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9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95화(95/325)
< 95. 왕비의 요구 >
“마크, 아직도 자나?”
누군가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감촉에 눈이 떠졌다.
어두운 방.
바닥에는 사람들이 널브러져서 우렁차게 코를 골고 있었다.
궁정 요리사들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방.
다시 영국이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퀘스트 #2 ? 왕비의 요리사>.
목표: 왕비의 주방으로 배정받으세요.
제한 시간: 7 일
보상: 50,000 고르메 포인트
실패 시: 상점에 등록된 아이템을 무작위로 회수합니다.
+
‘왕비의 주방이라…… 다행이네.’
이번에는 생각보다 퀘스트 난이도가 낮아 보였다.
영국을 떠나기 직전, 노리스 남작은 다음날 왕비를 알현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오늘 중으로 왕비를 만나게 될 터. 그때 잘 보이면 주방으로 옮겨갈 수 있겠지.
지금의 귀족 주방도 나쁘진 않았지만, 왕족의 주방은 또 다를 거다.
재료는 당연히 더 좋을 테고.
이번에는 왕실의 요리도 배워가고 싶었다.
필 페이튼에게 놀라움을 줄 만한, 조금 색다른 아이디어를 얻어야 하니까.
500년 전 요리라고 해도, 진짜 왕실의 요리는 분명 다를 테니.
“오늘 너, 쉬는 거 맞지?”
한길을 깨운 길버트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억하던 모습보다 안색이 많이 창백해 보인다.
“아, 오늘은 일이 있어서 하루만 쉬려고.”
“그래? 그럼…. 나도…. 오늘은 쉴까?”
그러고 보니.
지금 한길이 배정된 귀족 주방 요리사들은 한길과 길버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한길의 요리가 귀족들에게 반응이 좋으니 마지못해 함께 일하고 있지만, 결코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분위기.
그나마 한길이 있을 때는 큰 수작을 부리지 않았지만, 길버트 혼자 그 주방에 선다면 상당한 괴롭힘을 당할 거다.
그건 알지만…..
“내가 안 나온다고 너도 안 나오면 더 우습게 보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하아…..”
“정 불편하면 다시 하인 주방으로 가겠다고 마스터 쿡에게 부탁해 보던가.”
“그래도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브렌트를 비롯한 주방 요리사들은 성격이 괴팍하긴 했지만, 적어도 요리에 있어서만큼은 치사한 짓을 하지 않았다.
실력이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
길버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건 스스로 실력을 쌓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지금껏 궁중 안내를 해주고 고마운 인물이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한길이 보살펴 줄 수는 없으니까.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이건.
요리사가 믿을 건 요리실력밖에 없다.
그것보다.
한길이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혹시 왕비 주방의 요리사들도 마스터 쿡이 배정해?”
“왕비의 주방? 아니, 그쪽은 마스터 쿡이 따로 있어. 국왕, 왕비, 그레이트 홀. 이렇게 마스터 쿡이 세 명 있거든.”
“그러면 왕비의 주방은 어떻게 들어가?”
“왕비 전하가 직접 고르거나 그쪽 마스터 쿡이 선별하겠지.”
왕비 주방의 마스터 쿡은 본 적도 없고, 어디서 만나야 하는지 모른다.
역시, 왕비를 직접 만나서 인정을 받고 주방으로 배정받는 게 가장 빠르다.
그걸 확인했으면 다음은,
“왕비 전하는 어떤 분이지?”
“어떤 분이긴. 우리는 만날 일 없고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는 분이지.”
그 후로도 한길은 여러 번 왕비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정작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했다.
왕비의 이름을 알고 싶었는데.
1536년에는 왕비가 세 명이 있었으니까.
대놓고 ‘지금 왕비가 누구지?’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나 영부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을 테니.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길버트는 지금 왕비 얘기를 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무슨 요리를 만들지? 내가 뭘 만들어도 그 자식들이 비웃을 것 같은데.”
“정 안 되면 제철 재료를 써. 어떤 재료든 제철일 때 가장 맛이 좋으니까, 재료 맛만 살려도 어느 정도는……”
아, 제철.
“요즘 제철 재료는 뭐가 있지?”
“글쎄. 제철이라 해도 2월이라 별 것 없잖아? 사과가 나오긴 하는데 사과는 페이스트리랑 겹치니까……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지는데?”
“좀 피곤해서.”
한길은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필이면.
1536년 2월이다.
가장 안 좋은 시기로 와 버렸다.
1536년 2월, 헨리 8세는 은밀하게 자신의 오른팔인 크롬웰에게 왕비의 행실에 대해 조사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석 달 후, 왕비는 처형당한다.
하필이면 그 왕비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시기에.
‘2월에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더라?’
한길은 만찬 준비 도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며 이 시기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해왔다.
정보가 거의 없던 로마와 달리, 이 당시 영국 왕실에 일어난 일은 제법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니.
다시 기억을 되짚는 도중, 방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의 하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크, 노리스 남작이 부르십니다.”
#
“가만히 좀 계시면 안 됩니까?”
“천이 너무 따가워서….”
“얼마나 안 씻었으면 이런 것도 못 견딥니까.”
하인은 하얀 냅킨 같은 천으로 한길의 목과 등을 쓸고 있었다.
냅킨은 제법 거친 질감이라 마른 피부를 이태리타월로 긁는 듯이 따가웠다.
천이 스쳐 간 자리에는 강한 향신료와 허브 향이 났다.
향수를 바른 천이다.
그렇게 마른 목욕을 마치자, 하인은 한길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노리스 남작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흠… 나쁘진 않은데 색이 너무 칙칙하군. 녹색으로 한 번 입혀보지. 모자는 검은색으로 가져오고.”
남작은 한길의 차림새를 꼼꼼한 눈으로 훑더니, 세세한 지시사항을 내렸다. 그리고 하인은 새로운 의상을 가져왔다.
다섯 번의 탈의 후에야 남작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자네는 귀족은 아니니까. 이 정도면 나쁘진 않지. 너무 화려한 건 또 안 좋아하시니까.”
요리사 한 명 데려가는데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었지만, 궁중에서 봤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옷은 신분.
자신의 가치를 눈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다.
적어도, 현대보다는 남자도 여자도 보이는 모습에,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왕비 전하 앞에서 말은 조심하고. 그분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숙이고 얘기하고. 혹여나 거친 말이 나와도 절대 표정에 기분 나쁜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알현실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노리스 남작은 연신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남작도 많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건 한길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 시기의 왕비는 앤 불린.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비다.
폭풍같이 궁에 나타나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왕비의 자리에 오른 여인.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가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사형까지 당한 여인.
한길이 읽은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영국의 장희빈과 같은 인물이었다.
‘이번 퀘스트를 꼭 수행해야 할까?’
앞으로 목숨을 잃게 될 왕비인 데다가, 앤은 성격도 그다지 좋지는 못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만하고 불같은 성격이라고.
특히, 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프랑스 국왕이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혼담을 거절하자, ‘듣는 이들이 수치심이 들 정도의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고위 귀족이 그녀로부터 ‘개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었고.
가능하다면, 다른 길을 가는 게 좋다.
바로 국왕의 주방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게 제일이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퀘스트에 실패하면 상점에 등록된 아이템이 회수된다. 그것도 랜덤으로.
다른 재료들은 조금 아쉬운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상점에는 두 번 다시 어디에서도 못 구하는 재료도 들어있다.
그리고 요리사에게 재료는 생명이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해 보자.’
생각해 보면 아피키우스의 경우에도, 퀘스트 속 역사는 바뀌었다. 조금 위험한 시기에 오긴 했지만, 그 대신 이곳에 대한 정보는 더 많았다.
그리고….
요리사는 요리만 하면 된다.
왕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길은 요리만 하면 문제 될 일은 없다
“들어가쇼.”
그렇게 마음을 정하는 동안, 어느새 알현실에 도착하고 경비병이 길을 내주고 있었다.
왕비의 알현실은 호화로웠다.
벽에는 값비싸 보이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가구도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방 안에 앉아 있는 귀족 여인들의 차림새와 보석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오게나. 요즘 그대가 나와 안 놀아주니, 허전해서 하늘이 무슨 색인지도 모르겠더군. 카드 게임은 그대만 한 상대가 없거든.”
“여기 다른 시녀들도 많잖습니까.”
“내 시녀들은 다 너무 뻔해서 재미가 없는걸. 그대처럼 내 심장을 뛰게 할만 한 사람이 없는데 어쩌겠나.”
왕비가 다른 귀족과 주고받는 대화가 그대로 들려왔다.
뒷줄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까치발로 서니, 사람들 머리 사이로 왕비의 모습이 보였다.
삐쩍 마른,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웅장한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여인.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지만……
아마 현대에서 태어났다면 제법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을 것 같았다.
배우는 눈빛으로 말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농담을 주고받을 때는 눈동자가 익살스럽게 반짝였고, 알현하는 귀족의 가족 걱정을 할 때는 깊게 공감한다는 듯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만히 대화를 할 때는 어딘가 끈적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이 인사를 올린 후, 드디어 노리스 남작의 차례가 왔다.
“노리스, 왕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남작은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고갯짓했다. 그러자, 함께 온 하인이 금색 칠을 한 바구니를 들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자두입니다. 영국은 워낙 신선한 자두를 구하기 어려운데, 우연히 최상 품질을 발견했지 뭡니까. 전하께서 자두를 좋아한다고 하여 한번 들고 와 봤습니다.”
“그래?”
아까 다른 귀족들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왕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남작 등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길은, 살짝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도한 표정.
눈에는 의심이 가득하고 입은 표독스러울 정도로 굳게 다물어 있었다.
“그렇게 귀한 자두라면 값도 비싸겠군. 내가 어떤 값을 치러야 하지?”
“값이라니요! 그저 전하께서 즐겁게 드셔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죠.”
“금이 오가지 않는 경우, 오히려 더 비싼 값을 치르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지.”
왕비의 답변에 노리스 남작이 당황하는 게 보였고, 그녀의 미소가 더 싸늘하게 식었다.
“매지, 가서 하나 맛보도록.”
왕비의 명령에 시녀 중 한 명이 바구니로 다가왔다.
화려한 붉은 비단 천으로 만든 옷을 보니, 시녀라고 해도 그녀 역시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이다.
매지라는 시녀가 통실한 보랏빛 들고 베어 물려는 순간,
“독이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색상부터 확인해봐야지 않겠나?”
왕비의 목소리가 들리고, 시녀의 움직임이 굳었다. 남작도 얼어붙었고.
“후후, 농담인데 왜 그러나.”
왕비는 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웃었다.
시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자두를 맛보았고.
아무리 농담이어도, 독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데, 그걸 먹으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적어도 먹자마자 효과가 오는 건 아닌가 보군. 주방에 들고 가도록.”
지시를 내린 후, 왕비가 다시 남작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대가는 뭔가?”
“대가는 아니고, 그, 왕비 전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설마, 네 뒤에 서 있는 저 천박한 차림새의 남자는 아니겠지?”
“비록 출신은 천하지만, 최근 귀족들 사이에 화제가 되는 요리를 만들고 있는 요리사입니다. 왕관 양구이나 튜더 장미 요리는 전하께서도 들어보셨겠지요?”
“아….”
반응을 보니 한길의 요리에 대한 소문은 왕비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이… 이 요리사는 사람을 현혹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남작의 말에, 왕비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경멸을 힘껏 담은 코웃음이었다.
“이제는 하찮은 남작까지 나를 우습게 보나 보군.”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왕비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전하, 엘리자베스 공주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갑자기 알현실로 들어온 시녀의 말에, 잔뜩 얼어붙은 방 안의 공기가 누그러졌다.
엘리자베스 공주라면 불린의 딸.
미래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일주일 후, 매지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자네를 다시 부르도록 하지.”
왕비는 이 자리를 정리할 기세였다.
선물을 건네고도 얻은 건 없어 보였다.
한길의 앞에 있는 남작의 등짝만 봐도, 남작이 당황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이대로 두면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왕비를 언제 다시 알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리고 1주일 안으로 왕비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한길은 퀘스트를 실패하게 된다.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신가요?”
한길이 조용히 말을 꺼내자, 왕비의 경멸 가득한 시선이 이번에는 한길에게 날아와 꽂혔다.
이상한 시선이었다.
마치 엑스레이를 찍는 듯한, 내장까지 뚫어보는 듯한 눈.
“네 놈은 어깨 위가 조금 무거워 보이는구나. 가볍게 해주련?”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깨 위에는 머리가 있다.
함부로 떠들면 목을 자른다는 소리를 가볍게 농담처럼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다.
“실례가 되는 행동을 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남작의 말대로, 요리를 통해서라면 그 누구든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습니다. 한번 확인한 후에 돌려보내도 되지 않을까요?”
한길의 말에, 앞에 있는 남작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왕비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말에 책임은 질 수 있겠지?”
“네.”
“만약에 못한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원망은 안 하고?”
“네.”
“그렇다면 당장 특별한 손님을 위해서 한 상 차려주도록. 그 특별한 손님이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생각 없이 가볍게 놀려대는 그 입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자신 있습니다.”
왕비의 협박 앞에서도 한길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자신 있었으니까.
그 누구를 위한 요리든, 최선의 요리를 만들면 된다.
하지만 왕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도 못한 내용이었다.
“그러면 엘리자베스를 위한 밥상을 차려보도록. 내 딸이 요즘 편식이 조금 심하거든.”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때 세 살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손님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
‘정말 자신 있나?’
알현실을 나와 왕비의 주방으로 향하는 도중, 노리스 남작이 소곤거리듯이 말을 걸어왔다.
뒤를 연신 훔쳐보면서.
둘의 뒤에는 매지라는 시녀가 따라오고 있었다. ‘혹여나 독은 넣지 않는지 다 감시하고 시식해’라는 명이 있었으니까.
매지는 노리스 남작의 시선을 눈치채고 조용히 웃었다.
“전 잠시 제 방에 들렀다 가겠어요. 제가 도착하기 전에는 시작하지 말아 주세요.”
남작과 한길이 단둘이 대화를 하도록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 호의에 대해서는 남작이 기억해 주리라 생각하니까요.”
이제는 한길도 궁중 용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둘만 얘기할 수 있게 자리를 비워줄 테니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보답하라는 말.
시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남작은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냈다.
“자네, 내가 조용히 있으라 했나, 안 했나?”
“어차피 그 자리에서 말을 하나 안 하나, 잃을 건 없잖습니까.”
“그건 네놈 얘기고. 나는 앞으로도 궁중 행사에서 왕비 전하를 계속 봐야 한단 말이지. 에휴, 내가 뭔 생각으로 이런 놈을….”
“아까 제 어깨 위를 어떻게 한다는 얘기는 못 들으신 겁니까?”
요리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역사 속에 기록된 앤은, 왕에게 애걸하며 갖은 사형수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고 순탄하게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지만.
남작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딱히 동정심이 들지도 않았다. 남작 역시 한길을 이용하기 위해 이 자리에 끌고 왔으니까.
“그래서, 자네는 무슨 요리를 만들 생각이지?”
“그걸 묻기 전에 남작님도 알려주시죠. 이 시기에, 왜 하필이면 왕비 전하에게 저를 보내려는지.”
“그걸 자네가 알아서 뭐할 텐가?”
“그렇다면 저도 제 요리에 대해 알려드릴 이유가 없군요. 잘 들어가십시오.”
왕비는 저물어가는 태양이다.
굳이 이 시기에 왕비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는데, 남작의 속셈이 궁금했다.
“자네, 정말!”
남작은 그 후로도 몇 가지 특이한 욕설을 지껄였지만, 한길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포기한 듯했다.
“매지가 오는 군요. 슬슬 들어가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복도 끝에서 시녀가 다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단둘이 대화할 시간이 없다.
우왕좌왕하는 남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는 국왕이 한동안 왕비의 침실을 찾지 않고 있다더군.”
너무 아무렇지 않게 던진 얘기지만, 현대인인 한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사적인 얘기였다.
“왕비로서는 얼마 전에 아들을 유산해서 더 절박할 때거든. 빨리 아들을 또 낳아야 하는데 국왕 전하가 찾아오지도 않아. 들리는 말로는 왕비가 또 엄청난 말을 했다는데 그것까지는 자네가 알 필요는 없고.”
“……”
“그런데 국왕 전하가 다리 부상을 당한 후로는 갑자기 식탐이 심해졌지. 사냥도 못 가고 운동도 못 하시니까 요즘 갈수록 요리사들을 가까이 둔단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러면 저를 국왕 전하에게 직접 소개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있으니까. 반면, 왕비를 찾아오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성공하면 바로 눈에 띄지. 그래서, 요리는 무엇을 할 텐가?”
“아직 안 정했습니다.”
“뭐?”
남작은 속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미안해질 정도로.
“어른이라고 다 똑같은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우선 엘리자베스 공주님의 식성부터 알아보고 메뉴를 정해야죠.”
“…..”
“알아서 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 95. 왕비의 요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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