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158)
“그, 그걸 교양프로로 만들겠다고? 제정신이야?”
황 부장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묻고 싶다. 교양국이라니. 교양국이라니?
쇼양이니 인포테인먼트니 하면서 교양과 예능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주 시청자 층부터 포맷까지 한참 다르다. 파급력이나 이슈 생산력은 비교할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면 무조건 예능이 유리한데.
주위 사람들을 모조리 혼란에 빠뜨려놓고, 조 부장은 혼자 느긋했다.
“교양국 피디를 데려올 거라니까. 교양프로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게 무······ 너 혹시 유수영이 말하는 거냐?”
황 부장의 표정이 요동을 친다. 유수영. 이름을 재빨리 머릿속에서 뒤져봤다. 낯설진 않다. 어디서 들었지? 교양국 피디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옆을 보니 이태신 실장은 아는 눈치다. 눈이 휘둥그레 하다.
뒷짐을 진 조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부장이 큰 소리로 헛웃음을 쳤다.
“난 또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걔 절대 예능 안 한댔어!”
조 부장을 따라 비상계단을 한층 내려가니, 정말 교양국이었다.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종일 회의실에 죽치고 있거나 야외로 도는 예능국 직원들과 달리, 교양국 직원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 부장이 유수영 피디를 찾는 동안 이태신 실장이 정보를 속삭였다.
“삼년 전까진 예능 했던 피디님이에요. 그, ‘쉐어하우스’ 런칭 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자주 챙겨봤던, 몇 안 되는 예능이라서.
십여 명의 연예인들을 집 한 채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시트콤 뺨치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던 버라이어티 프로. 출연자가 수두룩한데도 편집으로 각각의 캐릭터를 확실히 살렸고, 멤버들 간의 케미와 스토리텔링도 좋았다.
그래서 볼 때마다 피디가 실력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인기도 어마어마했었다. 시청률도 거의 20프로 대에서 놀았었고.
메인피디가 교체된 후로 망했던가?
“그거 말고도 커리어 좋았는데. 아마 임신해서 프로그램에서 빠졌을걸요.”
아, 임신.
“근데 커리어 좋고 실력도 입증한 피디가, 지금 왜 교양국에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그가 아쉽게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인터넷에는 다른 정보가 있나 확인해보려는데, 조 부장이 손짓했다.
“지금 시사중인가보네요.”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 교양국 복도 끄트머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편집실. 그중 한 칸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뒤통수가 셋. 누가 유수영 피디일까 가늠하는데,
조 부장이 말했다.
“기획안 보면서 생각한 건데, 이게 사실 성장스토리로 봐도 되잖아요. 예능적인 재미도 중요하지만 휴먼다큐의 감성을 깔고 가면 더 좋을 것 같던데. 정 실장님 생각은 어때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가장 좋죠. 스토리텔링을 잘해서 감동까지 주면, 휘발성 재미보다 여운이 훨씬 더 오래 갈 테니까요. 멤버들 이미지 메이킹이나 호감도 상승에도 더 도움이 될 거고.”
문제는 그런 거 잘못 만들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찬란한···.
문득 다시 편집실을 바라봤다. 종이 한 장이 붙어있다.
‘특별 휴먼다큐, 이웃’ 편집 중.
조 부장이 은은하게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 방면으론, 내가 아는 피디 중에 최고예요.”
최고.
그 짧은 단어가 품은 여운을 곱씹는 틈에, 그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시사중이라 인사는 짧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가 조 부장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부장님. 보던 것만 마저 끝내구요.”
“그래, 그래. 편하게 해.”
이 여자가 유수영 피딘가?
삼십대 중반쯤 됐을까. 길고 흐느적거리는 원피스에 카디건, 말투는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다. 연예인이 득시글한 버라이어티를 진두지휘했던 메인피디라, 카리스마로 휘어잡는 여장부 스타일을 상상했는데. 선입견이었나 보다.
모니터에선 계속 편집된 영상이 흘렀다.
딱 봐도 모금 방송이다. 난치병에 걸린, 형편이 어려운 어린아이의 사정을 소개하고 ARS로 후원받는. 이분쯤 보고 있는데 이태신 실장이 고개를 슥 숙인다. 맙소사. 그새 눈이 울멍울멍하다.
재생이 끝나자마자 유수영 피디가 손을 들었다.
“앞으로 좀 돌려볼래? 애엄마가 간호하는 장면.”
“네, 선배님.”
남자 피디가 재빨리 화면을 돌린다.
앞부분을 다시 확인한 유수영 피디가 말했다.
“이거 싹 들어내자. 애엄마가 비호감이야.”
“······네?”
피디작가가 눈을 껌뻑였다.
잘못 들었다는 듯, 아니, 잘못들은 것이길 바라는 것처럼.
유수영 피디가 아차 싶은 얼굴로 덧붙였다.
“비호감으로 보인다고. 어머니 옷이 너무 좋아 보여.”
“어, 저거 비싼 브랜드 아닌데요.”
“비싸 보이잖아. 백도 비싸 보이고. 화장도 너무 찐하지 않니?”
말투는 여전히 나긋하지만 어색하다. 뭔가 다르다. 유수영 피디와, 다른 두 피디작가는 뭔가가 달랐다. 마치 초식동물들 사이에 육식동물이 내숭떨면서 끼어있는 느낌이랄까.
점점 더, 저 여자한테 흥미가 생긴다.
남자 피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송 촬영하는데 너무 추레한 꼴로 나오면 그렇다고, 일부러 고르고 고르신 건데. 화장도 뭐 립스틱 좀 바른 거고. 옷이랑 화장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왜 안 중요하니. 어린애 병원비 대느라 쌀 살 돈도 없어서 교회에서 얻어오는 집인데. 영상 보면 그렇게 안 보이잖아. 먹고살 만 해 보이잖아. 시청자들이 기부하고 싶겠니?”
“근데 이거 빼면 알티 모자라는데요.”
“애가 병실에서 혼자 밥 먹는 그림 더 길게 붙여. 그런 건 오래 봐도 돼.”
“저, 음, 부장님은 간호하는 그림 좋다고 하셨는데.”
작가가 기습적으로 끼어든다.
“부장님이?”
“아까 슬쩍 보고 가셨거든요.”
유수영 피디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곧 그녀가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대로 해, 그럼.”
“부장님, 저 이제 예능 안 해요.”
대구탕 집에 앉아 제대로 통성명을 하자마자, 유수영 피디가 말했다.
“이제 애도 있는데 그렇게 안 살아요. 피 튀기는 정글 말고, 초원에서 평화롭게 살 거라구요. 초식동물처럼.”
“겉은 초식동물처럼 보이긴 하네.”
“교양피디 다 됐어요. 뭐, 적성에도 맞구요.”
“알았어. 강요 안 할 테니까, 만난 김에 이 기획안 어떤가만 한번 봐봐.”
조 부장이 은근히 말하며 리얼리티 기획안을 내밀었다.
유수영 피디가 나를 힐끔 본다.
“이거 지금 장안의 화제 아니에요? 하고 싶어 하는 피디들 많을 텐데.”
“딱 보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 네가 제일 잘할 것 같아서.”
“저야 감 다 떨어졌는데 뭘······.”
빼면서도, 유수영 피디는 기획안을 받아 챙겼다. 눈동자가 바쁘게 기획안을 훑는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표정이 초조해진다. 테이블 밑에서 구두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유수영 피디가 물었다.
“그럼 프리티걸에 지금 남은 멤버가 세 명인가요? 네 명?”
이태신 실장이 나를 쳐다본다. 조마조마한 기색이 뚜렷하다.
“넷입니다. 정재이라는 멤버는 연락두절이긴 한데, 찾고 있어서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확 풀어진다.
홍보팀 박 팀장이나 김현조는 그냥 깔끔하게 붕어 셋만 안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는데, 내가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재이나 이태신 실장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고.
프리티걸의 싱글 성공에 혹시라도, 혹시라도 정재이가 영향을 끼쳤을까봐.
제2의 이송하라는 타이틀을 달았던 멤버니까.
“사연만 괜찮으면, 그 멤버 찾아서 데려오는 걸 찍어도 괜찮겠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또 묻는다.
“다른 두 명은 아예 나간 거죠?”
“네. 그쪽은 이미 다른 회사랑 계약까지 된 상태라.”
“나가자마자. 안 좋게 나갔어요?”
이태신 실장의 표정을 본 유수영 피디가 다시 중얼거렸다.
“안 좋았구나. 그럼 그쪽 반응에 따라 드라마 한편 나오겠네. 안타까운 휴머니즘물이거나, MSG 쏟아 부은 막장물이거나. 진짜 재밌으려면 그쪽에서 어그로를 끌, 아니지, 평화로운 생각을 해야지. 평화.”
그 뒤로도 유수영 피디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복화술 같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 속에는 솔깃한 게 한둘이 아니라 핸드폰 메모장에 받아 적기까지 했다.
처음 조 부장이 교양국 피디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황당했는데.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난다.
“누가 연출할지 몰라도 계 탔네요. 근데 저는 진짜 예능은 안 해요.”
유수영 피디가 기획안을 덮었다. 조 부장이 그걸 받아 챙겼다.
“알았어.”
“저는 교양이 적성에 맞더라고요. 교양 체질인가 봐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싫다는데.”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눈으로 기획안을 보던 유수영 피디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벌떡 일어나 먼저 식당을 나선다.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저장된 애기사진을 부적처럼 보면서. 평화, 평화를 중얼거리면서.
조 부장이 나와 이태신 실장을 보고 물었다.
“얘기해보니까 어때요? 프로그램 메인피디 감으로.”
머지않아, 우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 부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다행이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 봐요.”
조금만?
그가 말한 조금만은, 정말 조금이었다.
밤 열두시가 지나기도 전에 조 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 됐다고. 술집인지 주변이 잔 부딪치는 소리로 시끄럽다. 그리고 술에 진탕 취한 듯, 혓바닥이 꼬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교양 드어럽게 재미없어요. 드어어럽게!
유수영 피디가 흐느꼈다.
-부장님, 예능이 하고 싶어요······!
***
“대박. 프리티걸 리얼리티 프로, IBC에서 제작한대.”
NK엔터테인먼트 안무실엔 음악이 아닌 수군대는 소리가 흘렀다.
연습을 끝낸 데뷔조 멤버들이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케이블도 아니고 공중파에서 하네. 진짜 인생 한방이다.”
“쟤넨 어떻게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냐? 당첨로또 내버리고 온 거 아냐?”
멤버 한명이 구석을 힐끔거렸다. 프리티걸을 탈퇴하고 NK 데뷔조에 합류한 윤보라와 박효진이 짐을 챙겨 나가고 있었다. 관이라도 매고 있는 것처럼 우울한 분위기가 풍겼다.
둘보다 먼저 데뷔조에 들어온 프리티걸 전 멤버 강수란이 혀를 찼다.
“나도 아까워서 잠이 안 오는데, 쟤들은 오죽하겠어?”
“어떻게 탈퇴하자마자 이러냐. 나 같으면 속에서 천불나서 못살겠다.”
“이제라도 계약 해지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지?”
“프로필 사진도 다 찍었는데 실장님이 가만두겠어? 쌍욕만 처먹지.”
행운을 놓친 동료를 안타까워하는 말이었지만, 몇몇의 표정엔 비웃음이 스쳤다. 그 수군거림을 들은 박효진이 안무실 문을 부술 듣이 닫았다.
“야, 이거 봐.”
핸드폰을 보던 윤보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이없네. 포털에 프리티걸 치니까 우린 탈퇴멤버로 뜨는데, 재이언니는 그대로 있다?”
“뭐?”
“기사에도 멤버 네 명이라고 나와. 실장님 너무한 거 아냐? 우리한텐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미 계약서를 써서 방법이 없다, 뭐 울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시더니. 우리보다 먼저 나간 재이언니는 안고 가겠다는 거네?”
화면을 본 박효진이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게 어딨어. 바로 며칠 전까지 우리도 같이 고생했는데.”
“내 말이. 우리만 억울하잖아. 진짜 계약 해지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NK에서 놔주는 거 아니면 방법 없다잖아.”
울분이 치미는 목소리였다. 두 사람의 표정이 더 음울해졌다.
“확 고소할까?”
윤보라가 바닥을 걷어차며 말했다.
“NK를?”
“아니, 사장님이랑 이태신 실장님. 몇 년 동안 거기서 제대로 지원받는 것도 없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보상은 하나도 못 받는 거잖아. 우리 몫도 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손해배상 청구 뭐, 그런 거···.”
“야. 고소하고 연예인 인생 쫑낼래?”
신경질적으로 말하던 박효진이 움찔했다.
계단 아래, NK실장이 우뚝 서 있었다.
“효진이 말이 맞으니까 멍청한 생각 말고. 머리를 좀 생산적으로 굴려봐. 너희는 고소 대신 인터뷰를 해야지.”
“이, 인터뷰요?”
윤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NK실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방송 나가고 프리티걸에 화제 집중됐을 때 너희가 억울하다고 나서라고. 피해자 코스프레 잘해서 대중들 동정만 사면, 그 관심 우리가 다 끌어올 수도 있어. 인지도 어마어마하게 쌓고 데뷔하는 거지.”
“아니죠. 그게 왜 피해자 코스프레예요?”
막막한 곳에서 길을 발견한 사람처럼, 박효진이 눈을 빛냈다.
“우리 진짜 피해자 맞잖아요.”
[ 연예인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1) > 끝ⓒ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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