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32)
탑 매니지먼트 233화
오고 가는 수작질 속에 (1)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봤다.
엿됐다.
“왜 그래, 갑자기? 뭐야? 뭔 일 났어?”
이봉준 실장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우린 엿됐다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도로 밀어 넣고 크게 심호흡부터 했다.
진정하자.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그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지.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잡아먹힐 때 더 아픈 거 아냐?
돌아버리겠네.
우선은 사태 파악부터 했다.
“이금형 감독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둘이 통화하면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최대한 자세하게요.”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이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익숙하다.
“빨리, 급해요.”
“시나리오 정말 재밌게 봤다고 했죠. 감사하다는 말도 하고. 이거 꼭 하고 싶다고도 했고. 정팀장님이 시나리오 좋아하더란 얘기도 했고. 그리고 제작사랑 미팅 잡히면 직접 뵙고 다시 인사드리겠다고.”
“아.”
“지준이가 통화 중에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를 몇 줄 읽었거든? 감독님이 너무 좋대. 딱 자기가 생각하던 그대로라고.”
“아······.”
이 정도면 구두 계약에 도장 찍은 거나 마찬가지다.
어떡할까.
어떡하지?
서 있을 정신도 없어서 일단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이 몹시 당황해하고 있었지만, 당장은 죽사발이 된 내 머릿속부터 정리해야 했다.
첩보는 망한다.
손익분기점이 4백만인데 관객이 백만도 안 들었으면 망한 게 맞다. 호불호를 따지기엔 망해도 너무 망했다. 저예산영화도 아니고 제작비만 2백억 가까이 쑤셔 넣을 상업영환데.
이 정도면 제작사, 투자사들은 물론 배우들한테도 대참사다.
액션영화에 액션이 재미없다고?
현실적인 액션을 추구해?
내부 시사 때 주변에서 뜯어말렸다고 했고, 이금형 감독은 제 작품이라고 들어 처먹질 않았다고 했지. 영화가 망하거나 말거나 감독 본인은 자기 결과물에 만족했다는 소리고.
아······ 영화판은 감독이 똥을 싸기 시작하면 답도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글렀다. 서둘러 탈출하는 게 정답이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하지?
이금형 감독한테 꼭 하고 싶다고 해놓고 마땅한 이유도 없이 까면, 서지준의 평판에 흠집이 날 테고. 건방져졌다느니, 이제 비위 맞추기 힘들겠다느니, 어떤 말들이 돌아다닐지 뻔하다.
배우가 캐스팅됐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하차한 사례가 뭐가 있더라?
다른 스케줄하고 겹쳤다고 둘러댈까?
아냐. 허술해. 먼저 잡아놓은 다른 작품 스케줄도 없는데.
배우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이건 안 되지. 야단나지.
아니면 배우가 다쳐서 도저히 액션 촬영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거나.
서지준의 팔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길쭉하게 뻗은 왼팔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부러지진 않더라도 가볍게 금 정도만 가면, 아쉬운 척하면서 보기 좋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팀장님, 진짜 왜 그래요? 나한테 무슨 큰 문제 생겼어요?”
“······아뇨, 생각 좀 하느라고.”
미친 생각을 잠깐.
텁텁한 숨을 토하며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요.”
뭔가 필요하다.
정신 나간 놈처럼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라운지 자판기에서 대용량 카페인 음료를 세 캔 뽑아서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하나씩 나눠주고 내 것을 뜯어 벌컥벌컥 마셨다.
점점 사색이 돼가는 이봉준 실장이 캔을 꼭 쥐고 물었다.
“지금 사람 되게 겁나게 만드는 거 알지? 대체 뭔 일인데 그래? 전에 배 아파서 동네병원 갔는데 의사가 큰 병원 가서 검사해 보라고 했던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워.”
“잠깐, 언제 그랬는데? 형 어디 아파?”
“별거 아냐. 허리 디스크 때문에, 아니, 지금 그게 문제냐?”
이봉준 실장이 다시 나를 쳐다봤다. 설명을 바라는 간절한 눈으로.
애써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사실 어떻게 말해도 완벽하게 납득시키긴 어렵겠지만.
“제가 따로 정보를 얻는 루트가 있는데요. 리스크 대비용으로.”
“알지. 로열패밀리 캐스팅할 때 박도진 약쟁이인 거 제일 먼저 알았다며. 예전에 타임슬립 감독이랑 작가 바람난 것도 일 터지기 전에 알았고. 대놓고 물어보진 못해도, 어떤 루튼지 궁금해하는 사람들 많을걸?”
“방금 첩보에 대한 정보를 하나 받았는데.”
거짓말을 엮으면서 테이블에 놓인 첩보 시나리오를 끌어왔다.
“그게, 문제가 되겠더라고요.”
“큰 문제예요? 혹시 감독님이 무슨······?”
적당히 하나 둘러댈까, 하다가 혹시 밖으로 새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대충 뭉뚱그렸다.
“잘못 떠들었다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문제예요.”
“그 정도야?”
“네.”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갑질 폭행이나 불륜, 성추문, 음주운전 뺑소니 같은 사례들을 줄줄이 떠올리고 있겠지.
두 사람이 머릿속으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찍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거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뭐?”
두 사람이 헛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뭐라고?”
“안 하는 게 좋겠다고요.”
서지준의 얼굴에서 평소의 여유가 싹 씻겨나갔다.
“팀장님. 진심이에요?”
“네.”
침묵이 떨어졌다. 곧 이봉준 실장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이게, 뭔, 좀 전엔 시나리오 좋다며, 이거 하자며! 아니, 문제가 있으면 머리 맞대고 같이 상의해서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그냥 하지 말자고? 이걸 이렇게 집어던지자고? 이걸?”
흥분해서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는 말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이봉준 실장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어느 순간부턴 아예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던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미쳤어?”
그래, 미치겠다.
나도 다른 해결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없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없다고.
주연배우가 사고를 친다거나 투자자들의 외압이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낫지. 그건 어떻게 수습해 볼 수가 있다. 감독만 정상이면.
그런데 이건, 감독이 정상이 아니라잖아.
영화가 개봉했는데 재미가 없다는데. 직접 시나리오 쓰고 메가폰 잡은 감독이 제 손으로 말아먹었다는데. 그래 놓고 본인은 만족했다는데.
그걸 어떻게 해결해?
이렇게 찍으면 영화 망한다고 감독을 설득해? 뜯어말려?
투자자도, 배급사도, 심지어 박희승도 못 말린 걸 내가 어떻게?
안 그래도 차재호 감독이 떠들고 다닌 탓에 영화판에서 내 평판이 꽤 깎여나갔는데. 이금형 감독같이 거장 소리 듣는 사람한테 연출 문제로 이래라저래라했다가는 나도, 서지준도 이미지가 아주 골로 갈 거다.
이건 그냥 지뢰밭이다. 무조건 피해야 하는.
나도 모르는 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빈 알루미늄 캔이 손안에서 우그러졌다.
아······.
모든 리스크를 내 손에서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독이든, 투자자나 제작자든. 주도권을 쥔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면 밑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배가 산으로 가는 걸 지켜보면서 저 산이 제발 북망산은 아니게 해달라고 기도나 하는 수밖에.
그게 싫으면, 어디서든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다.
언제쯤이면 그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샛길로 빠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쥐어뜯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가 어지간하면 이렇게까지 얘기 안 하는데.”
회의실 문이 제대로 닫혀있는 걸 다시 확인하고 말했다.
“이 영화, 사고 날 것 같아서 그래요. 크게 망할 것 같아서.”
“······사고?”
이봉준 실장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팔짱을 낀 채 회의실 벽에 기대선 서지준이 물었다.
“내가 아직 팀장님 방식에 익숙하질 않아서 그런데, 원래 이런 식으로 일하세요? 문제가 생겼다. 하지 마라. 끝?”
“아뇨.”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독재자도 아니고, 배우 본인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면 무조건 안 된다고 강요할 수는 없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최종결정은 지준 씨가 하는 겁니다. 이건 그냥 제 의견이에요.”
“······.”
“저는, 서지준 씨가 이거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지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리고 답답한 침묵 끝에 말했다.
“팀장님. 이후에 급한 스케줄 있어요?”
“아뇨.”
“술이나 마시러 갈까요?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그래.
술이 좀 들어가야겠다.
서지준이 혼자 사는 아파트로 장소를 옮겼다.
지나치게 넓은 걸 빼면 꽤 아늑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날듯이 달려온 고양이가 서럽게 울어대더니 서지준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비비적거렸다.
넙데데한 얼굴에, 등은 까맣고 배는 하얀 고양이.
어딘가 낯익은 놈인데.
“······얘가 왜 여깄어요?”
고양이 수호령에 나왔던 녀석이다. 길고양이 역할로.
“참치요? 원래 조명 감독님이 키우시던 앤데,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데려왔어요.”
서지준이 묵직해 보이는 고양이를 가볍게 안았다. 검고 흰 털이 옷에 너저분하게 들러붙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깐, 저걸 찍어서 서지준의 SNS에 올리면 반응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거실 테이블에 안주를 늘어놓고 소주를 깠다.
술잔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돌았다. 이봉준 실장의 탄식과 고양이의 불만스러운 울음소리가 중간중간 추임새처럼 끼어들었다.
서지준이 육포를 물고 중얼거렸다.
“아······ 정선우 팀장님이랑 같이 일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전에 쟤 3팀에 있을 때. 김현조 실장이랑 3팀장님이 허구한 날 정선우 미친놈이라고 하길래, 일만 잘하는데 뭔 소린가 했거든. 이래서 미친놈 소리가 나오는 거였구만. 이런 거였어. 직접 겪어보니까 알겠네.”
이봉준 실장은 이제 충격과 부정, 협상의 단계를 거쳐 슬슬 체념에 접어들고 있었다.
“혹시 전에도 이런 일 있었어?”
이런 일이라.
“있었죠.”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예전에 손채영 씨가······.”
“손채영?”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랑 타임슬립 중에 뭐가 잘 되겠냐고 물어봤었거든요. 정확히는 조병환 실장님이. 둘 다 걸리는 게 좀 있어서 말리려고 해봤는데, 들은 척도 안 하길래 그냥 접었어요.”
그리고 두 작품 다 화려하게 폭발했지.
돌이켜보면 아찔한 일이다. 손채영이 그때 내 의견을 받아들여서 고양이 수호령을 했으면 여러 사람 인생 꼬일 뻔했으니까.
이봉준 실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런 적 있었지. 그때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감이 안 좋다고 했다 그랬나? 고양이 수호령은 감이 좋았고.”
그랬었나?
서지준이 잔을 비우며 다시 물었다.
“······첩보가 망할 것 같다고요?”
“네. 보통 망하는 것도 아니고, 크게.”
술기운을 빌어 속을 까고 털어놨다.
이봉준 실장이 구시렁거렸다.
“시나리오는 좋게 봤다며. 당장 미팅 잡을 것처럼 그러더니.”
“영화가 흥행하고 망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치잖아요. 이번엔 시간이 촉박해서 시나리오만 보고 넘어간 건데, 하루만 더 알아볼 시간이 있었으면 미팅 애긴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내 직업이 매니저인지 사기꾼인지 모르겠다.
이봉준 실장이 집착에 가까운 손길로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이게 왜 망해? 시나리오 좋고, 감독 좋고, 배우 좋고, 제작비도 빵빵한데. 이런 작품은 망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아카데미 작품상 받은 감독 데려다 앉히고 제작비 수천억씩 처넣은 할리우드 영화도 수두룩하게 망해요. 걔들은 뭐 망하고 싶어서 망하겠어요?”
서지준이 골골거리는 고양이를 끌어안고 한참 쓰다듬다가 말했다.
“······팀장님. 나 그렇게 여유 있는 놈 아니에요.”
“네?”
“이미지 때문인가. 사람들이 날 되게 속 편하고 여유로운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닌데.”
그가 뒷맛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요즘 세상에 배우 하나 잊혀지는 거 금방이잖아요. 그러니까 공백기 생기기 전에 정말 좋은 작품 찍었으면 좋겠거든요. 내가 없는 동안에도 TV에, 길거리에, 계속 내 얼굴 보이게.”
서지준은 누가 봐도 잘 풀린 배우였다.
무명 시절은 있긴 했나 싶을 만큼 짧았고, 조연에서 주연, 주목받는 신인에서 확고부동한 원톱 주인공까지 치고 올라간 과정이 물 흐르듯 순탄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요즘 트렌드에 딱 맞는 잘생긴 외모에 피지컬도 타고났고, 심지어 연기도 잘한다.
비슷비슷한 역할만 해서 식상하다는 평가가 흘러나오던 타이밍에 고양이 수호령으로 연기 스펙트럼까지 확 넓혔고.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배우 생활을 해온 사람인데.
그런데도.
아니, 그런 사람이니까 더 속이 복잡한 건가?
신드롬을 일으켰던 연예인도 몇 년의 공백기 후에 복귀작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한물갔다고 외면받는 세상이니까. 제자리에서 기다려 주고 꾸준히 응원하는 팬은 소수다.
대중은 금방 잊어버리고, 대체제를 찾아 떠난다.
서지준이 마지막 작품으로 첩보를 찍으면 그 뒤는?
망할 거면 조용히 망하든가. 이렇게 마케팅 비용으로 수십억을 처바르는 대작은 망할 때도 꽹과리치고 풍악을 울리면서 망한다. 그 상태로 공백기를 가지면 망한 이미지가 낙인처럼 달라붙고.
얼핏 이도경과 장요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때는 서지준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찬란했던 배우들.
술잔을 비운 서지준이 농담처럼 말했다.
“영화 말아먹고 군대 갔다 오면 누가 날 기억해 주나.”
그러고는 이봉준 실장을 지그시 쳐다본다.
이봉준 실장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나? 난 그때쯤 다른 배우 담당하고 있겠지.”
“뭐?”
“뭐는 뭐가 뭐야, 그러면 너 군대 간 동안 난 노냐?”
서지준이 술이 확 깬 얼굴로 고양이를 내밀었다.
“왜 놀아. 참치 먹여 살려야지. 밥도 주고, 물도 주고,”
“네 고양이 밥을 왜 내가······.”
“형이 이름 지었잖아.”
“네가 못 짓겠다고 떠넘긴 거 아냐, 인마!”
“그래서 형은 얘 인생에 책임이 없다 이거야?”
술 냄새 나는 말다툼 끝에 이봉준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자신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양이를 번쩍 들고 승리를 자축한 서지준이 나를 바라봤다.
“팀장님. 저 없는 동안 형한테 신인 주지 마세요.”
“뭐 인마? 너 취했냐?”
“형이 신인 받으면, 그래서 오디션 데리고 다니면서 걸음마부터 가르치고 키우면, 나 제대한 후에 걔 버리고 올 수 있겠어? 못할걸. 그럼 나만 불쌍해지는 거지. 둘이 평생 가자고 해놓고서.”
“아니, 그거는.”
금방 기울어 넘어질 것 같은 꼴로 턱을 괸 서지준이 계속 말했다.
“나중에 형이 대표님 소리 듣고 싶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싶으면······ 우리 그때 나가서 쪼그만 회사 하나 차리자. 백대표님한텐 내가 잘 얘기할게.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돈 많이 벌어주고 나가면 되잖아.”
“차리긴 뭘 차려. 난 평생 대표할 깜냥은 못 되는 사람이야, 인마.”
“그럼, 언젠가 정팀장님 나가면 따라 나가서 한자리 달라고 하자. 그래. 그게 좋겠네.”
“이 자식 이거 진짜 취했네.”
킬킬거리며 웃던 서지준이 내 술잔에 술을 넘칠 만큼 채웠다.
그리고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안 할게요, 이 영화.”
“······!”
“팀장님 능력 믿고 이 팀에 들어온 건데. 믿어 봐야지.”
“야, 그러다······!”
이봉준 실장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달싹거리다가 러그 위에 풀썩 널브러졌다. 그러다 첩보가 잘되면 어떡하냐, 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나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말했다.
“후회 안 할 거예요.”
“그래야 할 텐데. 아, 근데 이미 감독님한테 이거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떡하죠?”
“그건 제가 해결할게요.”
“대책 있어요?”
없다.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이 폭탄을 어디다 던질지.
잠깐 궁리하다가 말했다.
“일단 지준 씨랑 이실장님은 내일 비행기 타세요.”
“응? 비행기?”
이봉준 실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원래 해외스케줄 있었던 걸로 하자고요. 첩보 제작사하고는 돌아와서 미팅하는 걸로 시간을 벌어놓고, 나머지는 제가 수습할게요.”
어떻게든.
서지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봉준 실장은 러그 위에서 끙끙댔다.
이쪽 설득은 끝났으니, 바로 본부장하고 백한성 대표한테 이 영화 안 하겠다고 얘기하고. 그다음은 구두 계약을 했다고 믿고 있을 이금형 감독과 첩보 제작사 쪽인데.
그쪽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