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160)
자살?
덜컥 생각이 멈춘 순간.
비가 그쳤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던 시끄러운 빗소리도, 기자들의 아우성도 아득해진다. 나는 다시 회의실 한편에 앉아있었다. 현실이다. 현실. 그래, 내가 본 건 미래였지. 자살이라는 흉측한 단어에서 한걸음 멀어지려는 찰나.
“정 실장님? 어떻게 할까요. 정재이씨.”
유수영 피디가 물었다.
전신으로 오싹한 한기가 내달렸다. 멱을 따인 채 거꾸로 매달린 짐승처럼, 피가 콸콸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저릿저릿한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기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윙윙 울렸다.
자살. 자살이라니. 뭐 이런······!
아냐, 진정하자.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은 아냐. 그래. 당장은 아냐.
젠장, 그렇다고 먼 미래도 아닐 텐데.
식은땀이 맺힌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봐야겠어요.”
“더 적극적으로요?”
모두가 의외라는 듯 쳐다본다. 심지어 이태신 실장마저도.
홍보팀 박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잘못하면 일정 줄줄이 밀릴 텐데, 시간이···.”
“정재이 씨랑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좀 아슬아슬한 느낌을 받았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연락두절인 게 찜찜해서요. 혹시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안 좋은 생각이라면······.”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뭐, 노파심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거야. 그래야지. 깜짝 놀랐네.”
“그래도 아직 시간에 쫓기는 수준은 아니니까, 조금 더 찾아보죠.”
결론을 짓고 일어섰다. 이태신 실장의 눈길이 따라온다.
조급한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이 실장님. 잠깐 얘기 좀 해요.”
이태신 실장을 질질 끌다시피 야외 흡연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마자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인 하늘이 드러났다. 나른한 봄바람에 잔디가 흔들린다. 분명히 현실인데, 아직까지도 현실감이 없다. 눈앞엔 여전히 창백한 플래시 불빛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저기, 정 실장님.”
이태신 실장이 내 안색을 살폈다.
“여윳시간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재이, 실장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나쁜 마음먹진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연락도 안 되는데.”
“가수 되겠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십년을 노력한 앱니다. 우여곡절도 참 많았는데, 그거 다 이겨낸 애고요. 외동딸이라 부모님 생각도 얼마나 하는데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없긴, 개뿔.
그래도 내 말이 찜찜하긴 했던지, 이태신 실장이 양해를 구하고 정재이의 핸드폰에 전화를 건다. 여전히 답은 없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아수라장이던 머릿속이 좀 진정된다.
난간에 팔을 기대고 호흡을 골랐다.
지금 넋 빼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신 차리고 되짚어보자.
NK엔터로 소속사를 갈아탄 박효진과 윤보라가 프리티걸을 들먹이면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그 과정에서 술자리에 불려나간 멤버 얘기가 나오고. 그게 정재이라는 게 밝혀지고. 지저분하고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지고.
그리고 자살.
화제몰이중인 걸그룹 멤버의 성접대 의혹. 이미지는 진창에 처박힐 거고, 아니라고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해명해봤자 자극적인 루머는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거다.
이태신 실장의 말대로 정재이가 어지간한 일로는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애라도,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자살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스물두 살. 그중 반평생을 연예인을 목표로 살아온 애니까.
게다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일 가능성도 높고.
젠장. 자살 생각을 했더니 또 욕지기가 올라온다.
눈길이 나도 모르게 난간 아래를 더듬었다. 까마득하다.
곰팡이처럼 번지는 생각들을 모조리 털어냈다. 일단 움직이자. 정재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찾고, 동시에 박효진이랑 윤보라가 정신 나간 짓을 못하도록 싹을 잘라놔야 하는데.
소득 없이 핸드폰만 붙들고 있는 이태신 실장에게 물었다.
“실마리도 없습니까? 가족이나 친구 중에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거나.”
“고향집은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께 전화한걸 보니까 번호가 서울 공중전화더라고요. 영등포쪽. 서울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예전 연습생시절 친구 몇 명이랑 프리티걸 활동하다가 탈퇴한 멤버들한테도 수소문해 봤는데 다들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나가서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조급하게 움직이는 그를 잡아 세웠다.
“박효진이랑 윤보라요.”
“네? 네.”
“생각해봤는데 그 둘이 아는 게 너무 많아서요. 전 사장님이 멤버를 술자리에 데려갔다는 것도 그렇고, 얘기가 흘러나가면 문제될 소지가 있어서. 미리 입단속을 좀 해둬야겠는데요.”
당황한 듯, 이태신 실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애들이랑은 제가 잘 얘기를···!”
“아뇨. 제가 할게요.”
좋은 말로 안 되면 험한 말을 해야 될 텐데.
당신은 절대 그렇겐 못할 것 같으니까.
“대신 두 사람이랑 관련된 얘기 좀 해주세요.”
“얘, 얘기라면······.”
“최악의 경우, 두 멤버 입에 자물쇠를 채울 수 있을만한. 그런 얘기요.”
할 말 못할 말을 구분 못할 만큼 생각이 없고, 본인 성공을 위해서 전 동료 등에 칼까지 꽂는 애들인데. 자길 겨누고 있는 칼도 있다는 걸 알려줘야 겁먹고 몸을 사리겠지.
그 칼이 날카로울수록, 그리고 또렷하게 보일수록 더 효과적일 거다.
내 표정을 본 이태신 실장이 창백하게 질렸다. 당장 내가 둘을 찾아가서 멱살 잡고 협박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는지, 그가 매달리듯 내 팔을 붙잡았다.
“저, 정 실장님이 걱정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애들이 나갈 때 분위기가 좀 안 좋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는 서로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랬던 거예요.”
“기사 터진 다음에도 이래저래 실장님을 곤란하게 했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그런 기사를 보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년동안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가 왔는데 간발의 차이로 놓쳤으니, 제가 애들 입장이었어도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을 겁니다.”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려보려는 노력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잠깐이고,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진심으로 응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이 실장님.”
“그리고 수, 술자리 그 문제는.”
이태신 실장이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그런 얘기는 입 밖으로 잘못 꺼내면 큰일 난다는 걸 애들도 다 알 텐데. 몇 년이나 동고동락했던 멤버들한테 해코지할 만큼 나쁜 애들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감싸는 둘은 곧 인터뷰하느라 혓바닥을 놀릴 거고.
당신이 약한 마음먹을 리 없다고 믿고 있는 정재이는 죽어.
불현듯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본 미래대로 정재이가 죽고 난 후. 다른 두 멤버가 던진 불씨가 그런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 후에도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을러서 협조를 받아낼까, 하던 생각이 허물어졌다.
짧게 한숨을 쉬고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제가 설마 다짜고짜 가서 윽박지르겠습니까. 그냥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려는 거예요. 심각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애들이 말실수를 할 수도 있고, 애들은 가만있으려고 해도 NK에서 흔들 수도 있고.”
몇번 더 얘기하자 이태신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밀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두운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이관우에게 스케줄 정리를 맡기고 회사를 나왔다.
들러야 할 곳에 들르고, 연락해야 할 곳에 연락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
가슴골이 다 보일정도로 선정적인 코르셋스타일의 탑. 짧은 스커트와 허벅지를 가로지른 가터벨트. 의상을 갖춰 입은 NK데뷔조 멤버들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잡았다. 카메라의 시선이 집요하게 가슴과 다리를 훑었다.
“박효진, 윤보라! 왜 자꾸 움츠러들어? 몸매에 자신 없어?”
촬영을 지켜보던 NK실장이 혀를 찼다.
윤보라가 마적미적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런 거 입고 촬영하는 게 처음이라······.”
“데뷔경험도 있는 애들이 왜 제일 못 따라와?”
멤버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윤보라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윤보라와 박효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윤보라가 속옷이나 다름없는 의상을 벗어던졌다.
“설마 본무대의상도 이렇진 않겠지? 이런 거 입고 TV에 어떻게 나가?”
“무대의상은 다르겠지. 방송심의도 있는데.”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다른 멤버들이 탈의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프리티걸 할 때는 섹시컨셉 한 번도 안 했나봐?”
“안 했겠지. 거긴 미성년자가 반이잖아. 지금은 걔네만 남았지?”
“메이필인가? 리얼리티 촬영 들어갔다던데, 너희한텐 출연제의 안 와?”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부탁해 보···.”
“그만 좀 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레퍼토리 지겹다.”
박효진이 조용히 쏘아붙였다. 웃으며 얘기하던 다른 멤버들이 표정을 굳혔다. 탈의실 안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박효진과 윤보라가 소지품을 챙겨 탈의실을 빠져나가기 직전,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거 못 입겠으면 섹시컨셉 팀엔 왜 들어왔대?”
“그니까. 데뷔경력 부심은 엄청 부리더니. 꼴값 떠네, 진짜.”
“야!”
얼굴이 새빨개져서 돌아서는 윤보라를, 박효진이 억지로 잡아끌었다. 밖에서는 스튜디오 스텝들과 NK직원이 촬영 뒷정리를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박효진이 그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사람 많은 거 안보여? 소란은 피우지 마. 이미지 관리해야 되니까.”
“그래도 짜증나잖아! 맨날 뒤에서 쑥덕쑥덕. 우리가 언플해서 팀 인지도 올라가면 같이 묻어갈 거면서. 그때 가서 우리 덕 보려고 하기만 해봐.”
씨근덕거리던 윤보라가 거칠게 핸드폰을 들었다.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번호는 이태신 실장님한테 받았는데.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윤보라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정선웁니다.
“누구요?”
-W&U 정선우 실장, 임시팀장, 뭐 어쨌든. 정선웁니다.
윤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황급히 박효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효진이 돌아보자, 윤보라가 소리 없이 ‘정선우’라고 벙긋거렸다. 곧바로 박효진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인적 없는 구석에서 통화를 끝내자마자, 박효진이 재촉했다.
“뭐래? 왜 전화했대?”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 우리끼리.”
윤보라가 NK실장이 있는 방향을 힐끔 보며 대답했다.
“어떡하지? 바로 연락하기로 했는데?”
“뭘 어떡해! 당연히 만나야지. 바로 나가겠다고 해.”
“잠깐, 그럼 메이크업하는 언니한테 화장 수정해 달라고 하자.”
“뭐?”
“잘 보이면 좋잖아. 또 알아?”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낸 윤보라가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곧 둘은 나란히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찾아 나섰다.
*
“여기,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점원이 테이블에 찻잔을 세팅하며 정선우를 힐끔거렸다. 호기심어린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박효진과 윤보라한테도 잠깐 스쳤다. 그녀가 프라이빗룸을 나가자마자, 흔들리는 문틈으로 다른 동료와의 대화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맞아? 맞아?”
“어, 정선우 맞는 거 같아. 사진이랑 얼굴 똑같아.”
“그럼 같이 온 여자들은 연예인인가? 예쁘던데.”
“무슨 걸그룹이랑 방송한다고 기사 떴었잖아. 거기 멤버들 아냐?”
“야, 나갈 때 같이 사진찍자고 해볼까? 방송 나가면 유명해질 것 같던데.”
박효진과 윤보라가 예쁘더라는 말에 화색을 띠었다가, 바로 찌푸렸다. 프리티걸이 화제로 떠오르고 나서부턴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얘기였다. 쟤들 프리티걸 아냐? 탈퇴했다던데. 왜 그랬대? 등신들.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여전히 들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윤보라가 카모마일 꽃송이가 떠다니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다 흠칫, 잔을 내려놓았다. 코앞에서 정선우가 둘을 살펴보고 있었다. 뚫어질 것처럼 빤히.
윤보라는 티슈를 집어 입가를 얌전히 닦았다.
옆자리의 박효진은 세상에서 제일 고상한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하지만 서로 닿아있는 둘의 어깨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약속장소로 달려오는 동안, 머리에 과부하가 올 정도로 생각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할 만큼 중요한 용건이 뭘까.
메이필 출연제의를 하려는 걸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흩어진 멤버들을 모아서 프리티걸을 완전체로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이태신 실장도, 몰래 알아본 변호사도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저 사람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NK와 덜컥 맺은 계약을 해결하고 W&U로 데려가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이윽고 정선우가 검지로 테이블을 살짝 두드렸다.
“두 사람 얼굴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연락했어요.”
“보세요. 아니, 하세요, 얘기.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그럴까?”
눈초리는 사나웠지만, 그거야 원래 생긴 게 그런 거고. 목소리는 새끼 고양이의 발바닥처럼 부드럽고 야들야들했다. 이런 반응이면 좋은 용건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윤보라가 웃는 얼굴로 차를 마셨다.
정선우가 마주 웃으며 물었다.
“혹시 고소당해 본 적 있어?”
[ 연예인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3) > 끝ⓒ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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