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43)
탑 매니지먼트 244화
정선우 리스트 (5)
“정선우 팀장님, 잠깐만요!”
외부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회사 로비에서 붙들렸다.
낯선 남자였다. 그는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보안팀 직원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며 넉살 좋게 웃었다.
“SN미디어 박성남입니다. 저희가 저번에 기획안이랑 대본 몇 부 보내드렸었는데, ‘돌아온 힙합 제왕’이라고, 혹시 기억하세요?”
아, 그거. 기억하지.
1화 대본 보다가 울화증 도질뻔했던 거.
“제가 정팀장님 직접 뵙고 다시 한번 검토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따로 약속 잡기가 너무 힘들어가지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그딴 대본으로 내 배우를 데려가겠다니 제정신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어림도 없다, 고 말하고 싶었지만.
언제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는 모르는 거니까.
저 제작사에서 다음엔 정말 제대로 된 작품을 가져올 수도 있고.
“죄송하지만 지준 씨 스케줄 상 불가능하다고 제가 말씀드렸······.”
“스케줄은 저희가 다 맞출 수 있거든요. 어차피 편성도 아직 안 잡혔, 안 잡아놓은 상태라서 조정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편성을 못 잡은 거겠지.
그게 편성을 받으면 우리나라 문화예술계 앞날을 걱정해야 된다.
“지준 씨가 불가능하면 임주원 씨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이번 작품은 지준 씨나 주원 씨하곤 캐릭터가 안 맞아서요. 다음에 다시 좋은 작품 만드실 때 연락주세요. 제가 지금은,”
때마침 핸드폰이 진동했다.
“너무 바빠서. 죄송합니다.”
입 끝을 길게 올리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발신 번호를 확인해 보니 기자였다. 내 불패 신화와 더불어 한국 연예계에 만연한 미신 숭배 특집기사를 쓰겠다면서 독점 인터뷰를 요청했던.
가을이라 그런가, 지랄이 풍년이다.
회의 중이라고 통화 거절 메시지를 보내놓고 무시했다.
5층에 올라가자마자 이번엔 홍보팀 직원들에게 붙들렸다.
“팀장님, 방송 출연 생각은 여전히 없으신 거죠?”
“없어요. 아직도 문의 전화 많이 와요?”
“단순히 정선우 리스트 이슈 때문에 찔러보던 곳들은 우리가 사실무근으로 일관하니까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일반예능프로 섭외는 더 늘어났어요.”
“정팀장님 명성이야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던 거지만, 이번 일로 대중적 인지도가 확 올라갔잖아요. 섭외 들어오는 장르도 되게 다양해요. 여행 프로, 먹방, 아이돌 서바이벌, 육아 상담 프로······.”
“너무 바빠서 시간 못 뺀다고 둘러대 주세요.”
나한테 직접 오는 섭외 요청도 다 그렇게 거절하는 중이니까.
홍보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아까운 거 되게 많은데. 어쩔 수 없죠, 뭐.”
“정팀장님은 어차피 연예인도 아니니까, 예능 출연 안 하고 신비주의 이미지를 길게 끌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긴. 예능 막 나갔다가 지금 이미지에 흠집 나면 오히려 손해지.”
“······그럼 또 무슨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누가 홍보팀 아니랄까 봐. 내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궁리하는 직원들과 헤어져 사무실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른 직원이 묵직한 종이상자를 날라왔다.
“이거 새로 4팀으로 캐스팅 제안 들어온 작품들이에요. 시놉이랑 시나리오는 왼쪽, 드라마 기획안이랑 대본은 오른쪽이요.”
“이렇게 많아요?”
“더 있어요. 파일로 받은 건 따로 출력해서 드릴게요. 그리고 팀장님이랑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다고 직접 찾아오셨던 분들은 연락처 메모해 놨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고마워요.”
직원을 내보내고 커피를 내렸다.
의자에 앉아 카페인을 비타민 수액처럼 때려 넣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 난리도 다 지나간다. 지나간다.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스노우폴······ 스노우폴······.
······응?
나도 모르게 또 스노우폴 후렴구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마치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월드아트 픽처스 심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렛잇스노우 쪽이랑 연락이 됐나?
만약 저쪽 답변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방향으로 다시 접촉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면서 전화를 받았는데.
-정팀장님, 혹시 마고 위슬러 에이전트랑 아는 사이예요?
마고 위슬러?
렛잇스노우 여주인공?
“전혀요. 왜요?”
-그 에이전트가 넵튠 곡을 듣자마자 렛잇스노우 제작사 쪽에 강력하게 추천했다네요. 영화랑 잘 어울린다고요. 거기 사운드트랙 맡은 프로듀서한테도 추천하고. 친하대요, 둘이.
굉장히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마고 위슬러의 에이전트?
-그래서 난 혹시 정팀장님이 그쪽이랑 안면이 있어서 따로 부탁해 놨나, 했죠. 정말 단순히 곡이 마음에 들었던 건가 보네요. 어쨌든 그래서······.
핸드폰 건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점 흥겨워졌다.
-스노우폴이 렛잇스노우 사운드트랙에 들어갈 거예요. 물론 영화에도 삽입될 거고. 이게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는데요. 곧 그쪽에서도 연락 갈 거예요. 축하합니다, 정팀장님.
며칠간 들은 것 중 가장 좋은 소식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그냥 뚝 떨어져서, 얼떨떨할 정도다.
-근데 노래가 정말 좋긴 좋아요. 제가 어제 온종일 스노우폴, 스노우폴, 흥얼거리고 있었다니까요. 어쨌든 저희도 넵튠이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는 걸 중심으로 국내 프로모션 진행했으면 하는데, 이건 얼굴 뵙고 천천히 얘기할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포털에 접속했다.
마고 위슬러 에이전트를 검색하자 금방 관련 자료가 뜬다.
르네 에머리치.
UL에이전시 파트너급 에이전트.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칫했다.
아는 이름인데?
이미지를 찾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주르륵 떴다. 칸에서 만났던, 애프터파티에서 이송하에게 접근하던 놈을 경고해 줬던 그 여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던.
예리한 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이던 여자.
마고 위슬러의 에이전트라고?
근데 이번 일이랑은······.
책상 서랍을 열어 명함집을 찾았다. 그리고 예전에 칸에서 받았던 한 무더기의 명함들 사이에서 르네 에머리치의 것을 꺼냈다.
캘리포니아면, 지금 저녁인가?
명함을 툭툭 두드리다가 일단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내 간략한 정보와, 시간 괜찮을 때 연락 부탁드린다는 내용으로
그리고 5초 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정선우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연락을 기다려?
이번 일이 나랑 관련이 있긴 있단 소리네.
늘어져 있던 허리를 세워 똑바로 앉으며 물었다.
“렛잇스노우 얘긴 들었는데, 제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요.”
-그거 내가 직접 추천했어요. 알아보니 그쪽이 보낸 곡이라길래. 나랑 계약한 배우가 렛잇스노우 주인공이거든요. 우리 회사 투자금이 좀 들어간 영화라 발언권도 있는 편이고.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보낸 곡이라 추천했다고?
“실례지만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 리스트를 봤어요.
리스트 소릴 듣자마자 부정맥이 올 것 같아서 얼른 뜨거운 커피를 들이켰다. 이게 무슨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그새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까지 갔어?
-렛잇스노우가 7개 영화 중 1순위로 올라가 있는 리스트요.
아, 그 리스트.
-그쪽이 예상한 박스오피스 순위라고 들었는데. 내가 그 뒤로 좀 알아봤거든요. 정말로 돈 블레이크 소릴 들을 만한 경력이었는지 궁금해서.
돈 블레이크는 또 뭐야.
설마 그 에이전트 말하는 건가?
-알아보니까 그럴만하던데요. 그래서 칩을 한번 걸어본 거예요. 내가 듣기엔 정말 그쪽이 보낸 곡이 좋기도 했고. 또 나는······ 그런 걸 좀 믿는 편이라서.
“그런 거요?”
-세상엔 ‘운이 좋은’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요. 꼭 신이 그 사람한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는 것처럼.
이쪽이나 저쪽이나 신 들먹이는 건 똑같네.
그래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나한테 닿은 게 신인지, 악마인지, 감마선 피폭인지, 외계생명체 쪽인지는 좀 헷갈리지만.
-그런 사람을 끌어들이면, 나한테도 운이 좀 옮겨붙을지도 모르잖아요? 어쨌든 이 선택이 좋은 결과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네요. 만에 하나 정말로 신이 이 영화를 돕는다면, 우리도 곧 다시 보게 될 테니까요.
르네 에머리치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농담처럼 말했다.
-예를 들면······ 오스카 같은 데서?
전화 통화를 끝내고 커피잔을 들었다.
이미 미적지근했다.
남은 걸 단숨에 마시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것도 다 지나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거 안 지나가겠는데?
자, 카페인도 보충했겠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머리로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 정선우 리스트라고 알려진 작품들이 하나둘씩 망하기 시작하면?
처음엔 리스트가 틀렸다고 날 욕하는 여론도 있겠지만, 나중엔 내가 거기에 내 배우를 하나도 안 넣었다는 걸 의심스러워하겠지. 이게 정말 대박작 리스트라면 왜 자기 배우를 안 넣었겠냐고.
그리고 공범자가 잘되고,
렛잇스노우가 잘되고,
뭐 이건 국내에서만 잘될지 세계적으로 잘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선택한 작품들이 줄줄이 좋은 성과를 거두면.
그다음엔······.
내 인생 어떡하지, 진짜?
마치 나도 모르는 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것 같다.
칸에서 여러모로 많은 걸 느끼고 돌아온 뒤로, 저기 저 꼭대기까지 한층 한층 기어 올라가 보자고 야심만만하게 인생 계획을 세워놨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삼십 층쯤 올라간 느낌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그런 층에 도착한 느낌.
이제 어떡할까.
엘리베이터 잘못 탔다고 하고 다시 몇 층 내려가?
아니면 여기 뭉개고 머물면서 낯선 층에 적응을 좀 해봐?
그도 아니면.
이왕 엘리베이터에 탄 거······.
그냥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까?
*
퇴근 후에는 백한성 대표와 따로 만났다.
GTBN 미디어사업부 본부장도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이런 자리가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다.
지난번에 경기도에 있는 회원제 골프클럽에 동행했을 때는 소나무 엔터의 대표이사가 보쌈을 먹고 있었지. 작년에 세금 문제로 검찰 소환된 이후로 거의 칩거상태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최근 들어 점점 백한성 대표의 인맥 풀에 섞여 드는 느낌이다. 날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간을 보는 건지.
정확히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떡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떠먹여 주는데 냉큼 삼켜야지.
약속 장소는 호텔 중식당 룸이었다.
GTBN 본부장 최교원은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체격에 분위기가 냉담한, 방송국보다는 어디 금융업계 쪽이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 왔어? 이쪽이 정팀장이지? 실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웃어도 인상이 까칠해 보이는 게,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진다.
“정선우입니다.”
“알지,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요즘은 바빠서 어지간해선 약속 잡기도 힘들다고 그러던데. 안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앉아요, 여기 완탕면도 맛있고, 딤섬도 괜찮아. 완전 홍콩식.”
백한성 대표가 겉옷을 벗고 앉으며 웃었다.
“새 사람 데려왔더니 나한텐 관심도 없네.”
“야, 원래 물건은 옛날 게 좋고 사람은 새 사람이 좋다잖아.”
“반대 아닌가?”
“그래?”
둘이 가까운 친구였나?
생각했던 것보다 사이가 훨씬 좋아 보이는데.
추천받은 걸로 대충 메뉴를 고르면서 백한성 대표와 GTBN 본부장을 돌아보는데, 때마침 나와 백한성 대표를 번갈아 살피던 본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곧 그가 백한성 대표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뭐야, 근데?”
“뭐가?”
“얼마 전엔 배이사랑 라운딩 돌았다며, 같이. 송문이한테 들으니까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던데. 걔가 너 몇 년 있다가 정팀장한테 회사 맡기고 은퇴 같은 거 하냐고 물어보더라.”
백한성 대표가 물을 마시다 말고 가볍게 웃었다.
“왜, 이건 아냐?”
“별 얘기가 다 돌아다니네.”
“그래, 아니지? 우리 나이에 벌써 은퇴는 무슨, 안 그래도 내가 넌 해 먹을 만큼 해 먹다가 검찰청 포토 라인 앞에서 기자회견 크게 한번 해야 물러날 놈이라고 했다.”
낄낄거린 본부장이 나를 힐금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
“내가 진짜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돼?”
“리스트 얘긴 꺼내지 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피곤한 사람한테.”
백한성 대표의 말에 본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둘이······ 그러니까.”
그가 손으로 나와 백한성 대표를 번갈아 가리키며 헛기침하더니, 곧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들이야?”
“······.”
물 마시다 사레들릴 뻔했다.
차라리 리스트 얘길 하지.
회사 내부에서나 한물간 가십거리 삼아 떠돌던 대표의 숨겨진 아들 설이, 이젠 회사를 넘어 업계에 진출할 판이구만.
“이것도 아냐?”
“아냐.”
본부장이 손사래를 쳤다.
“혹시 해서 물어봤어. 혹시, 네가 학교 다닐 때 사고 쳤으면······.”
방송계 사람이 맞긴 하다. 앉은 자리에서 막장 드라마급 출생의 비밀 스토리를 쭉쭉 뽑아내는 걸 보면.
“너 원래 사적인 자리에 누구 달고, 미안해요, 데리고 다니는 거 안 좋아했잖아. 친구한테 애인 소개 한 번 안 해본 놈이, 이렇게 갑자기 행동거지가 변하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 궁금해서 그러지.”
“남의 집안일에 뭐 그리 관심들이 많아.”
백한성 대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잘랐다.
“일 얘기부터 하자.”
“그래, 뭐. 이쪽은 분위기 괜찮아. 같이 협력하는 걸로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
협력?
우리가 GTBN이랑 같이 협력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백한성 대표가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콘텐츠 제작을 하려면 실력 있는 감독하고 스태프 인력이 제일 중요하니까. GTBN에는 제작 전문가들이 있고, 우린 주인공급 배우가 있고. 협력만 잘 되면 후에 편성 문제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고.”
아.
그런 협력.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얘기됐으면 거의 확실한 거지, 뭐. 양쪽이 다 원하는데.”
본부장의 말에 백한성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두고 보자. 어쨌든 얘기가 잘 마무리되면, 우리 쪽에선 앞으로 나 대신 정팀장이 많이 고생할 거야.”
“아······ 그래?”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랐는지, 본부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쪽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하긴. 정팀장 정도 이름값이면, 믿고 일할만하지.”
저녁 식사 후.
본부장과 헤어져 백한성 대표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깐 침묵을 흘려보내다가 물었다.
“친하신가 봐요.”
“누구, 최교원?”
“네.”
“평피디일 때부터 거의 20년쯤 알고 지냈으니까. 그 20년짜리 정이 2분 만에 끝날 수도 있다는 게 재밌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생기기 전까진 친하겠지.”
아니, 말을 이렇게까지 쎄하게 할 필요가 있나?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백한성 대표가 물어왔다.
“이름값이라는 게 좀 부담스럽지?”
“뭐, 조금은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진 버텨봐. 기획만 하다가 엎어지는 작품들이 수두룩한 곳이잖아. 정선우가 손을 댔다는 이유만으로 투자자가 붙고, 캐스팅이 쉬워지고, 좋은 감독이 따라오고, 편성이 잡히고, 순조롭게 제작되는······ 그 모든 걸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이, 바로 그 이름값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이름값이라.
내가 모든 걸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
엘리베이터가 막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백한성 대표가 다시 말했다.
“만약 정 못 버티겠으면 나한테 얘기하고. 수습해 줄 테니까.”
그러고는 나를 힐긋 돌아보며 덧붙인다.
“정팀장은 웬만해선 안 그럴 것 같긴 하지만.”
“······.”
주차장을 걸어가면서, 백한성 대표에게 말을 꺼냈다.
“공범자라는 작품이요. 곧 서지준 씨랑 임주원 씨가 찍게 될 텐데. 회사에서 제작 투자를 좀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백한성 대표가 멈춰 섰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더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야지. 정팀장이 오랜만에 탐을 낸 작품인데, 그것도 남의 손에 반쯤 넘어간 걸 직접 나서서 가져온 작품인데. 참, 임주원은 오디션 봐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붙을 겁니다.”
무조건.
그렇게 만들 거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