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oder RAW novel - Chapter (221)
탑 코더-221화(221/303)
***
탁.
전화를 끊은 비서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중간에서 나만 곤란하게 됐네.’
이 소식을 들고 가면 어떤 소리를 들을지 뻔했다. 다른 좋은 소식이라도 하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럴 만한 내용이 없었다. 비서가 사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래. 연락은?”
성충민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기다린다고 했어?”
“그렇게 말 하니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일정이 꽉 찼다고 했습니다.”
성충민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가보자는 거지.”
“······.”
이럴 땐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자 성충민이 비서에게 지시했다.
“당장 전산 실장 올라오라고 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비서가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얼굴에는 깊은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반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산실장의 표정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하루에도 수 번을 불러내 진행 상태를 확인하는 것 통해 도무지 일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디까지 했어.”
이번에도 같은 질문이었다.
“아직 리버싱 한 코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확인 중 확인 중 확인 중. 도대체 그 확인이 언제 끝나냐고.”
전산실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직접 확인해 보던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겨우 집어삼켰다.
“최소한 4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아직도 4일이야?”
벌써 열 번 정도 같은 질문과 답이 반복되고 있었다.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전산 실장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그 변화를 성충민도 눈치챘다.
“자꾸 물어보니까 짜증 나? 그러면 처음부터 일을 똑바로 했어야지. 제대로 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잖아. 안 그래.”
“전 제 할 일을 제대로 해 왔습니다. 이번 사건은 상대 해커가 뛰어난 실력을 갖췄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요.”
“네 실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렇게 못 미더우시면 새로운 사람을 뽑으십시오.”
“···뭐?”
전산 실장이 품고 있던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해킹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봉투였다. 한 번 마음이 돌아서자 말이 아주 술술 흘러나왔다.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 능력으로는 이번 일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새끼가 말이면 단 줄 알고. 너 이렇게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다른 데 취업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성충민은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전산실장이 초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걱정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어이가 없는 성충민이 멍하니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저 새끼가 진짜 미쳤나.”
열린 문 사이로 비서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회장님 전산실장이 퇴사한다고 사원증을 반납하고 갔습니다.”
성충민은 으득 이를 갈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다른 놈 뽑아다 앉히면 되니까. 그나저나 저 새끼 뒤 좀 조사해보라고 해.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 전무 올라오라고 해. 강승호 그 새끼 뒷조사를 시킨 게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
꾸벅 고개를 숙인 비서가 물러나고 황 전무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도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웹 사이트는 접속되지 않았다. 다행히 방송 채널은 복구되어 관련 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가끔 화면 조정 그림이 나타나며 원활하지 못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
미 대사관 앞에 내린 승호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CIA 요원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요원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승호가 말한 내용 때문이었다.
-블랙워치를 잡고 싶습니다.
블랙워치는 미국에서도 잡고 싶어 하는 악질 해커였다. 그 한 마디에 승호를 위한 모든 세팅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시중에 발표조차 되지 않은 최고 사향의 노트북에서부터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최고 사양의 VPN 장비.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필요하시면 슈퍼컴퓨터 이용 권한도 드리겠습니다.”
미국 슈퍼컴퓨터 서밋까지.
그야말로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그간 놈이 벌인 행적 조사 내용부터 시간순으로 정리해서 보여주세요. 서버에 남긴 흔적이나 로그도 전부 주시고요. 그러면 앞으로 일주일 안에 잡아 보겠습니다.”
일주일.
자신들이 벌써 수년간 추적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잡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이면 된단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강승호였다.
이미 잃어버렸던 코인에서부터 중국에 있는 북한 해커 안가까지 완벽하게 찾아낸 사람이었다. 이 밖에도 그의 활약은 수도 없이 많았다. CIA 요원은 그저 알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승호는 그가 남긴 로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CIA가 가진 자료는 방대했다.
2010년 자료부터 지금까지.
그가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승호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승호는 차분히 그의 흔적들을 살펴나갔다.
‘흐음··· VPN을 사용하는 것 같다.’
CIA에서는 흔적만 보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러 정보기관과 협력해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까지 함께 보관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VPN 사용.
그 근거로 3가지를 제시했다.
1. 침입 IP의 응답시간.
2. traceroute를 통한 경로 추적.
3. 접속자 클러스터링을 통한 예외 패턴.
그 근거들에 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아마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상대가 사용하는 VPN을 해킹할 수 있다면 오히려 쉽게 풀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CIA는 그에 대한 분석도 첨부해 두었다.
‘2048비트 혹은 그 이상의 델피헬만 키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존재하는 컴퓨터로 그 암호화를 풀어내려면 수학적으로 100년 이상이 걸린다.’
승호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했구나.’
최강대국 미국.
특히나 NSA에는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자랑한다. 이들이 왜 블랙워치라는 놈을 못 잡고 있는지 일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한테는 안 되지.’
아직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2048비트 암호화 방식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알고리즘을 시행할 때 정형화된 소수를 사용해. 결국, 소수를 대입해 보면 VPN을 통해 드나드는 암호화된 패킷을 까볼 수 있다는 말이지.’
물론 문제는 있었다. 간단히 말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무작위로 대입해야 한다. 일반 컴퓨터로 하려면 100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미국에서 운용하는 서밋이 있다면 충분히 풀 수 있을 것이다. 승호가 손을 들어 CIA 요원을 불렀다.
‘이왕이면 다른 놈도 잡고.’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벌써 해킹을 당한 지도 4일이 지났다. 전산 실장은 퇴사했고, 밑의 직원과 민간 보안 업체가 데이터 복구에 나서고 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에 8.7억.
벌써 5일이 지나 40억이 넘는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일이면 해커가 제시한 마지막 날짜였다. 더 미루면 하루에 만 바이트 코인이 추가된다.
900억이 추가 되는 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정훈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강제로 푸는 방법을 찾아서 몇 개에 테스트를 해봤지만, 데이터가 변형됩니다.”
부하직원의 보고에 이정훈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강 대표님을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슨.”
“선조 일보 쪽 전산 실장님도 갑자기 그만두시고, 직원들도 대거 퇴사하는 바람에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늦었는데······.”
“뭔데 빨리 말해봐.”
머뭇거리던 직원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각 서버에 히든 프로세스가 떠 있었습니다.”
이정훈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히든 프로세스.
숨겨진 프로그램이라는 말로 이런 것들이 좋은 의도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게 하는 일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데이터를 특정 서버로 복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이제 발견했단 말이야?”
“일단 이게 저희 쪽 툴에 걸리질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를 비롯한 진흥원 쪽 인력은 랜섬웨어 분석에 매달린 상태였고, 선조 일보 쪽 전산실장님은 퇴사하고 협력사들도 못 해 먹겠다고 하는 통에··· 죄송합니다.”
이정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며칠은 더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았다.
뭐든 할 수 있다.
미국 NSA 중앙 관제소.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수집되는 정보를 관리 확인하는 제임스 화이트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역시 스승님 찾아냈구나.”
승호가 나선 순간부터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빠르게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더니 슈퍼컴퓨터까지 이용 요청해 VPN에 적용된 2048비트 암호화 알고리즘까지 깨버렸다. 이제 관련 네트워크 패킷은 전부 복호화해 내부 내용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승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내부 네트워크 접근은?”
“지금 시도 중이야.”
VPN 그건 내부와 외부의 중간에 존재하는 벽 같은 것이었다. 그 벽을 넘어서면 내부에 닿을 수 있다.
“그거 찾으면 바로 그놈 잡을 수 있는 건가? 지난번 중국에서 북한 해커 놈들 잡은 것처럼.”
“다들 그걸 기대하고 있어. 그래서 CIA 전 지부에 코드 제로가 내려져 있고. 그런데 아마 쉽진 않을 거다. 그 내부에서도 아마 전 세계 ISP를 돌아다니면서 IP를 세탁했을 테니까.”
“쩝, 그래도 코드 제로까지 내릴 정도면 기대가 상당하다는 건데.”
코드 제로.
정보 수집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인력만을 남긴 채 하나의 작전에 투입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세탁했어도 스승님이 누구냐. ISP를 전부 격파하고 결국 그놈을 잡아낼 거야.”
승호에 대한 제임스의 믿음은 그만큼 확고했다. 그건 동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긴 강 대표님이 맡았으니 결국 잡을 것 같 긴해.”
“너도 자리 잡고 앉아서 지켜봐. 아직 배울 게 많다. 스승님이 직접 해킹하는 모습 쉽게 볼 수 있는 장면 아닌 거 알잖아.”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하나 끌어다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스크린에 한글로 된 문자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스크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너 한글 좀 볼 줄 안다고 했지.”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임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거 한 번 봐봐. 데이터가 이 자식 백 도어로 데이터 훔쳐가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스승님이 실시간으로 복호화 하는 중이고.”
동료가 안경을 고쳐 쓰며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1998년 IMF 당시 선진그룹이 정부와 한 뒷거래에 따르면 몇 개의 기업을 파산시킨 후 그 기업을 헐값에 살 수 있게 도와주도록 했다. IMF까지 부르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이런 여러 뒷거래가 얽히고설켜······.”
동료가 스크린에 나타난 다른 데이터를 확인해 보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정부는 리먼 브러더스 은행인수를 추진했다. 파급력이 너무 커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은행인수를 대가로 미국과 모종의 협약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줄지어 올라오는 데이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 및 그룹들에 관한 여러 내용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부분 뉴스로 이미 밝혀진 것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공개되면 치명적인 것도, NSA에서 가지고 있지 못한 한국 관련 정보도 있었다. 동료와 제임스는 한눈에 이 정보가 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거··· 국장님 모셔와야겠다.”
옆에 있던 동료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