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17)
칸 국제영화제.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지만, 위상으로 따지자면 독보적이다. 매년 전 세계에서 2천편 가량의 영화가 칸에 출품된다. 그리고 그중에 칸의 공식 섹션에 초청받는 장편 영화는 50편 내외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초청장을 받은 국내작품은 3개였다.
아쉽게도 칸을 대표하는 경쟁부문 초청작은 없었다. 다른 두 개의 영화는 비경쟁부문 섹션이었고, 우리, 도시정글은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현경 감독이 영화제의 신인감독상격인 황금카메라상 후보에 올랐다.
경쟁자가 24명이나 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가장 화제가 된 것도 도시정글이다. 2부 리그 격이긴 했지만, 유일하게 상을 놓고 경쟁하는 섹션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경쟁이란 대중의 흥미를 어마어마하게 자극한다.
기자들과 대중은 도시정글이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쥘 수 있을지를 몹시 궁금해 했다. 보도자료를 돌리지 않아도 기사가 쏟아졌다.
“이거, 국제대회 나가는 국가대표가 된 느낌이네요.”
영화사 숲의 대표가 가슴께를 문지르며 말했다.
“기자들 질문이 전부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황금카메라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상 얘기밖에 없어요.”
“상을 놓고 경쟁하는 게 우리작품밖에 없어서 그래요.”
SBE필름 기획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칸 영화제 첫 참석인 영화사 숲 대표는 당장이라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몇 차례 칸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SBE필름 쪽 사람들은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나야 뭐, 포커페이스인 게 천만 다행이고.
“기자들 설레발이야 매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만, 상은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그 동네는 콧대가 어마어마하게 높으니까.”
기획피디가 영화사 숲의 직원들과 나를 보며 말했다.
그동안 수많은 한국 영화들이 칸에 초청됐지만, 아직까지는 20여 편 정도 초청되는 경쟁부문에 끼는 것만으로도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도 꿈은 꿀 수 있잖아요. 네? 최고상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죽이겠죠. 올림픽으로 치면 금메달인데!”
“정부포상도 받을 걸요? 주목할 만한 시선상 받아도 훈장 준다던데?”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메이슨 터커도 칸 영화제 참석한다고 기사 났어요!”
임서영이 내 허리를 붙들고 질질 따라왔다.
올해 칸 영화제의 참석명단을 나보다 더 꿰고 있다.
“메간 샤너도! 애런 테일러도! 메이슨은 어젯밤에 도착해서 마제스틱 호텔에 있대요, 어떡해요, 오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저도 가면 안 돼요? 제 돈으로! 제 사비로 따라갈게요! 입장권만 줘요!”
“웃기지 말고 라디오랑 방송 녹화나 열심히 하고 있어.”
“으아아! 메이슨!”
임서영이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을 부르짖는 동안, 이태희와 엘제이는 이송하가 싼 캐리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째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다? 너답지 않게.”
이송하에게 메다 꽂힌 경험이 있는 엘제이가 의심스런 시선을 던졌다. 나도 힐긋 이송하를 바라봤다. 생필품은 내가 챙겼고 옷은 스타일리스트가 챙겼으니까 이송하 캐리어에는 군것질거리가 반일 줄 알았는데.
확실히 이송하답지 않은 물량이긴 하다. 설마 또 문제가 생겼나?
“송하야. 혹시 식욕 떨어졌어? 과자가 안 땡겨?”
“아뇨.”
이송하가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현지에서 조달할거예요. 프랑스에는 프랑스의 군것질거리가 있으니까.”
“아, 그래.”
이송하네.
애들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를 삐져나왔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은 오늘따라 쭉쭉 뚫렸다. 하늘은 새파랗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따스하고 간지러웠다.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라 하늘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속이 딱 기분 좋을 만큼 울렁거린다.
칸에 가는구나.
세계적인 배우들과 감독들, 제작자와 기획자들이 우글거리는, 그 화려한 현장에. 연예계에 발을 들이면서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곳에 가는구나.
내 뜻대로 현재를 바꾸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던 미래를 한 조각 손에 넣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옆을 보니 이송하가 웃고 있었다.
“기대돼?”
“네. 기대 돼요.”
별일이네.
연말에 방송국과 영화제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을 때도 기대하던 티를 안 내던 앤데. 칸이라는 타이틀은 체감온도가 다른가?
“뭐가 제일 기대돼?”
“거기 가면 전 세계에서 모인 유명한 배우들이 엄청 많잖아요.”
이건 좀 의왼데.
“보고 싶은 배우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거기 오는 배우들은 다 저보다 훨씬 유명하니까, 저한테는 아무도 관심 없을 거 아니에요. 작년에 칸에 갔던 배우들은 편하게 슬리퍼 신고 라 크로와제 돌아다니기도 했대요. 저도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지.”
국내와 중화권 쪽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졌지만, 세계를 무대로 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니까. 취재를 위해 칸에 가는 국내기자들이나 현지 특파원들이 아니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긴 할 거다.
그동안 유명세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나?
“왜,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고 돌아다니고 싶어?”
“칸은 해변이 예쁘대요.”
동문서답을 하면서 이송하가 은근하게 웃는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주섬주섬 책을 꺼냈다. 칸이 있는 남프랑스 코트다쥐르 관광 가이드북이었다. 이미 한번 체크해놨는지 군데군데 컬러풀한 인덱스 스티커도 붙어있다.
“영화제보다 관광에 관심이 더 많으면 어떡하냐. 수상은 벌써 포기했어?”
“영화제 시즌엔 항구 쪽에 초호화 요트들도 많대요. 오빠, 요트 타보고 싶으세요?”
“타보고 싶지. 근데 그게 중요한······ 너 지금 뭐 적어?”
“별거 아니에요.”
“별거 같은데.”
음흉하게 웃어대는 이송하를 추궁하는 동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공항 안으로 들어가니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팀장님!”
현장 조율을 하던 이관우가 달려왔다.
“우리 쪽 스태프들은 다 왔어? 조윤 형은?”
“다 도착했습니다. 형님은 스태프들이랑 같이 계시고요. 그리고 기자들한테서 출국 전에 인터뷰 잠깐 해달라고 요청이 밀려들어오는데요. 어떡할까요?”
“짧게 한다고 해. 어수선해서 기자들도 그 이상은 안 바랄 테니까.”
이관우를 보내고 스텝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헤어 아티스트를 비롯한 스텝들이 캐리어를 바리바리 쌓아놓고 있었다. 남조윤과 김현섭은 중앙에 앉아있다. 다가가보니 남조윤은 통화중이었다.
“네, 아버지. 칸이요. 칸. 네, 칸. 아니, 칸이요. 프랑스. 영화제예요.”
답답하게 쳐다보던 김현섭에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저 현섭이에요, 아버지. 지금 비행기타려고 공항에 왔고요. 칸이라고, 기차 식당칸 할 때 칸이요. 프랑스에 있는 도신데 거기에서 매년 영화제가 열리거든요.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영화제. 조윤이 이놈이 거기 초대받고 가는 거예요. 그럼요, 이 자식 이거 완전 출세한 거죠.”
남조윤이 작게 고개를 저었지만, 김현섭의 입은 더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영화제라니까요? 아, 상은······ 이건 참석하는 데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영화 하는 사람들 중엔 거기 초대받는 게 꿈인 사람도 많고. 진짜 동네방네 자랑하셔도 되요. 마을회관에 현수막 거셔도 되요!”
“너 그러다······.”
남조윤이 눈썹을 찡그렸다. 김현섭이 아차하며 조그맣게 덧붙였다.
“어머니한테는 현수막 얘기는 하지 마시고요.”
김현섭이 전화를 끊자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스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다시 받아 챙기고 있는 남조윤에게 물었다.
“형. 좀 어때요?”
“괜찮아. 현실감이 하나도 없어서.”
남조윤이 쌉싸름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와 이송하를 번갈아 바라본다.
“송하는······ 괜찮아 보이네.”
“전 괜찮아요.”
이송하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지극히 괜찮긴 하지. 마음이 콩밭에 가있어서 그렇지.
“선우 너는 어때?”
“저요?”
“너도 칸은 처음이잖아.”
“뭐, 저도 거기 가서 야자수 나무라도 봐야 실감이 날 것 같은데요.”
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이송하 씨! 칸 국제영화제는 처음인데 소감이 어떠세요?”
“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일단 칸에 가서 야자수라도 봐야 제대로 실감이 날 것 같구요. 이렇게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서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고 오겠습니다.”
“두 분 수상공약은 따로 없으신가요?”
“수많은 영화 팬들이 금의환향을 기대하고 있는데, 한 마디 해주세요!”
짧게 한다고 미리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며칠 굶주린 닭처럼 맹렬하게 쪼아댔다.
시간을 확인해보고 끼어들었다.
“자, 시간이 빠듯해서 이만 들어가 봐야 됩니다. 칸에서 공식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이니까 거기서 느긋하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딱 잘라 말하고 일행을 재촉했다. 기자들이 한 마디만 더 하고 가라며 밀려왔다. 결국에는 세이프라인이 무너져 경호원들이 몸으로 막아야 했다. 중국을 오갈 때마다 공항패션이다 뭐다 해서 보던 풍경이긴 한데, 스케일이 다르다.
이번엔 정말 올림픽이나 월드컵 국가대표 환송식 뺨을 칠 정도였다.
제작사 쪽 스텝들과 오현경 감독은 엊그제 칸으로 떠나고 우리가 후발대였는데, 따로 움직이길 잘했다. 우리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제작사 스텝들까지 섞였으면 더 난장판이었을 테니까.
“다녀오세요!”
뒤에서 기자들의 응원소리가 들렸다.
파리를 경유해 니스 코트다쥐르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13시간이 지난 뒤였다. 시차가 7시간 차이가 나다보니 우리가 한국을 출발했을 때도 하늘이 새파란 한낮이었는데, 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새파란 하늘이 반겼다.
“여긴 조용하겠죠?”
김현섭이 캐리어를 질질 끌며 물었다.
“그렇겠죠. 먼저 도착한 기자들 몇 명쯤은 있을지도 모르고.”
“취재진 많을 때는 그거대로 지치더니, 썰렁할 거 생각하니까 또 서운하네.”
그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웬걸, 밖으로 나가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덮쳐왔다. 카메라를 든 외신기자들과 세계 각지에서 모였을 구경꾼들이 공항을 꽉 채우고 있었다. 흥분과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어, 설마 우리 보러 왔나?”
“그럴 리가요.”
누군가 김현섭의 말을 뚝 잘랐다. 돌아보니 SBE필름 기획피디였다.
그가 취재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애런 테일러가 전세기타고 온대요. 그거 보겠다고 다들 모인 거예요.”
“우와, 전세기······ 현실감이 확 밀려오네요.”
김현섭이 혀를 내둘렀다. 기획피디가 앞서 걸으며 웃었다.
“진짜 부자들은 자기 요트타고 와요. 무식하게 커서 항구에 정박도 못하는 호화요트. 해변 가에 보면 그런 게 둥둥 떠다닌다니까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이송하도 남조윤도 맨 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모두들 할리우드 무비스타를 기다리느라 이쪽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인천공항의 열띤 송환과는 온도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얼어 죽을 지경이다.
그나마 칸에 미리 도착한 한국 기자들 몇 명이 입국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요청해 왔는데, 반가워서 스텝들이 다들 함박웃음을 띠었다. 우리는 인터뷰를 충분히 하고나서야 공항 밖으로 나갔다.
“송하 씨랑 조윤 씨는 영화제에서 보낸 의전차량 타고 이동하시면 돼요.”
그가 대기 중인 고급 세단을 가리켰다. 김현철의 눈이 영롱해졌다.
“저희는요?”
“저희는 기다렸다가 셔틀버스 타고 가죠.”
“······.”
“농담이고, 제작사에서 따로 준비한 차 타고 따라가면 돼요.”
열세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한 육체를 간신히 추스르다가 셔틀버스 얘기에 축 늘어졌던 스텝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기획피디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송하와 남조윤을 의전차량에 태우고 난 후에, 그가 나한테 나직이 말했다.
“정 팀장님도 칸은 처음이시죠?”
“그렇죠.”
“여긴 완전 계급사회예요. ‘급’에 따라서 대놓고 차별하는. 급에 따라서 단계별로 아이디카드 지급하고. 급에 따라서 숙소 배정하고, 항공권 주고, 상영 횟수 결정하고, 파티 초대하고. 그런데 우리 급은, 그다지 높지가 않아서.”
그가 내 어깨를 툭 짚으며 덧붙였다.
“각오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걸요.”
ⓒ 장우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