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28)
탑 매니지먼트 229화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1)
이송하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차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며 말했다.
“미안. 분위기가 좀 안 좋아 보이길래, 걱정돼서 와봤는데.”
“······들으셨어요?”
“소리는 거의 안 들렸어. 생각보다 방음 잘되더라.”
그래도 어떤 말들은 귀에 들어왔다.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걸 겨우 참아야 했을 만큼 내 속을 뒤집어 놓은, 그런 말.
“괜찮아?”
“사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
생각보다 평온한 목소리였다.
“뉴스나 드라마 보면 그런 가족들 많잖아요. 돈 때문에 싸우고, 소송 걸고, 원수보다 더한 가족들. 전 그런 건 아니니까요. 그냥, 열 손가락을 깨물면 그중에서도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데······.”
이송하가 제 손을 쭉 펴며 말했다.
“제가 그런 손가락인 거죠. 덜 아픈 손가락.”
문득 이송하를 처음 만났던 늦가을이 떠올랐다.
넥스트 K스타에 고정 출연하게 됐을 때. 가족들의 연락을 기대하며 몇 번이나 소식 없는 핸드폰을 꺼내 보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런 모습을 못 본 지 얼마나 됐더라?
이송하는 언제부터 가족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게 됐을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서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대와 실망이 있었을까.
갑갑한 속을 달래고 있는데 이송하가 물었다.
“집에서 같이 저녁 드실래요?”
“저녁?”
“언니들도 오늘 외출하려다 엎어져서 김빠졌을 테니까.”
힐긋 이송하를 돌아봤다. 말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만, 어쩐지 풀이 좀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꽤 누적됐을 테니 이참에 맛있는 거 먹으면서 기분 전환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지 뭐.”
“······정말요?”
“그래. 뭐 사 갈까?”
이송하가 별안간 소리 내 웃었다. 걸음도 차츰 경쾌해진다.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면서, 그렇게 꽤 오랜만에 함께 걸었다.
*
넵튠 애들과 저녁을 먹고 간만에 형 집에 들렀다. 형수님이 출장 중이라, 형 혼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네쌍둥이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애들한테 피자 두 판을 건네주고 나서야 형과 마주 앉았다.
“너 오늘 배우 가족들 만났다며. 일은 잘 끝냈어?”
“한쪽은 잘 끝났고. 다른 쪽은, 글쎄, 잘 참았지.”
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캔맥주를 내밀었다.
“형은 혹시 집에서 차별받았던 기억 같은 거 없어?”
“차별? 누구랑? 너랑?”
“어.”
안경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올려두며, 형이 중얼거렸다.
“······글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나보단 네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애들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너는 찬밥 신세였잖아. 부모님도 너한테 신경 많이 못 썼고. 그건 아직도 내가 미안하다.”
“아니, 그거야 뭐. 자연재해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쌍둥이들은 식탁을 둘러싼 채 피자 두 판을 전투적으로 해치우는 중이었다. 일부러 한 사람당 4조각씩 딱 떨어지는 걸로 사 왔더니 토핑이 더 많이 올라간 조각을 집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형이 그쪽을 보며 말했다.
“그런 문제는 우리도 계속 신경 쓰는 중이야. 애들이 넷이라, 혹시라도 소외감 느끼는 애가 있을까 봐.”
“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덜 아픈 손가락이 있더라도 티는 내지 말고. 서러우니까.”
입맛이 영 쓰다. 맥주를 한 캔 다 비우고 화제를 돌렸다.
“참, 엄마 아버지 언제 올라오시지?”
“왜?”
“그때 맞춰서 형수님하고 애들하고 다 같이 밥이나 한번 먹었으면 좋겠는데. 좋은 식당 알아둔 데가 있거든. 밥 먹고 백화점에도 좀 들르고.”
“웬 백화점?”
“왜, 드라마에 툭하면 나오는 거 있잖아. 가족들이랑 같이 백화점 가서 옷 한 벌씩 사 입는 거.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겪어보니까 왜 드라마에 그렇게 단골로 나오는지 알겠더라. 그냥 기분이 좋더라고.”
평소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눈으로 부모님 옷을 고르던 남조윤을 지켜보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 벌어서 뭐 해. 써야지.”
“그럼 어머니 아버지만 모시고 갔다 와. 요즘 애들 옷 얼마나 비싼데. 백화점에서 한 벌씩 고르면 너 파산이야.”
“걱정하지 마. 이번에 인센티브 어마어마하게 받았으니까. 그리고 도시정글에 개인적으로 투자도 좀 했었고.”
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투자했어?”
했지.
얼추 집값은 나올 것 같아서, 어디로 이사 갈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부담 없이······.”
말하는 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저장도 안 된 낯선 번호였다.
“잠깐만, 여보세요?”
-정선우 팀장님 핸드폰 맞나요?
여자 목소리였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어디서 들어본 듯한.
기자? 아니면 피딘가?
“네, 누구세요?”
-저 강지안이에요.
강지안? 작년에 UBS 연기대상 받은?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수소문해서 번호를 받았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소속사 나온 지 몇 달 됐거든요. 의견 차이가 좀 심해서. 계속 혼자 일하다가 힘들어서 새 회사를 알아보는 중인데, 정팀장님 얘기가 많이 들리더라고요.
도시정글이 성공한 이후로 이런 종류의 연락이 부쩍 늘었다.
그래도 강지안 정도의 거물은 드물었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기로 유명한, 작품만 찍으면 무조건 상 하나는 받아 가는 배우.
머릿속에서 강지안의 필모를 떠올렸을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독립할 생각은 없으세요?
“······네?”
-정팀장님이랑은 같이 일해 보고 싶은데, 제가 W&U하고는 좀 안 맞을 것 같아서요, 스타일이.
만약 독립 생각 있으면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네가 성공하긴 했구나. 사방에서 가만히 두질 않네.”
내용이 들렸는지 형이 가볍게 물었다.
“근데 독립 생각은 정말 없어?”
독립이라.
투자니, 동업이니, 웃는 얼굴로 접근해서 나를 들쑤시고 부추기는 사람들. 정선우보다는 미다스의 손을 원하는 이들 중에 내가 실패한 후에도 떠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있기는 할까?
“지금 내가 벌여놓은 일이 얼마고, 내 팀에 딸린 식구가 몇 명인데. 그 사람들은 다 어쩌고.”
“아······ 그건 그러네.”
“그리고 직접 회사 차리려면 신경 써야 할 것도 너무 많고. 투자받고 시작하면 사사건건 간섭도 받을 텐데. 그러면 그게 내 회사야? 지금은 생각 없어.”
그렇게 말했을 때. 손안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강지안이 용건이 남은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화면에 백한성 대표의 이름이 떠 있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어쩐지 서늘해진 목덜미를 문지르며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월요일 오후에 일정 어때? 바쁜 일 없으면 잠깐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괜찮습니다. 몇 시에 올라갈까요?”
-아니, 회사 말고. 퇴근하고 내 집에서 볼까?
······집?
*
마침내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 동안 집에서 시나리오를 검토했더니 뒷목과 어깻죽지가 영 뻐근하다. 확실히 사무실 의자가 더 편했다. 같은 걸로 하나 살까?
프라이팬에 달걀 세 개를 깨 넣고 뒤집개로 휘젓는데 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보니 홍보팀이었다. 젠장.
아침부터 홍보팀에서 전화가 오면 대부분의 경우 사건사고다. 간밤에 소속 연예인이 사건에 휘말렸거나, 사고가 났거나, 사고를 쳤거나. 어느 쪽이든 엿같은 건 매한가지였다.
“네, 박팀장님.”
-자기 혹시 방금 기사 뜬 거 봤어?
소파 구석에 처박힌 태블릿을 찾아 연예 기사를 훑었다.
“아뇨, 무슨 일인데요?”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하룻밤 사이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세상에서 사는 건, 정말이지 심장한테 미안한 일이다.
일단 W&U를 내건 헤드라인은 없다. 익숙한 이름도 없고.
뭐지?
-권인주 캐스팅 기사가 떴어.
“그게 누구······ 아, 에덴동산에 전 남자친구 역으로 나왔던 배우요?”
-맞아, 그 배우가 스트레인저에 캐스팅됐다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얘기라 손으로 뺨을 툭 쳤다.
꿈은 아닌데.
“스트레인저면, 그거요?”
-맞아, 그거. 진짜든 아니든 기사가 떴으니까 오늘 하루는 계속 시끄러울 것 같아서. 오전에 우리 보도자료 뿌리기로 한 거 미루는 게 어때? 묻힐 것 같은데.
“아······ 보도자료요.”
안도하며 프라이팬 앞으로 갔다. 섞이다가 만 달걀이 흉측한 꼴로 타고 있었다. 인덕션 불을 끄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무슨 일 터진 줄 알았잖아요.”
-왜, 누가 사고 쳤을까 봐? 자기 팀이야 걱정할 게 뭐 있어. 애들 음주운전 안 하지, 도박 안 하지. 공개 연애 안 하지. 아, 주원 씨는 좀 주의해야겠더라. SNS 너무 좋아해서.
박팀장이 말한 기사를 찾아봤다.
배우 권인주가 영화 스트레인저에 비중 있는 주조연급 배역으로 캐스팅됐다는,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추측성 기사. 지금은 세포 분열하듯 증식하는 중이었다.
대단한 화젯거리긴 하다. 스트레인저는 십여 년 전에 첫 편이 개봉한 이후로 속편에 속편을 찍어내며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프랜차이즈니까. 국내에도 팬이 상당한.
그동안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출연한 국내 배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경우는 드물었다. 흥행까지 잡은 경우는 더더욱 드물고. 그나마도 단발성에 그쳤다.
사진 속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는 권인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이건 진짜예요? 스트레인저?”
-글쎄. 소속사는 지금 연락도 안 된대.
“어쨌든 알았어요. 보도자료는 좀 잠잠해지면 풀죠, 뭐.”
-오케이. 그리고······.
박팀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슬슬 기자들이 넵튠 재계약 건으로 떠들기 시작할 거야.
“재계약이요? 넵튠 계약 기간 아직 2년이나 남았잖아요.”
-2년밖에 안 남은 거지. 그리고 계속 얘기가 나오긴 했어. 계약 기간 끝나면 아예 해체하든, 이송하만 빠지든, 어떤 식으로든 넵튠은 그룹 유지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올해까진 조용할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송하가 너무 떴지.
재계약이라.
기자들이 쪼아댈 걸 생각하니 벌써 귀가 따갑다.
혹시 백한성 대표가 갑자기 집에서 보자고 한 게 이것 때문인가?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어수선한 머릿속으로 얼마 전에 이태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하 혼자 한참 앞서가고 있으니, 따라잡지는 못해도 너무 뒤처지진 말아야 한다던.
“······.”
그리고 문득, 정말로 뜬금없이, 뭔가가 떠올랐다.
십 초쯤 고민하다가 이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생겼어요?
막 일어났는지 이태희가 반쯤 뭉개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할 영화가 하나 있거든. 렛잇스노우라고.”
-······네?
렛잇스노우.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월드아트 픽처스에서 수입해 온 일곱 편의 외화 중, 헐리웃 블록버스터 기대작들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할 영화.
이미 사운드트랙 작업이 끝났는지, 작업 도중이라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든 게 백지상태지만. 이태희가 여기 신경 쓸 여력이 있을지, 회사의 의견은 어떨지도 확인해 봐야겠지만.
뭣보다 렛잇스노우가 국내에서만 흥행할지, 아니면 세계적으로 성공할지도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태희야. 이게 좀 뜬금없는 얘기긴 한데.”
-뭔데요?
“너 캐럴 한 곡 만들어 볼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