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5)
어디서 소리가 난 줄 알았다. 얼음 깨지는 소리.
이송하는 자기가 욕먹을 때는 반응이 없더니, 화살이 임서영에게로 가자 눈살을 찌푸린다. 이송하가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임서영이 얼른 이송하의 팔을 붙잡는다.
“우리가 속이 좁았나 봐. 그럼 K스타 녹화 때 보자!”
여기를 한겨울 얼음판으로 만들어놓고 슈가캣 멤버들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사라진다. 여전히 착하게 웃는 얼굴로 말이다. 심지어 나한테는 공손하게 배꼽 인사까지 하고 갔다.
아니……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욕을 해!
침 뱉고! 치고받고! 한판 붙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거 아냐!
이건 쉐도우 주먹에 얻어터지는 기분이라서 더 기분 나쁘다.
처음 봤을 땐 쟤들이 착하고 밝은 애들인 줄 알았지. 저렇게 속이 시커멀 줄이야. 역시 내 눈이 동태눈이었어.
그건 그렇고, 고개 숙인 임서영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이송하가 꾸물거리면서 자꾸 나한테 어떻게 좀 해달라는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나도 다 큰 여자애를 달래본 경험은 없지만, 어린 여자애를 달래본 경험은 많으니까…….
“서영아.”
“괜찮아요.”
뭘 해보기도 전에 임서영이 고개를 든다. 우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멀쩡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저런 말에 일일이 신경 안 써요.”
임서영은 집 떠나서 연습생으로 지냈던 기간도 멤버들 중 제일 길고, 회사도 W&U가 세 번째다. 나도 이제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옛 동료들의 비꼬는 말 정도는 참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멘탈이 단단해진 거겠지.
나는 위로는 넣어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뭐 저런 애들이 다 있어? 내가 너 대신 들이받을 걸 그랬나?”
임서영의 표정이 사르르 녹는다. 작은 손이 내 등을 탁 친다.
“안 돼요. 요즘 우리 일 술술 잘 풀리는 중인데 저 때문에 문제 생기면 어떡해요. 조심, 또 조심해도 부족할 시기에.”
“다음엔 내가 빨리 끼어들어서 걷어낼게. 쟤들은 에너지가 남아도나. 왜 자꾸 너한테 찾아와서 시비야?”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에요. 오빠 혹시 병먹금이라는 말 아세요?”
인터넷 하면서 봤는데.
“……병신한테 먹이 금지?”
“네, 그거요. 저는 제 일만 열심히 할 거예요. 어차피 제가 잘 되면 쟤들은 화병 나서 앓아누울걸요?”
“그럴까? 그럼 음악방송 1위 하고 나서 쟤들 병문안 가자.”
이건 백 프로 진담.
“으하하하!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호탕하게 웃은 임서영이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이송하의 손을 잡는다.
“너도 신경 쓰지 말고 잊어버려. 가서 들이받지 말고. 알았지?”
이송하의 표정은 아직도 뚱하다.
“왜 대답을 안 해? 알았지?”
“알았어.”
결국에는 이송하도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대기실로 돌아가서 간식을 폭풍 흡입하는 걸로 기분전환을 했다. 임서영이 다른 때라면 입에도 안 될 고열량 간식을 먹자 배신자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다.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로.”
아. 내 옆에도 한 명 있었지, 속이 시커먼 놈.
배신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어진다. 나는 새삼 배신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렇게 배신자라고 부르는데도 첫날의 충격이 조금씩 흐려지려고 한다. 쭉 함께 다니면서 본 배신자는 성격 좋고 성실하고 일 잘하는 놈이라서.
첫날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지금쯤 엄청 친해져 있지 않을까?
방심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송기자가 ‘그분은 그때부터 그러셨구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인정받고 싶었던 신입사원의 욕심,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벌써 경계를 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대체 배신자 쟤는 이십 년 후에 어떻게 사는 걸까?
연예부 기자인 송기자가 이름을 아는 걸 보면 그때까지 이 업종에 몸담고 있는 것 같은데…….
복잡하다. 내 뇌용량은 한계가 있는데 신경 쓰이는 일, 신경 쓰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과부하 걸리기 전에 날 잡고 앉아서 정리 좀 해야겠어.
간식을 먹은 후에는 애들과 무대 리허설을 하러 나갔다. 가슴에 A4 크기의 이름표를 하나씩 걸고.
저거 처음 봤을 때는 웃겼는데 여기서는 없으면 큰일 나는 필수품이었다. 인원수가 많은 아이돌 그룹, 특히 신인들은 피디가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울 수가 없으니까.
김현조는 외부 미팅 때문에 자리를 비웠고, 나랑 배신자 둘이 리허설 장면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익숙한 무대가 아니라서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대기실에서 모니터링하고 안무 간격이나 표정을 바로바로 수정하는 거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무대를 보여주려고.
그렇게 대기시간은 흐르고 흘러 생방송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김현조를 기다리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인사하러 온 사람인 줄 알고 문을 열었더니 카메라가 있다.
“VCR 찍으러 왔어요.”
“네?”
“다음 순서 소개하는 영상이요. 15초짜리니까 잠깐만 모여주세요.”
김현조가 나가기 전에 소개 영상 찍을 거라고 하더니 이게 그거구나.
안무연습 중인 애들을 불러오자 작가인지 뭔지 모를 여자가 손바닥만 한 대본을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처음에 그룹 이름 먼저 얘기하시구요, 넵튠이 소개할 곡은 김종수의 ‘가을 셋’이랑 스카이의 ‘따라오지 마’예요. 차례대로 한 줄씩 멘트 해주시면 되고, 그리고…….”
넵튠 네 명의 얼굴을 쭉 살펴본 여자가 이송하를 찍는다.
“송하 씨가 마지막에 제 자리에서 걸어가는 시늉 하다가 홱 돌아보면서, ‘따라오지 마.’라고 곡명 말해주세요. 다른 멤버분들은 따라가는 시늉 하다가 멈춰 주시면 돼요. 진지하게 연기하면 오글거리니까 그냥 재밌게 해주세요.”
“네!”
음악방송 모니터링하면서 많이 봤다. 어떻게 해도, 누가 해도 오글거리는 소개 영상.
애들은 한 줄짜리 멘트를 외워서 15초 소개 영상을 찍었다. ‘안녕하세요, 넵튠입니다!’ 부터 시작해서, 애틋한 감성 발라드라는 김종수의 가을 셋을 먼저 소개하고.
임서영이 상큼하게 멘트를 던진다.
“그리고 다음 곡은 나쁜 여자들로 돌아온 스카이의!”
마지막. 이송하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다른 애들이 살금살금 따라가는 시늉을 한다. 우뚝 멈춘 이송하가 홱 고개를 돌린다.
공중에서 흔들리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가라앉고, 그리고…….
“따라오지 마.”
단번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만족한 촬영팀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고, 배신자와 멤버들은 괜찮게 잘 찍은 것 같다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나는 그 사이에 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왜냐하면…… 이송하 쳐다보느라.
쟤 연기 잘하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이송하를 주시하고 있다.
스토킹한다는 건 아니고, 이송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고 은밀하게 조사하는 정도?
이송하가 출연한 뮤직비디오 완성본과 제작 영상을 수십 번이나 돌려봤다. 부족한 잠을 줄여가면서 분석하고 내린 결론은, 이송하는 절대 발연기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나한테는 재능이 넘치는 걸로 보인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작 영상을 보면 뮤직비디오 감독도 이송하를 콕 집어서 칭찬하는 장면이 있고.
그런데 왜 연기 레슨 때는 좋은 평가를 못 받았을까?
이송하에게 연기 레슨을 시켰다는 선생님 이름을 알아내서 뒷조사까지 했다. 혹시 사이비가 아닌가 하고…… 그런데 확실히 W&U에서 믿고 쓰는 선생이었다. 다른 회사 소속 배우들도 여럿 가르친 사람이고.
이송하에게 슬쩍 다시 연기 얘기를 꺼내봤지만 도망치는 뒷모습만 몇 번째 보고 있다.
하루, 이틀…… 별다른 수확 없이 며칠이 바쁘게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
나는 드디어 홍보팀의 연락을 받고 5층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흥분을 누르며 포장한 커피 박스를 꽉 쥐었다. 박팀장이 부탁한 걸 받고 싶으면 사오라고 한 커피다.
전화를 받자마자 날듯이 달려가서 제일 큰 사이즈로 샀다. 기다리던 홍주미 작가의 시놉시스가 손에 들어오는데 커피값쯤이야.
“여기 커피 왔습니다!”
홍보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커피를 내밀었다. 직원들과 박팀장이 기뻐하면서 하나씩 쏙쏙 뽑아간다.
곁눈질로 책상 위를 살펴봤는데 시놉시스는 안 보인다. 어딨지?
“박팀장님. 시…….”
“아아, 자기가 부탁한 거 여깄어.”
침을 꿀꺽 삼키고 기다리자, 박팀장이 내 손에 작은 종이 가방을 올린다.
응? 예상보다 크기가 좀 작다.
떨리는 손을 종이 가방 속에 넣은 순간, 흥분이 푸시시 식었다.
“블랙아웃 싸인 씨디 네 장.”
“아…….”
맞다. 그랬었지. 이것도 내가 부탁한 거긴 하다.
며칠 전에 아래층에서 박팀장을 만났을 때, 조카들이 생각나서 혹시 이걸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봤었다. 한 두 장도 아니고 네 장이나 되니까 부담스러울까봐 못 구해도 상관없다고 하고 지나갔었는데.
박팀장이 신경 써서 구해준 걸 텐데 조금이라도 실망한 티를 낼 수는 없어서 황급히 표정관리를 했다.
“감사합니다. 조카들이 진짜 팬이거든요. 갖다 주면 기절할걸요?”
“같이 일하는 사인데 뭐. 블랙아웃 멤버들 개인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싸인 씨디 정도면 못 들어 줄 부탁은 아니야. 그리고…….”
능글맞게 웃은 박팀장이 종이가방 위에 뭔가를 턱 얹는다.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종이 뭉치.
표지에는 [16부작 미니시리즈-고양이 수호령>이라는 제목이, 제일 밑에는 감독 이름과 극본 이름이 써 있다.
홍주미 작가.
“이거……!”
“TVL에서 한다던데? 자기가 얘기했던 거 맞지?”
“네. 이거 맞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다음에 또 커피나 한 잔씩 돌려.”
내가 시놉시스를 보물처럼 챙겼더니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매니저님 감 틀린 거 같던데요? 먼저 읽어봤는데 저는 좀 유치하던데.”
“맞아요. 도움받은 동물이 은혜를 갚는다는 소재도 진부하고.”
두 직원의 입에서 박한 평가가 나온다.
“시놉만 보면 확 끌리진 않았지?”
“뭐, 딱 케이블 드라마구나 싶은 느낌?”
내가 본 미래에서도 그랬지. 이 시놉을 본 사람들이 전부 유치하고 진부하다고 그랬다고.
진짜구나, 이거.
홍보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4층 라운지에 앉아 첫장부터 읽어내려갔다.
아하. 몇 줄 읽어보니까 바로 알겠다.
왜 이 시놉시스가 평가가 안 좋았는지.
시놉시스라는 건 예고편이나 마찬가지라, 투자자나 배우 관계자들이 이걸 보고 혹할 수 있도록 최대한 흥미진진하게 써야 한다. 평범하고 진부한 건 특별한 걸로 포장하고. 가끔은 예정에도 없는 해외 로케도 집어 넣고.
아예 시놉시스만 쓰는 작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여기에 공을 들인다.
그렇게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 타입슬립이랑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고.
그런데 이 시놉시스는 너무 정직하게 적었다. 누군가에게 팔려고 만든 카탈로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밋밋하게 정리해 놓은, 예를 들면 학교 숙제 같다고나 할까?
나는 시놉시스의 포장에는 신경 쓰지 않고 내용에만 집중했다.
추운 겨울. 평범한 여주인공은 귀갓길에 쓰러져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줍는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지만 파란 눈이 아주 예쁜 고양이. 여주인공은 고양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지만, 다음날 죽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고양이는 마지막에 따듯하게 눈을 감게 해준 여주인공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
그래서 제목이 고양이 수호령이구나.
그때부터 고양이 귀신은 여주인공의 일과 연애에 간섭하면서 때로는 도움을, 때로는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닌다. 뭐 결국에는 고양이 귀신 덕분에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멋진 직장상사와 사랑도 이루는 로맨틱 코미디다.
시놉만 보면 유치하고 진부하다는 소릴 들을만하네.
아, 그런데 고양이 귀신과 여주인공의 관계에 꽤 재밌는 설정이 있다.
고양이 귀신이 미국에서 물 건너왔다는 설정.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한국 땅에서 쓰러져 얼어 죽어가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고양이 귀신은 영어밖에 못한다. 여주인공은 영어 울렁증이고.
그래서 여주인공은 고양이 수호령과 대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통역사까지 고용…….
어?
어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종이를 휘리릭 넘겨서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봤다. 여주인공, 남주인공, 고양이…… 그리고 저 밑에 설마 했던 게 있다.
동시통역사.
[ 너 연기해라 (3) > 끝ⓒ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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