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159)
“이번 일은 제가 참, 실장님께 너무 죄송하고 면구스럽습니다.”
IBC 로비 테이블에 앉아 조 부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최병수 피디가 맞은편에 슬그머니 앉더니, 절절한 사과를 늘어놓는다.
“그래도 제가 중간에서 황 부장님 설득하려고 애 많이 쓴 건, 실장님도 알아주셨으면 싶어서······.”
얼씨구.
목까지 올라온 코웃음을 참았다.
저자세로 나오고 있지만, 저거야말로 할리우드 액션이다. 속마음은 이거지. 내가 이렇게까지 사과했으니 지난 사건은 덮자. 어차피 굿프렌즈는 계속 가는 거 아니냐. 같은 배를 탄 사이니까 빨리 화해하고 노 저으러 가자.
맞는 말이긴 하다. 비즈니스를 생각하면.
IBC에서 리얼리티 프로를 팍팍 밀어주기로 한 마당인데, 아무리 저 양반이 마음에 안 들어도 판을 엎을 수는 없으니까. 구두계약도 계약이니 굿프렌즈 장기 프로젝트에도 출연해야하고.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이번일로 최 피디한테 빚을 지워놓고 우리 애들한테 더 신경 쓰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썩은 표정이로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잡긴 잡아야 하는데.
그건 아는데 말이야.
“실장님, 방송국 들어오신 김에 저희 장기 프로젝트 회의를 좀······.”
이대로 넘어가기엔, 저 양반이 참 밉살스럽단 말이지.
“지금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조 부장님 뵈러 온 거라서. 국장님하고 얘기 끝나시는 대로 회의하기로 했거든요.”
“네? 조 부장님 지금 국장실에 계세요?”
왜 놀라지?
“네. 리얼리티 편성 때문에 불려가셨어요.”
“황 부장님도 좀 전에 국장실 들어가셨는데?”
응?
***
“굿프렌즈 빼 줄 테니까, 거기 들어가.”
예능국장이 말했다.
조 부장이 대답하기도 전에 황 부장이 들고 일어났다.
“빼다니요? 개편 회의할 때는 최 피디 좀 더 믿어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때 보여드린 장기 프로젝트 기획안 가지고 지금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러시면···!”
“누가 종영시킨대? 어차피 포맷 바꾸기로 했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시즌2 준비기간 가질 거라고 알리고. 제작진이랑 출연자들한텐 잠깐 대기하라고 해. 그 동안 리얼리티 방송 내보내고.”
벼락같던 황 부장의 기세가 좀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 피디한테 새 시즌 준비하라고···.”
“대기하라니까.”
국장이 말허리를 잘랐다.
“유수영이가 리얼리티 방송 어떻게 만드나 보고. 괜찮으면 굿프렌즈 메인피디 교체할거야.”
황 부장이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놀란 건 조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유 피디한테 맡겨보시려고요?”
“교양국에서도 시청률은 잘 뽑았다며.”
“그 실력이 어디 갈까요.”
“교양이랑 예능이랑 같아? 국장님! 유수영이 걔 예능 안한지 삼 년째예요! 그동안 애나 보면서 널널하게 교양 찍느라 감 다 떨어졌을 텐데, 어떻게 정규 프로그램을 덥석 맡깁니까!”
“뭐가 덥석이야. 하는 거 보고 맡긴다니까?”
국장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한동안 국장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국장실을 빠져나온 두 부장이 동시에 전화를 걸었다.
***
탄산이 밀려온다. 거대한 해일처럼 내 답답함을 휩쓸고 지나간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조부장의 목소리는 천상의 나팔소리보다 감미롭다. 절로 입 끝이 길게 벌어진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최 피디는 익사 직전의 표정이다. 그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황 부장이 씩씩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까 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이게 바로 정신적 오르가즘인가.
부장실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일어났다. 아직도 전화를 못 끊은 최병수 피디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난다. 날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는다.
그 손을 악수하듯 가볍게 잡았다가 뗐다.
그리고 내 환한 미소가 안타까움의 미소처럼 보이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장기 프로젝트 회의는, 미뤄야겠네요.”
“잠깐만요, 정 실장님. 부장님, 잠깐, 실장님, 저기···!”
“지금 조 부장님이 급하게 찾으셔서,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이라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이렇게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때가 얼마만이더라.
하나가 잘 풀리면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기고, 두 개가 해결되면 두 개의 고민거리가 생겼던 나날들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부처님 가운데토막처럼 평화롭다.
그래, 인생이 이럴 때도 좀 있어야지.
그동안 내 인생은 너무 스펙터클했잖아.
얼라이브는 천만관객을 쾌속 돌파하고 기록경쟁으로 돌입했다. 남조윤은 화보를 찍고 잡지 인터뷰를 소화하면서, 충무로가 주목하는 실력파 신인으로 이미지를 굳히는 중이다.
좋지. 이 정도면 아주 좋지.
로열패밀리는 시청률 25프로를 넘겼다. 이송하 공중파 데뷔작이라, PBS드라마국에서 연말에 무슨 상을 줄지 벌써부터 고민 중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뭐, 신인상은 맡아 둔거나 다름없다는 게 중론이고.
이보다 더 좋기도 어렵다.
이제 남은 건 넵튠의 정규앨범이랑 프리티걸의 싱글 프로젝튼데.
마음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어서 그런지,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리얼리티 프로의 촬영이 시작된 후론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넵튠과 프리티걸 붕어들의 첫 만남. 그리고 넵튠 애들이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붕어들에게 W&U 연습실과 녹음실을 소개한 날.
유치원생들처럼 입을 빠끔거리며 졸졸 따라가는 붕어들을 보며, 유수영 피디가 씩 웃었다. 눈부시다. 예능판에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저 여자 얼굴에서 광이 나고 있다.
“프리티걸 멤버들 분량은 발로 편집해도 되겠어요.”
“좋다는 뜻이죠?”
“어리고 예쁘장하고 짠하잖아요. 저 이미지만 유지하면 더 만질 것도 없죠. 시청자들이 보면서 쟤들 좀 떴으면 좋겠다고 응원하게 될 거예요. 애들이 뜨려면 시청자가 관심을 가져주고 신곡을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펌프질 좀 하면, 내 손으로 띄운다는 참여의식도 생길 거고.”
유수영 피디가 예언하듯이 말했다.
“그럼 넵튠은 어때요?”
프리티걸도 중요하지만, 넵튠 멤버들 이미지 메이킹도 중요하다. 팔 걷어 부치고 리얼리티에 출연하기로 한 만큼, 정규 앨범 나가기 전에 최대한 멤버 각각의 호감도를 높여주는 게 목표니까.
“넵튠은 이미 인지도가 있어서, 이미지를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한데.”
유수영 피디가 돌연 조연출을 불러 세웠다.
“넵튠 실제로 보니까 어떠니?”
“예뻐요.”
남자 조연출이 양쪽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거 말고.”
“어, 예쁜 거 말고요?”
조연출이 슬쩍 내 눈치를 보길래,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하라는 뜻이었는데 어째 더 부담스러워한다. 어쨌든 나보단 유수영 피디가 더 무서웠는지 조연출이 입을 열었다.
“시청자 반응을 의식해서 그런가, 대부분 몸을 좀 사리는 것 같은데요.”
몸을 사린다고?
“근데 뭐, 프리티걸이야 완전 무명이지만 넵튠은 기본 인지도가 있으니까 이미지 관리해야 되는 건 맞잖아요. 눈치 볼 수밖에 없죠. 임서영 혼자 완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잘하던데요? 카메라 의식 안하고 자연스럽게.”
유수영 피디가 나를 돌아봤다.
“그렇다는데, 정 실장님 보기엔 어땠어요?”
“반대네요. 제가 보기엔 다른 애들이 평소처럼 자연스럽고, 오히려 서영이가 카메라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내 말에 유수영 피디가 뭔가 고민하는 듯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조연출에게 물었다.
“너 이태희, 하면 뭐가 떠오르니?”
“리더. 싱어송라이터요. 작곡하잖아요.”
“이송하는?”
“으마으마하게 예쁘고요, 신비주의 여배우요. 어, 연기천재.”
“엘제이는 어때?”
“권투. 굿프렌즈에서 스파링 하는 거 나왔었잖아요. 완전 제대로던데.”
“그럼, 임서영은?”
“······가슴?”
조연출이 내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사실 걸그룹에 큰 관심이 없어가지고······.”
SNS도 활용하고, 인터뷰도 하고. 나름 멤버들 각각의 개성을 살려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런 걸 알아주는 건 팬덤뿐인가 보다. 아직까지 대중적인 이미지는 이 정도구나.
근데 아무리 그래도 가슴은 좀 심하지 않나.
지그시 쳐다봤다니 조연출이 더 찌그러진다.
다시 내 의견을 묻는 유수영 피디에게 말했다.
“제가 고슴도치라 그런지 몰라도, 그것보다는 훨씬 가지고 있는 매력이 많은 애들입니다.”
“그럼 볼게요. 전부.”
그날부로 넵튠 숙소 곳곳에 관찰카메라가 설치됐다. 물론 내 미니밴에도.
그리고 며칠 후. 촬영분량을 확인한 조연출이 슬그머니 와서 고백했다.
자기 돈으로 넵튠 앨범을 다 샀는데, 멤버들 단체사인 좀 받아달라고.
매일매일 촬영 테이프가 쌓여갔다.
프로그램 제목도 확정됐다. ‘메이킹 필름’ 줄여서 메이필.
홍보팀이 기자들에게 꾸준히 장작을 던져준 덕에, 메이필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뭉근하게 타올랐다. 유수영 피디와 제작스텝들이 일하는 동안 내부 프로젝트 팀도 바쁘게 움직였다.
순풍을 탄 것처럼 거침없고 즐거운 항해였다.
그리고 싱글 곡 녹음과 안무연습에 돌입해야 할 시점.
“이제 결정해야겠네요. 계속 기다릴 순 없잖아요.”
유수영 피디가 운을 띄웠다.
회의실 안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태신 실장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정재이는 소식이 없다. 이태신 실장이 VJ감독과 함께 사방을 뛰어다니며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정재이의 부모님도 걱정 말라는 연락만 받았을 뿐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하고.
“이렇게 화제가 됐는데 모르고 있을 리는 없고. 이 실장님이 찾고 있는 것도 알 텐데. 계속 묵묵부답인 거 보면 나타날 생각이 없는 거죠.”
홍보팀 박 팀장이 말했다.
“전 멤버 누구야, 윤보라랑 박효진? 걔들은 응원한다고 연락 왔었다면서요. 그 애들을 좀 훈훈하게 풀고, 정재이는 이만 포기하죠? 싫다는 애 억지로 끌고 와봤자 좋은 분위기만 망치지 않겠어요?”
내가 봤던 정재이의 미래. 그리고 정재이와의 짧은 통화가 가시처럼 목에 걸려있긴 하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다.
보도자료를 내보낼 때도 프리티걸은 4인조 걸그룹이라고 언급했고, 프로필에도 여전히 정재이는 탈퇴하지 않은 기존멤버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연락 한 통 없다는 건 박 팀장 말대로 합류할 생각이 없다는 거지.
이젠 더 기다릴 시간도 없다.
“어떻게 할까요?”
유수영 피디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답하려고 입을 연 순간.
눈앞이 홱 뒤집어졌다.
미랜가?
시야가 어둡다. 한밤중이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익숙한 승합차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묵직한 빗발이 앞 유리를 두들긴다. 와이퍼가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금방 도로 뿌예졌다. 그 위로 흐리게 노이즈가 번진다.
차는 억수같은 비를 뚫고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구분할 수가 없다.
내 눈은 창밖이 아닌 핸드폰에 꽂혀있다.
DMB? 꽉 찬 화면으로 영상이 흐르고 있다. 아, 이거. 연예계의 자극적인 사건사고들을 브리핑하는 종편 프로그램이다. 리포터가 뭔가 내레이션을 하는 것 같은데, 소리가 먹통이다. 대신 작가가 전화기를 들고 있는 녹취영상과 함께 자막이 떴다.
윤보라(20)/프리티걸 전 멤버
다른 멤버 언니가 투자자 술자리에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희한테도 그런 일을 시킬까봐 무섭고 끔찍했어요. 다른 힘든 일은 다 참을 수 있고, 성공도 절박했지만, 그런 일을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탈퇴한 거예요.
뭐야, 이 개소리는?
방송에다 대고 이렇게 떠들었다고? 술자리에, 다른 멤버까지 운운하면서?
화면엔 계속 새로운 그림이 나온다.
윤보라와 박효진을 피해자처럼 쓴 인터넷 기사들과 네티즌들의 요란한 반응. 아직 고등학생인 애들을 영악하다고 몰아가고, 심지어 내가 프리티걸을 선택한 것도 뭔가 모종의 접대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리고 W&U의 반박기사, 또 NK의 대응기사.
개판이구만.
윤보라와 박효진이 동정심을 사서 이름을 알릴 의도였다면, 성공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지만.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프로필 사진이 뜬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돼 있지만, 단번에 알아봤다. 정재이다.
그리고 네티즌들의 반응이 채팅창처럼 우르르 쏟아졌다.
-술자리 나갔다는 프리티걸 전 멤버 찾았음.
-어우씨, 몸매 죽이네. 투자자랑 잤겠죠?
-잤다에 불알 두 쪽 다 검. 뻔하죠, 뭐. 생긴 것도 겁나 야하게 생겼네.
-이런 애랑 자려면 화대 얼마나 줘야 될까요?
-근데 성접대도 한 애가 왜 CF하나 못 찍었지? 침대스킬이 안 좋았나?
맙소사.
이런 상황이면, 정재이는 매장이다. 연예인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뭘 하고 살든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다.
“실장님, 도착했는데······.”
운전석에서 이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차가 멈춰있었다.
예지속의 내가 핸드폰을 껐다. 그리고 고개를 든다.
병원? 왜 병원으로 왔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뭔가 거세게 승합차 창문을 쳤다. 비가 아니었다. 손바닥. 우비를 입은 남자가 손바닥으로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걸 시작으로, 삽시간에 승합차로 수십 명의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면서.
컴컴한 빗속에서 플래시가 번갯불처럼 터졌다.
누군가가 외쳤다.
“정선우 씨! 정재이 양의 자살에 본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연예인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2) > 끝ⓒ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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