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152)
조용하다.
폭풍 전의, 착 가라앉은 고요처럼.
“담당이 바뀌는 건 아냐. 나는 여전히 너희 매니저고, 프리티걸 전담 매니저는 따로 있으니까.”
“그게 프로젝트예요?”
임서영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상 밖의 반응이라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번엔 엘제이가 말했다.
“먹으면서 얘기해요. 다 식겠네.”
“맞다, 피자부터 열어! 치즈 엄청 추가해서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 돼!”
애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엘제이는 내가 사온 안주와 군것질거리를 까서 세팅하고, 이태희는 빈 잔에 종류별로 술을 채우고, 임서영은 먹음직스러운 피자를 조각조각 찢어 나눠준다.
뭐지, 이 반응.
내가 손채영을 담당한다고 오해했던 때처럼 배신자라고 소리치거나, 나라 잃은 백성처럼 땅을 치거나. 그런 종류의 리액션이 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으니까 오히려 내 기분이 묘하다.
분위기에 적응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는데, 이송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늘어졌던 긴장이 다시 팽팽해졌을 때.
“포테이토랑 불고기 있어요.”
“어?”
이송하가 양손에 든 피자조각을 내밀었다.
“제일 큰 조각으로 골라서 가져왔어요. 둘 중에 뭐 드릴까요?”
“어, 그냥 너 먹고 남는 걸로······ 근데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아니면 뭘 던지고 싶다거나.
내 말에 이송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화장기 없는 입술이 벌어졌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프로젝트.”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린다.
돌을 삼킨 기분이다.
다른 애들 반응도 혼란스럽지만, 이송하는 더 그렇다. 손채영이 나를 매니저로 달라고 했을 때도, 내가 남조윤이랑 일하겠다고 했을 때도, 이송하의 반응은 한결같았었는데.
매일 옆에 딱 붙어있던 애가, 문득 한 걸음 멀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나한테는 그 변화가 충격······.
“오빠한테 좋은 거잖아요. 기회잖아요.”
이송하가 툭 말했다.
“지금은 임시여도, 이번 프로젝트 잘하면 다음엔 진짜 팀장님 될 수도 있으니까. 정말로 잘됐으면 좋겠어요. 담당만 안 바뀌면 돼요. 오빠가 승진해서 팀장님 되면, 저도 열심히 해서 더 많이 뜨면 되니까.”
그러더니 전투적으로 피자를 물어뜯는다. 피자 반쪽이 순식간에 입 안으로 사라졌다. 이송하는 뺨 주머니에 비상식량을 가득 우겨넣은 다람쥐처럼 양 뺨을 불룩하게 만들고 나서야 다시 말했다.
“팀장님이 직접 관리하고 스케줄도 같이 다닐 만큼, 제가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한 연예인이 되면 돼요. 그럼 계속 같이 일할 수 있잖아요.”
불룩한 뺨 때문에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희한하게 나한테는 한마디 한마디가 종소리처럼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얘는 대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는 거지.
이송하가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흠칫 놀란다.
“어, 제가 두 조각 다 먹었어요. 언제 다 먹었지. 아직 남아있을 거예요!”
빵 부스러기만 남은 빈손을 털어내더니 재빨리 테이블로 달려간다. 그리고 피자박스에 남은 조각을 들고 흔든다. 빨리 오라고 손짓까지 하면서.
나는 머리를 탈탈 흔들었다. 메아리처럼 남아있던 종소리가 흩어진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어요.”
이송하 옆자리에 앉자마자, 이태희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임서영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끄덕거렸다.
“오빠가 나날이 유명해지고, 하는 일은 또 어마어마하게 잘되고 그러니까. 언제까지 저희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저희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구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데다가, 하필이면 우리랑 똑같은 걸그룹이라 좀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축하할 일이죠, 이건.”
엘제이가 덧붙였다. 임서영이 건배를 할 타이밍이라며 호들갑스럽게 잔을 든다. 술잔 다섯 개가 허공에서 요란하게 부딪쳤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얼음까지 띄운 차가운 맥주를 들이켰는데, 목구멍부터 뱃속까지 뜨끈한 것이 퍼져나간다.
마음의 준비라.
내가 다른데 열중해 있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 얘기를 좀 더 일찍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담당이 바뀌는 게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걸그룹을 데리고 하는 일이니까. 남조윤 때와는 느낌이 다를 텐데. 섭섭한 티를 낼 만도 한데도,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애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나한테는, 너희가···.”
“으아아, 하지 마요, 이제 그만 하세요!”
진지한 말을 해볼 참이었는데.
임서영이 얼굴을 감싸고 소리쳤다.
“아직 말은 시작도 안 했는데.”
“나한테는 너희가 첫 번째야, 너희가 최고야, 뭐 이런 말 하실 거잖아요!”
“비슷하긴 한데.”
“지금은 오빠가 팔십 년대 아저씨 개그를 해도 눈물 날 타이밍이라구요! 참고 있단 말이에요! 오빠가 그런 말 하면, 우리 다 터져서 파티고 뭐고 눈물만 한 사발씩 쏟을 거라구요!”
“난 울 생각 없는데?”
엘제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덧붙였다.
“우리 중에 밤새도록 눈물 질질 짤만한 물건은 너밖에 없어.”
“이씨, 그럼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그 사이에 해치우세요!”
벌떡 일어난 임서영이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애들 사이에서도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여튼 임서영이 끼면 진지하던 분위기도 순식간에 물렁물렁해진다. 저런 모습을 내 앞에 아니라 예능에서 보여줘야 하는데.
생각하며, 이송하가 건네는 닭다리를 받았을 때였다.
“근데 왜 프리티걸이에요?”
엘제이가 분위기를 확 뒤집었다.
“그때 오빠 명함 받아간 멤버, 누구더라. 정재이? 걔 때문이에요?”
“아니야.”
뺨이 따끔따끔하다. 안 돌아봐도 누구 시선인지 알 것 같다.
“정말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그 멤버는 지금 반 탈퇴상태라 어떻게 될지 몰라.”
콕콕 박히던 시선이 보드라워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엘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잘못 봤나? 그때 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서, 분명 오빠한테 연락할 것 같았는데. 오빠도 그 걔한테만 눈길 뒀었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걔 때문에 앨범 만드는 건 줄 알았죠.”
쟤는, 눈치 빠른 것도 저 정도면 초능력 수준인데.
프리티걸의 풍비박산 난 집안사정을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홀로 병나발을 불고 있는 이태희에게 말했다.
“프리티걸 싱글앨범을 만드는 프로젝트지만, 궁극적으로는 너희들 정규 앨범을 위한 일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나 믿고 조금만 기다려 봐.”
희미하게 웃으며, 이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탁탁거리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힌다.
뭔가 했더니, 내 손가락 끝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주먹을 말아 쥐고 앞자리를 바라봤다. 김현조와 3팀장이 이어폰을 한쪽씩 꽂은 채 집중하고 있다.
이태희의 첫 번째 자작곡에.
내가 들을 땐 순식간이었는데. 지금은 사 분이 네 시간으로 느껴진다.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갈증이 난다. 김이 펄펄 나는 커피라도 목구멍에 들이붓고 싶은데, 손안에 있는 커피 잔은 텅 빈지 오래다.
마침내 첫 번째 곡이 끝났다.
3팀장이 이어폰을 빼고 김현조에게 뭐라고 속삭인다. 표정이 밝진 않다.
별론가?
내가 듣기론, 물론 내 귀가 막귀라는 게 증명되긴 했지만, 그래도 절대 나쁜 곡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는 프리티걸 싱글곡이랑 비슷한 퀼리티로 들렸다고.
“자작곡 두 개 더 있다고 했지?”
3팀장이 구레나룻을 긁적이며 말했다.
“한꺼번에 다 들어보고 얘기하자.”
뱃속의 장기가 찌그러지는 느낌이다.
남은 두곡을 연달아 재생했다. 두 사람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다. 그나마 고개나 발목을 까딱거리는 작은 리액션이 위안으로 다가왔다.
내가 쥐고 있던 커피 잔을 우그러뜨렸을 때, 플레이어의 재생도 끝났다.
두 사람이 다시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인내심의 심지가 끝까지 타들어갔다.
결국 못 견디고 물었다.
“어때요?”
“혹시 태희가, 이거 말고 다른 곡은 없대?”
김현조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완성된 건 그게 전부예요.”
“그렇지?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있다.
굳어있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두 사람이 듣기에 세곡이 다 부족하다면, A&R팀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이건 최악의 상황인데. 이태희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곡이니까, 적어도 세곡 중 하나 정도는 좋은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지금까지 모집된 곡들 중에 더 좋은 곡이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되면 프리티걸의 싱글 곡은······.
넵튠 정규앨범에 타이틀곡 감이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그 곡을 들려주면. 내가 미래에서 보고 들었던 것처럼 김현조가, 그리고 3팀장과 다른 직원들이 그 곡을 듣고 넵튠이 부르면 더 대박 날 곡이라고 확신한다면.
당연히 그걸 넵튠 타이틀로 돌리고 프리티걸에겐 다른 곡을 주자고 하겠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어도, 회사 입장에선 당연히 넵튠의 정규 앨범이 더 중요하니까.
나한테도 마찬가지고.
겨우 평온을 찾았던 마음에 다시 폭풍이 밀려온다.
“이거 어떡하나.”
3팀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현조 너, 지금까지 모집된 곡 다 들었댔지? 그 중엔 건질만한 건 있냐?”
“몇 개 골라놓긴 했는데 타이틀곡으론 아쉽고. 수록곡으론, 뭐.”
“우리 이번 타이틀곡은 뭐로 갈까. 난 첫 번째가 괜찮던데?”
뭐?
“난 두 번째. 그게 더 넵튠 색하고 잘 맞잖아.”
“저번처럼 더블로 가는 것도 방법이고. 머리 맞대고 고민해봐야겠네.”
중간부터 내용이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봤더니, 3팀장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복덩이, 아니지, 정 팀장님 사진 좀 찍어 놔라. 저런 표정은 또 처음보네.”
“그러니까. 무명 걸그룹 앨범 내보자고 할 때는 갑자기 패기가 하늘을 뚫더니, 임시팀장 직함 달고 나니까 나이도 팀장급이 됐나, 늙은이처럼 왜이래? 그만 오락가락해 임마. 기막힌 짓을 해도 차라리 패기 넘치는 게 낫다.”
김현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철썩 때린다.
“좋아, 임마, 좋아. 이런 걸 들고 와 놓고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냐?”
굳어있던 어깨가 탁 풀어졌다.
이 양반들이 진짜.
“놀랐냐?”
“장난 때문에 살인나는 게 이런 경우일 걸요.”
말하면서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맙소사. 십오 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진땀으로 이마가 축축하다. 힘 빠진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놓고 다시 확인했다.
“세곡 다 괜찮아요?”
“위성보다 더 좋아.”
김현조가 곧장 대답했다. 확신과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다.
그가 테이블을 탁 치며 말했다.
“첫 곡 듣는 순간 확 꽂히길래 됐다, 했는데. 두 번째에서 또 이거다, 싶더라. 세 번째도 그랬고.”
“태희 얘는 진짜 물건이다, 물건이야. 자작곡이 두 번 연속으로 터져서 이번엔 압박감이 심했을 텐데. 이런 곡들을 줄줄 뽑아내고. 이 정도면 이번 정규 앨범도 만들 맛 나겠는데?”
그날 술 취한 송인호의 감상이 정확했구나.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일 줄 알았으면 그냥 바로 꺼내놓는 건데. 괜히 혼자서 머리 쥐어짜고 궁리하느라 시간만 낭비했네.
이태희한테 좋은 소식을 전해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훈훈하다.
3팀장이 유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복덩이 네 계획대로 되면, 어쩌면 저번 미니앨범 때보다 더 대박 날지도 모르겠다.”
계획.
만약 내가 보지 못한 미래에, 이태희의 자작곡으로 낸 앨범이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건 단순히 노래가 안 좋아서가 아니라 운이나 타이밍, 그리고 대중성의 문제가 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내 손으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고.
프리티걸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싱글 앨범을 성공시켜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그 다음에 넵튠 정규 앨범을 꺼내 놓을 계획이다. 다른 홍보도 필요 없을 만큼 커다란 관심 속에서 컴백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 거다.
“근데 프리티걸 싱글 곡은 없냐?”
김현조가 불쑥 물었다.
“무명 작곡가가 만든 곡 있다며. 그건 여기 없어? 그것도 궁금한데.”
잠깐 동안 머릿속에 다양한 생각이 스쳤다.
괜찮지 않을까. 이태희의 곡을 저만큼 마음에 들어 하는데. 게다가 이태희의 곡은 자작곡이라는 어마어마한 메리트도 있는데다가, 무려 세 곡이나 되니까. 이 정도면.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있어요.”
두 사람이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나는 셀 수 없이 들었던 가이드 버전의 싱글 곡을 재생했다.
그리고 둘을, 특히 김현조의 표정을 주시했다.
[ 무능하거나, 유능하거나 (5) > 끝ⓒ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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