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161)
“어욱!”
찻물속의 꽃송이를 꿀꺼덕 삼켜버린 윤보라가 헛구역질을 했다.
박효진은 좀 더 눈치가 빨랐다. 굽어진 속눈썹 아래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소요? 고소당해봤냐구요?”
“어. 명예훼손이든, 손해배상이든.”
“없어요. 그럴만한 일을 한 적도 없구요.”
“그래.”
정선우가 테이블 위에 양 팔을 올려놓았다. 접어올린 와이셔츠 소매 밖으로 나온 손이 천천히 깍지를 꼈다. 박효진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뺐다. 어쩐지 저 손에 목이 잡힐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근데 보아하니, 자칫하면 그런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겠더라고.”
정선우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가, 더 이상은 부드럽게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윤보라가 순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소속사에서 너희보고 프리티걸로 언론플레이 하자고 안 해?”
둘이 헛숨을 삼켰다. 이번에야말로 목이 콱 졸렸다.
***
했구나.
박하냄새가 진동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두 명을 살펴봤다.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눈동자는 요동치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특히 윤보라는 산소호흡기라도 씌워줘야 할 것 같은 반응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노예계약이라도 맺고 어디 팔아넘기는 줄 알겠다.
“······했어요.”
박효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장님이, 이름 알릴 수 있는 기회니까 인터뷰 한번 하는 게 좋겠다고.”
“그냥 동정심 유발하는 언플이랬는데. 그래도 고, 고소당할 수도 있어요?”
윤보라가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인터뷰라면 상관없지. 뭐가 문제겠어. 근데 점점 말의 수위가 세지고, 하면 안 되는 말까지 튀어나오면. 그건 문제지. 투자자니, 술자리니, 그런 거 말이야.”
“그, 그런 말 안 할 거예요. 저희 나쁜 얘기 하려는 거 아니에요. 진짜.”
윤보라가 펄쩍 뛰며 고개를 홱홱 저었다.
저게 내숭일까. 아닐까.
무슨 생각으로 방송작가한테 폭탄을 집어던졌을까.
교활하고 치밀한 계획 하에? 아니면 그냥 앞뒤 생각 안하고 던진 걸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인터뷰 중에 말실수한 걸 작가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방송에서 까버린 걸 수도 있고.
NK에서 술자리 애길 꺼내라고 강요했을 것 같진 않은데. 말대로 동정심 유발하는 정도면 모를까. 그런 더러운 방식으로 W&U에 싸움을 걸어봤자, 득보다 실이 클 테니까.
저 둘은 과연 교활한 걸까. 멍청한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어쨌든 그 인터뷰로 사달이 났고, 멍청한 게 면죄부가 되진 않으니까.
이태신 실장한테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무조건 자물쇠는 채울 생각이었다. 배신자 놈 때문에 말기까지 앓았던 인간불신증에서 아직 다 벗어나질 못해서.
사람 한 명이 죽고 사는 문젠데. 괜히 불안요소를 남길 필요는 없잖아.
뭐, 좋은 말로 하느냐, 험한 말로 하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NK에서 그런 식으로 노이즈마케팅을 하려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 걱정했는데. 과장된 정보였나 보네. 갑자기 고소얘기가 나와서 놀랐겠다. 미안해.”
“괘, 괜찮아요. 좀 놀라긴 했지만.”
“누가 그런 얘길 꾸며냈지? 아마 저희 싫어하는 애들일 거예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네. 염려 놓으세요.”
윤보라와 박효진이 장담했다.
그리고 귓속으로 똑같은 목소리가 꽂히듯 들어왔다.
-고소하라고 하세요.
-효진아!
-지금 동정표 쏟아지고 있는데, 우리야 고소당하면 좋죠. 사람들이 우릴 더 불쌍하게 볼 테니까. W&U같은 대형기획사가 힘없는 애들 괴롭힌다고.
-까짓것 벌금 좀 내고 말죠, 뭐.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을 봤나.
대화내용이 하도 기가 막혀서, 미래에 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노이즈가 섞이긴 했지만 목소리를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윤보라와 박효진. 이태신 실장의 목소리는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잭은 핸드폰에 연결돼있다. 녹음파일인가?
귓속으로 잠깐 동안 이태신 실장의 비참한 숨소리만 이어졌다. 숨쉬기가 힘겨운지,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어떻게 이런, 이런 짓을 하고도, 너희 재이한테 어떻게 이래!
-우리가 이름까지 말한 건 아니잖아요. 네티즌들이 신상 캐낸 거지.
-힘없는 우리야, 이렇게 알아서 뜰 방법 찾아야 되지만. 재이언니는 도와주는 사람 많잖아요. 실장님도 있고. W&U에서 해명하고 다 덮어줄 거 아니에요. 진짜 성접대 한 것도 아니니까.
머리 뚜껑을 열고 얼음물을 쏟은 기분이다. 뇌가 차갑게 식었다.
미래의 내가 이어폰을 뽑고 고개를 돌린다. 바로 옆에 이관우가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관우야, 이 파일 박 팀장님한테 보낼 테니까, 너도 홍보팀에 붙어있어.”
“알겠습니다. 실장님은 어디 가십니까?”
“프리티걸 숙소.”
“별일 없을 겁니다. 지금 정재이 지켜보는 사람이 몇 명인데요.”
찾긴 찾았구나. 정재이.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프리티걸 멤버 오연두였다.
“무슨 일 있어?”
-시, 실장님, 실장님. 재이 언니요, 재이 언니가요.
공포에 질려 꺽꺽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울음소리. 비명도 들린다.
기분 나쁜 소름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누군가 오연두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저, 저 이수진데요, 재이가 지금 소, 손목을 그었어요!
다시 현실로 끌려나왔다.
젠장. 허브차를 단숨에 마셨다. 아까 봤던 미래도 그렇고, 이번 것도 그렇고, 심장에 안 좋다. 가슴이 아니라 전신이 쿵쾅거리는 느낌이다. 바싹하게 마른 입술을 핥는데 눈앞으로 물 잔이 다가왔다.
“갈증 나시면 물 좀 드세요.”
“메뉴판 다시 갖다달라고 할까요?”
코앞에서 박효진과 윤보라가 말했다.
방금 전 들었던 냉랭한 목소리가 아닌, 사근사근하게 녹아나는 목소리로.
헛웃음이 난다. 쓸데없이 한참이나 사람말로 떠들었네.
상대가 짐승인데.
“어떤 쓰레기 같은 인간이 너희를 꼬드기거나, 등 떠밀지도 몰라.”
“네?”
“전 회사에서 멤버를 투자자 술자리에 데려갔다.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아서 탈퇴했다. 이렇게 말하면 화제가 되면서 동정의 시선이 쏟아질 거다. W&U에서 고소당하게 되더라도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거라고.”
두 사람이 당황한 기색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윤보라가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저 뱃속에서 교활한 욕망이 불씨를 당기고 있을까.
박효진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실장님,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만일의 경우를 말해주는 거야. 선택지가 생겼을 때 내 말을 떠올리라고. 너희가 선택을 잘못해서 이 프로젝트가 어그러지면, 아주 공격적으로 대응하게 될 거거든. 우리 홍보팀에서 너희를 천하의 썅, 뭐, 그렇게 만들 거야.”
“무, 무슨······!”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같은 멤버가 억지로 술자리 끌려 나간걸 알면서도, 그 멤버가 스폰서라도 잡아서 뜨면 같이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모른척한. 그런 이미지로는 연예인, 아니 사회생활이 힘들지 않겠어?”
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물속에 몇 번 처박혔다 꺼내진 것처럼.
눈동자를 허겁지겁 굴리던 윤보라가 물었다.
“누, 누가 그런 소릴 해요? 이 실장님이 그래요? 즈, 증거 있대요?”
“글쎄.”
웃었더니, 윤보라가 움찔한다.
물론 증거 같은 건 없지만. 그렇게 따지면 정재이가 술자리에 나갔었다는 증거도 없지. 서로 이미지만 깎아먹는 진흙탕 개싸움이야, 결국은 어느 쪽 홍보담당자가 더 인맥이 넓고 실력이 좋으냐가 관건인 거고.
한마디, 한마디 던질 때마다 둘의 얼굴이 점점 더 사색이 되어간다.
머리를 굴리는 것 같던 박효진이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정말 그런 짓 안 해요. 그러니까 무섭게 그러지 마세요.”
“맞아요. 꼭 협박하시는 거 같아요.”
윤보라가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툭 내민다.
가만히 둘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입가에 웃음을 얹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느껴질 만한 말투로 말했다.
“괜히 겁주고 싶진 않았는데. 정말 심각한 문제라 그래. 별의별 사고가 다 터지는 동네잖아. 내가 들은 정보는 헛소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확인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두 사람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을 때. 내 눈치를 보며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거리던 윤보라가 못 참고 말했다.
“저기, 실장님. 그런데요. 저희가 다시 프리티걸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을까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예정대로라면 메이필에서 출연섭외를 했을 테니까. 저 두 사람이 이태신 실장의 믿음대로 진심으로 프리티걸의 다른 멤버들을 응원하고 있었더라면, 유수영 피디가 그 모습을 훈훈하고 애달픈 사연으로 담아냈겠지.
어쩌면 시청자들이 그 방송을 보고 뿔뿔이 흩어진 프리티걸 멤버들을 안타까워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프리티걸의 완전체를 바라는 여론이 NK쪽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크게 번졌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됐더라면, 어쩌면.
나랑 NK사이에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괜찮은 거래가 오갔을지도 모르지.
그 어쩌면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됐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아······.”
“대신 내가 NK데뷔조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너희가 들어간 팀.”
눈에 띄게 실망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번쩍 든다.
“괜찮던데. 팀 이미지도 프리티걸 때보다 잘 어울리고.”
내 말이 이어질수록, 둘의 얼굴에 조금씩 기대감이 올라온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쇄기를 박았다.
“너희는 거기서 잘될 것 같아.”
“저, 정말요?”
아니.
빈말.
*
일을 매듭짓고 바로 이태신 실장을 찾았다. 그는 VJ감독과 함께 여의도에서 정재이의 행방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을 픽업해서 차에 태우자마자, 이태신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들이랑 만나신 건 어떻게···.”
“그 얘긴 이따 하죠. 이수지 연락처가 뭡니까?”
“네? 수지요?”
이태신 실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처음에 강수란하고 같이 프리티걸에서 탈퇴했던 멤버요. 아, 혹시 정재이 주변에 이수지라는 이름가진 사람이 또 있진 않죠?”
“그, 그럴 겁니다. 근데 수지는 제가 벌써 몇 번이나 찾아가 봤는데.”
“다시 한 번 만나보죠.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얘길 들어서.”
이태신 실장이 눈을 번쩍 떴다.
그가 황급히 전화하는 동안 주소를 찍고 움직였다.
머릿속에 아까 봤던 미래가 둥둥 떠다닌다. 분명 마지막에 정재이에 대해서 말했던 애가, 자길 이수지라고 했지. 프리티걸 탈퇴하고 나서는 아예 연예계에서 발을 빼고 멀어졌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대학생이라고 했나?
뜬금없이 프리티걸 숙소에 있었던 게 조금 걸린단 말이지.
정재이에 대한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지니까 걱정돼서 만나러 온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장 이것 말고는 잡아 따라가 볼만 한 실마리도 없고.
금방 마포에 있는 이수지의 자취집에 도착했다. 미리 이태신 실장의 연락을 받은 이수지가 골목길로 나와 있었다. 멀리서 봐도 예쁘장한 얼굴에 근심이 한 가득이다.
구르듯이 차에서 내린 이태신 실장이 정재이의 행방을 물었다. 이수지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정말 연락도 없었어? 내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수지야. 뭐라고 알고 있으면······.”
“그럼 당연히 실장님한테 연락드렸죠.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그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 재이랑 연락 안한 지 꽤 됐다고. 실종된 게 아니고 재이 부모님한테는 연락했었다면서요. 너무 걱정···.”
“정말 몰라요?”
중간에 끼어들어 물었다.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이수지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랐다.
“이러다 이태신 실장님 소송당할지도 몰라요.”
“네?”
“메이필 리얼리티 방송 준비 중인 건 아시죠.”
“아, 알아요.”
“이제 녹음하고 안무연습 들어가야 되는데, 프리티걸 애들이랑 이태신 실장님이 정재이 씨 기다린다고 고집부리면서 시간을 끌고 있어요. 이미 스케줄 한참 밀렸고, 이대로면 방송 엎어질 판이에요.”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이수지 너머로, 이태신 실장과 VJ감독이 입을 벙긋거린다. 손을 젓고 말을 이었다.
“이미 촬영 들어간 것도 있고, 손해배상 소송하면 이태신 실장님이 다 뒤집어쓸 상황이거든요. 이 실장님 안 그래도 빚도 있는데 이러다 감옥 갈 수도 있어요. 이 사태를 정재이 씨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한걸음 다가가며 다시 물었다.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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