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31)
탑 매니지먼트 232화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4)
‘첩보’
84페이지짜리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남파공작원의 아들과 국정원 요원을 중심으로 한 액션 첩보물.
꾸준히 좋은 액션물을 내놓은 데다 두 작품이나 천만 관객을 돌파한, 액션 영화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이금형 감독의 신작이다.
보통 이런 작품은 충무로에 시나리오가 돌기도 전에 주연롤 캐스팅이 끝난다. 이것도 투톱 주연 중 한쪽은 박희승이 일찌감치 낙점됐고, 나머지 한자리를 두고 눈치싸움이 격해질 판이었는데.
그게 1순위로 서지준한테 들어왔다.
이금형 감독이 밀었다는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은 대환영이지.
서지준이 드라마 판에서는 입지가 단단해도 영화판에선 크게 보여준 게 없는 걸 생각하면 꽤 과감한 캐스팅이었다.
“어떻게 보셨어요? 이거 괜찮을까요? 저 박희승 선배님이랑 꼭 한번 같이 일해 보고 싶었는데. 이금형 감독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지준이가 시나리오 받은 거, 금방 소문 쫙 퍼질 거야.”
이봉준 실장이 다리를 덜덜 떨며 말했다.
“이거 박희승이 시놉만 보고 바로 오케이한 거고, 이금형 감독이 이번에 제대로 칼 갈고 찍는다고 했대. 진짜 인생작 나올 분위기래. 지금 눈독 들이는 놈들 수두룩할걸? 우리가 검토한다고 시간 끌다가 감독 맘 바뀌면······!”
서지준이 못 견디겠는지 소파 등받이를 붙들고 심호흡했다.
초조해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물었다.
“지준씨랑 이 실장님은 어땠어요? 시나리오.”
“전 재밌던데요.”
서지준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봉준 실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본 시나리오 중에 제일 좋더라. 스토리라인이 살짝 루즈한가 싶긴 한데, 이금형 감독 작품은 액션씬 믿고 가는 거니까. 제작비도 벌써 200억 가까이 땡겨놨다던데.”
속이 바짝바짝 타는지 그가 연신 입술을 핥았다. 내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떨어지면 당장 계약서에 도장 찍으러 갈 기세였다.
차분히, 머릿속에서 다시 시나리오를 돌렸다.
북한 정찰총국 출신의 남파공작원과 그를 쫓고 있는 국정원 요원. 그리고 남파공작원의 아들, 남한에서 태어나 23년을 한국인으로 살아온 청년이 그 난장판에 휘말린다.
서지준이 받은 게 그 아들 역이었다.
위장결혼의 결과물이자 대한민국 유도 국가대표.
영화는 시종일관 아들이 간첩인지 아닌지, 적군인지 아군인지에 대한 떡밥을 던지며 관객을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좋은 캐릭터다.
서사도 좋고 비중도 큰 데다, 러닝타임 내내 다양한 액션씬을 소화한다. 고민 중이던 다른 작품들보단 확실히 낫다. 시나리오 기근이라고 다들 죽는소리하는 때에 이 정도면 최고지.
짧게 숨을 내쉬고 결정했다.
“저도 마음에 들어요. 제작사랑 최대한 빨리 미팅 잡죠.”
“오케이! 그렇지! 이건 해야지!”
이봉준 실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몸속의 노폐물과 내장지방이 싹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속 시원한 표정이었다. 서지준의 얼굴에도 희색이 떠올랐다.
“감독님한테는 지준씨가 직접 연락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바로 할게요. 감사하다고 인사도 드리고.”
“이 자식 이거,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이것도 별로, 저것도 별로, 사람 환장하게 하길래 대체 어쩌려고 그러나 했는데. 이 작품 하려고 그랬나 보다.”
“거봐, 내가 또 작품 복은 있다니까?”
떠들썩한 두 사람을 내보내고 핸드폰을 들었다.
첩보의 제작사 쪽 번호로 전화했더니 한참 동안 신호만 이어진다. 대표의 개인 연락처도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아직 출근 전인가?
일단 확인하면 연락 달라고 문자를 보내놨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그런지 찬물 샤워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내친김에 서랍에서 따로 빼놓은 시나리오와 기획안 뭉치를 꺼냈다. 서지준의 차기작은 결정됐지만, 내 배우는 여럿이니까.
남조윤은 얼라이브를 함께한 최성원 감독이 곧 차기작 시나리오를 보낸다고 했으니 기다려 보고.
정재이는 오디션 준비 중이고.
아직 차기작이 오리무중인 건 이송하와 임주원, 송인호였다.
책상에 깔아놓은 작품들을 다시 훑어봤다.
그동안 눈알이 빠지도록 읽고, 팀원들과 회의하고, 또 읽고, 다시 배우들과 상의한 작품 중에 가장 좋다고 생각한 것들.
당장 차기작으로 확정해도 될, 오히려 다들 왜 결정을 망설이냐고 물어올 정도로 괜찮은 작품들인데.
뭔가 아쉽다.
그래서 줄곧 확정 짓지 못하고 있었다.
고양이 수호령 대본이나 도시정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의 느낌.
이건 성공하겠다는 근거 없는 확신. 캐릭터에 내 배우들을 대입해 보며 느꼈던 만족스러운 쾌감. 당장 완성본을 보고 싶어 못 견딜 정도였던 그 기대감.
그런 게 없었다.
뒷맛이 영 개운하질 않아서 더 좋은 작품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여전히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젠 슬슬 결정해야 할 때다. 제작사나 방송사도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진 않을 테니까.
그래. 이게 최선이다.
읽자마자 이거다, 무조건 해야겠다, 하는 확신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작품이 흔할 리가 없지.
조금 전에 확정한 첩보도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예전에 얼라이브와 로열패밀리를 골랐을 때도 그랬고.
그때도 미래예지의 도움 없이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작품을 골랐던 거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로 돌아왔지.
파랑새 찾는 사람처럼 계속 꿈같은 작품만 찾아 헤맬 순 없다. 내 배우들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일도 못 하게 버려둘 수도 없고. 공백기가 길어지면 불안하거나 우울해하는 배우들도 있으니까.
이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건 분명하다.
결정하자.
찌꺼기처럼 남은 미련을 툭툭 털어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프리티걸 담당 이태신 실장이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기라도 했는지 머리가 엉망이다. 그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문가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말했다.
“애들 위튜브 방송이요. 오늘 위튜버 회사로 초대해서 애들이랑 같이 연습실하고 작업실 구경하기로 한······.”
“아, 그거요.”
“위튜버 지금 도착해서 촬영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 짧게 찍고 끝내겠습니다.”
세상 참 다채로워졌지.
예전엔 동영상 플랫폼엔 뮤직비디오 정도나 올렸었는데. 요즘엔 콘텐츠와 라이브 방송이 넘쳐나는 데다가, 아예 기획부터 편집까지 전문인력이 붙는 경우도 허다하다.
조회수도, 그에 따른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있다.
넵튠이나 프리티걸도 공식 채널을 운영 중인데 반응이 꽤 괜찮았다.
“같이 내려가요.”
시나리오를 덮고 일어났더니 이태신 실장이 놀라 허둥거렸다.
“네? 이게, 팀장님이 직접 보실만한 스케일은 아닌데.”
“그런 게 어딨어요. 회사까지 왔는데 인사도 해야죠.”
같이 일한 지 제법 됐는데도 여전히 눈칫밥 먹는 군식구처럼 구는 이태신 실장을 앞세우고 연습실로 내려갔다. 카메라를 든 낯선 여자가 프리티걸 멤버들하고 신나게 떠드는 중이었다.
“팀장님!”
“저희 촬영하는 거 보러 오셨어요?”
비슷비슷한 운동복 차림새인 오연두와 이화인, 윤솔. 정적인 분위기라 애들 사이에서 홀로 튀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정재이까지 쭉 돌아봤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여자와 통성명부터 했다.
“인사하러 왔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위튜버 떠들고싶어서태어난사람이예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 네.”
어떻게 불러야 편할지 모르겠는데.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근데 팀장님.”
위튜버가 프리티걸 쪽을 힐긋 보더니 목소리를 줄였다.
“초면에 이런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지준오빠 어디 아픈 덴 없죠? 지금 한국에 있긴 한가요?”
“네?”
“제가 팬이거든요. 신인 때부터.”
아.
“물론 프리티걸도 팬이에요! 그런데 저희 지준오빠 차기작은 혹시 확정됐나요?”
“······.”
“아직이구나.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서지준이 아직 회사에 있나 모르겠네.
자기 팬들한테 워낙 잘하는 사람이니까, 한번 물어나 볼까. 오늘 촬영도 W&U를 구경하는 컨셉이라 서지준이 잠깐 얼굴 비춰주면 그림이 예쁘긴 할 텐데.
“잠깐, 전화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연습실을 나와서 서지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었다. 이봉준 실장에게 걸었더니 신호가 가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정색하는 목소리에 이어 기계음이 섞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떤 새끼, 어떤 분이 ‘내가 올해 홍길동전도 피하고 소금도 피했는데 첩보를 못 피했네’, 라고 하셨는데요.]첩보?
좀 전까지 듣고 있던 위튜버의 목소리였다.
사포로 문질러댄 것처럼 지저분한 시야로, 방송 창이 띄워진 모니터 화면이 보인다. 내 사무실에 있는 모니터였다.
[아니, 솔직히 첩보는 홍길동전이랑 소금 같은 근본 없는 영화랑 같이 언급될 정돈 아니거든요. 걔네 둘은 작년이랑 올해 역병이 창궐한 수준으로 영화계 말아먹은 애들이고요. 첩보는 호불호가 갈려서 흥행에 실패한 거지, 보신 분 중에는 만족하신 분들 상당히 많아요.]호불호? 실패?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쑤셔 박힌다.
귀로는 듣고, 눈으로는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에서 문장을 건져냈다.
-아무리 서지준 팬이라도 첩보 쉴드는 선 넘음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걍 노잼이에요
-두시간 동안 주구장창 액션만 나오는 액션영환데 액션이 지루하면 어쩌자는 거지
-감독이 현실적인 액션을 원했다잖아ㅋ 국내 관객들이 자극적인 것만 좋아해서 망한 거라잖아ㅋ 본인은 이게 지 영화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잖아ㅋ
[저기요, 감독 얘긴 하지 마세요, 짜증 나니까. 내부 시사 때 사람들이 그렇게 뜯어말렸다던데, 심지어 박희승도 말렸다던데, 지 작품이라고 들어 처먹지도 않고······ 어쨌든 제 말은, 첩보가 망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조롱당할 정도는 아니다, 뭐 그런······.]-손익 4백만인 영화에 백만도 안 들었는데?
[아, 시발.]피가 차갑게 식었다.
-여보세요?
시체처럼 서 있다가, 이봉준 실장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뻣뻣하던 몸이 안정제라도 맞은 것처럼 풀어졌다.
다행이다.
첩보 제작사 대표랑 통화 안 해서.
······잠깐.
“감독님한테 전화했어요?”
-응? 지준이가 지금 하고 있는데?
아, 젠장.
6층까지 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 영화 못한다고, 아니 일단 끊어버······!”
-통화 끝났나 보다. 뭐라고?
젠장!
“지금 어디예요?!”
-4층 B회의실에······.
올라가자마자 회의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서지준은 화창하게 웃는 얼굴로 핸드폰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마치 발밑이 울렁거리는 듯한, 아득한 감각에 휩쓸렸다.
“영화 한다고 했어요?”
“갑자기 무슨······.”
“첩보, 한다고 했어요?”
서지준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아.
젠장.
엿됐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