 사이드 요리만 간신히 만들 정도입니다.”
“하긴, 레스토랑과 비교하면 시설이 많이 부족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육류는 홀에서 굽고 싶습니다. 정 안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요.”
한길의 설명에, 이번에는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전시된 작품은 없지만, 환기 시설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메인 홀 옆에 작은 홀도 있는데, 필요하면 그곳에 휴대용 버너를 설치해서 제2의 주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아뇨, 이왕이면 메인 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한대훈도, 비서실장도.
의아한 눈으로 한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길은 따로 생각하는 그림이 있었다.
이번 만찬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최고의 한 끼를 만들고 싶었다.
최고의 재료는 구했다.
노문배 셰프의 가르침을 참고해서 최고의 메뉴도 갈고닦았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있었다.
한길은 조용히,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마디를 던졌다.
“드라마가 부족해서요.”
#
그 후로 몇 주.
만찬 준비 과정은 손이 많이 갔다.
메뉴를 만드는 건 시작일 뿐이니까.
우선은, 주재료인 화이트 파크 소고기를 드라이에이징으로 숙성시켜야 했다.
읽어본 적은 있어 대략적인 방법은 알고 있지만, 한길도 드라이에이징을 직접 시도해본 적은 없었다.
드라이에이징은, 어떻게 보면 계산된 부패과정이다.
과일도 갓 땄을 때보다 부패 직전이 향과 식감이 가장 응축되어 달고 맛있다.
그처럼, 고기도 상하기 직전, 맛이 최고의 정점에 달할 때까지 숙성시킨다.
맛을 도와주는 곰팡이만 키우고 필요 없는 수분은 걷어내면서, 풍미를 차곡차곡 쌓아 깊이를 더해야 한다.
세심하게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고기는 그냥 썩어버린다.
이 부분에서는 다시 노셰프의 도움을 받았다. 노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중 한 곳에서 이미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냥 방법만 알려주셔도 되는데….”
“아니, 그냥 우리 냉장고에 넣으라니까?”
“소 한 마리면 양이 엄청난데, 그러면 너무 죄송해서요.”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민폐를 끼칠 수 없어 요령만 전수받으려 했으나, 노셰프는 자신의 레스토랑에 있는 냉장고를 사용하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화이트 파크가 아까워서 그런 거니까.”
“방법만 알려주시면 최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르면서 해볼 수 있는데요.”
“그 방법이 안 되거든.”
“네?”
“아무리 잘 밀봉해도 냉장고 안에 음식을 2주, 3주 동안 두면 냉장고 냄새가 스며들잖아? 고기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미 숙성된 고기랑 같이 걸어두면 어떻게 될까?”
고기 자체의 맛을 숙성시키고, 게다가 냉장고의 잡내 대신 주변에 함께 걸려있는 다른 고기의 짙은 숙성 향까지 빨아들인다.
폐를 끼치는 건 피하고 싶지만, 맛에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다.
결국 한길은 노셰프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걸려있는 놈 중에 제일 크고 맛있는 놈 세 개는 내 꺼다. 나도 화이트 파크는 먹어본 적 없는데, 맛 좀 보자. 대신에 매일 제대로 숙성되는지 내가 점검할 테니까.”
그 외에는, 비서실장이 레스토랑으로 소믈리에를 보내주었다.
알맞은 와인 페어링을 하려면 메뉴를 맛보아야 하기에, 다시 한번 한길은 수셰프와 풀코스 메뉴를 준비해야 했다.
“데니 신입니다.”
소믈리에는 아직 20대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남성이었다.
민망할 정도로 몸에 달라붙는 양복을 차려입고, 앞주머니에 빳빳한 손수건을 꽂고 있는. 어딘가 공작새를 떠올리는 화려함과, 클래식한 느낌이 반반 섞여 있는, 묘한 남자였다.
걸음걸이 하나하나 스텝을 밟듯이 걷는 가벼운 느낌의 남자였지만, 요리를 맛 볼 때는 눈빛이 달라졌다.
“육회군요. 아니, 타르타르라고 하나? 생고기는 타닌이 달라붙을 면이 없어서 조금 더 가볍고 쥬시한 게 좋겠네요. 로제도 괜찮을 듯하고! 창백한 로제가 아닌, 아, 로제 샴페인도 나쁘지 않겠군요!”
하나하나 요리를 맛볼 때마다 흥분한 말투로 족히 5분은 넘게 혼잣말을 이어가다가 메모를 적었다.
“고기 맛이 진하군요. 이러면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해야 맛있는데,”
“정정당당하게요?”
“싸움도 너무 일방적이면 재미가 없잖아요? 비등비등해야 볼 맛이 있지. 이 부위는 지방이 덜하니까 식감이 조금 걸리는데, 약간의 산미가 있는 와인으로 뚫고 지나가게 하죠. 립아이는 미끈거리는 느낌이 있으니까 타닌으로 기름기를 제대로 잡아주고 가면 좋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신뢰가 생겼다.
단순히 맛만 보는 게 아니라 식감, 맛의 조화, 그리고 끝 맛까지. 입체적으로 맛을 평하며 페어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한편, 레스토랑에서는 드라이에이징을 할 수 없는 소고기 부위를 갈아서 한시적 메뉴로 화이트 비프 버거를 출시했다.
저렴한 부위를 사용한 덕에 적당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고, 점심 메뉴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엄민아를 버거 담당으로 옮기며 훈련을 시키고. 또 그 와중에 요리사들에게 만찬의 사이드 메뉴까지 연습시키고.
“잠깐만요, 셰프님. 그러니까. 애호박이, 우선 올리브유에 양파랑 마늘을 넣고, 마늘 타라곤 넣고 끓였다가 이걸 애호박이랑 같이 믹서기에 돌린다는 거죠?”
“아니, 액체는 따로 두고. 애호박은 별도로 시금치랑 바질 잎이랑 치즈를 넣고 믹서에 갈아두고, 체에 걸러낸 후에 타라곤 액이랑 섞으라고.”
“너무 복잡한데요.”
“그래야 맛이 텁텁하지 않고 정갈해. 마리네이드와 퓌레를 따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사이드 요리도 정말 손이 많이 갔다.
낮에는 레스토랑 업무.
브레이크 타임의 자투리 시간과 퇴근 이후는 신메뉴 익히기.
할 일이 쌓이다 보니, 만찬 전날이 되었을 즈음에는 주방 모두가 걸어 다니는 좀비 군단이 되어 버렸다.
“…. 그나마 모두 주방 안에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렇죠. 저 몰골로 밖을 돌아다니면 식당 이미지가 어떨지….”
만찬 장소의 주방을 세팅하면서 한길과 수셰프가 걱정과 안도를 나누고 있을 때, 슬아를 비롯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다가왔다.
“셰프님이랑 수셰프님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 말도 맞았다.
가장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저희 레스토랑의 평판을 위한 거니까 참으세요.”
거의 반강제적으로 얼굴에 메이크업이 덧발라졌다.
이상한 크림과 막대기와 로션과 파우더가 얼굴에 올라가자, 푸석푸석했던 피부는 흔히 말하는 광고 속 물광 피부로 변했다.
갤러리 주방은 화구가 부족해 휴대용 버너 몇 개를 가져오고, 소스와 사이드를 미리 조리하며 최종 점검을 하고 있을 때, 비서실장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셰프님, 메인 홀도 한번 보시죠.”
메인 홀의 전체적인 세팅도, 한길이 말한 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 점검을 다 마치자, 비서실장이 신기하다는 듯이 한길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너무 능숙하셔서 놀라운데요. 정말 이런 자리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 없습니다.”
“정말로요? 세팅은 그렇다 쳐도, 이렇게 순서나 동선까지 신경 쓴 분은 처음인데….. 진짜 처음이라면 이건 재능이네요.”
정말로 없었다.
현실에서는.
퀘스트 속에서는 수많은 만찬과 연회를 경험해 봤지만, 현대에서는 첫 경험이었다.
그래서인가.
퀘스트 속과는 달리,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진짜다.
현실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경험이, 이 순간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는 또 어디서 난 겁니까? 생각보다 재밌는데요?”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옛날 영국 궁전에서는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해서요.”
“요리인들은 요리만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다양한 공부를 많이 하시네요.”
비서실장은 한길의 옆에 맴돌며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고민하고 돌고 돌아 말을 꺼내려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비서실장이 드디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셰프님이 준비를 정말 많이 하셨는데…. 그… 중간에 조금 까칠하게 구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네?”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이 자리가 마음에 안 드는 분들도 계셔서요. 너무 신경 쓰시거나 흔들리지 마시라고요.”
#
“자네도 이제 왔나?”
송재룡 이사는 만찬 장소 앞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김동진 이사였다.
“요즘 바쁘다면서? 그런데 어찌 이 먼 길까지 다 오셨어?”
“꼭 와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는데 와야지, 그럼.”
“뭐야,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자네로 그랬어? 이거, 그냥 의기투합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 아니었나?”
소소한 대화가 오간 후,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송이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한대훈이 주최하는 건데, 그냥 의기투합 따위가 목적일 리 없지. 그 능구렁이가 이번에는 또 뭘 꾸미는지…..”
“조만간 신사업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 그거 때문이겠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법인데, 그놈은 욕심이 너무 과해. 적당히 확장했으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하는데,”
“그래도 실적이 있으니까.”
한대훈은 망해가던 TG 카드를 부활시킨 인물이었다. 그래서 회사 내의 평판도 좋았지만, 지나치게 빠른 변화와 성공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송재룡 이사도, 김동진 이사도.
후자에 속했다.
“실적이 아니라 유행일 수도 있지. 잠깐 반짝하고 사라지는 게 얼마나 많은데, 5 년 정도로 실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그건 그래.”
“요즘 젊은 사람들이야 워낙에 변덕이 심하니까 나중에 어찌 변할지는 모르는 거라니까? 그런데 그것만 믿고 10억 20억도 아니고 몇백억 단위로 투자한다는 게 말이 돼? 솔직히, 나만 해도 풍족하게 살지만 그런데 쓸 돈은 없는데 말이지.”
대화를 나누며 만찬장으로 들어오니,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세팅되어 있었다.
호텔 결혼식장에서 볼법한 동그란 테이블이 여럿. 여기까지는 익숙하지만……
마치 뷔페라고 차리는 마냥, 테이블 앞에는 기다란 네모난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없었고.
“뭐야, 케이터링 업체를 바꿨나?”
“그러게. 평소랑 다른데?”
“그런데 이상한 곳을 골랐나 보네. 아직 음식도 제대로 준비 안 하고. 이런 자리에 뷔페라니.”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송이사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아니, 저건 주방에서 통하는 문 아닌가? 뭔 자리 배치를 이딴 식으로 해놨지?”
“그러게.”
만약 뷔페를 세팅한다면,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다 세팅하는 것이 기본이다.
손님들이 밥을 먹는 동안, 조용히, 보이지 않게 음식을 세팅하는 건 케이터링의 기본 중 기본.
하지만 이 방의 배치는 이상했다.
이대로라면.
주방에서 요리가 나올 때마다 홀을 그대로 통과하면서 지나가야 한다.
손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사이로.
모두가 보는 가운데.
아무리 봐도 아마추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적당히 투덜투덜거리며 김이사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만찬장은 가득 찼다.
그리고 한대훈이 앞으로 가서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오셔서 감사합니다. 별것 아니지만, 항상 고생하는 여러분을 위해, 오늘만큼은 마음을 비우고 즐거운 한 끼를 드시라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치례가 이어지고, 한대훈이 마무리를 했다.
“오늘 만찬의 컨셉은 비프 테이스팅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한번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짝짝짝.
또 형식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그리고.
한대훈이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영화관에서 광고가 끝나고 본격적인 영화를 시작할 때 조명을 끄듯이.
“뭐지?”
“조명이 이상한가?”
“뭐 상영이라도 하려는 거 아냐? 서버들이 침착하잖아?”
잠깐의 웅성거림 후,
어둠 속에서 빛이 보였다.
주방에서 일렬로 걸어오는 빛의 행렬.
두 줄로 이루어진 빛의 행렬은, 만찬장 한가운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각 테이블로 흩어졌다.
그 불빛 중 하나가 송이사의 자리에도 내려앉았다.
“비프 켄들입니다. 소고기의 지방과 로즈메리, 타임, 마늘을 녹인 후, 다시 고체화 시켜 만든 식용 양초입니다. 함께 나온 빵과 드시죠.”
만찬이 시작되었다.
< 92. 첫 만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