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53)
탑 매니지먼트 254화
이 바닥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고 (2)
“그래도 안 그럴 겁니다.”
손채영에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어도, 본인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그게 중요한 거 아닌가?
너무 나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애를 쓰고 있다는 거.
“그래요?”
손채영이 흥얼거리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지금껏 본 바론, 그럴만한 사람들은 결국 다 그렇게 되던데.”
그러면서 차 문을 덜컥 연다.
기다렸다는 듯 사나운 비바람이 들이닥쳤다. 빗발에 두들겨 맞다시피 한 손채영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곤 그새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우산 좀 빌려줘요. 내일 촬영인데,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뒷좌석에 있는 우산을 꺼내 건네며 물었다.
“촬영 못 하겠다더니?”
“난 원래 약보단 독이 더 잘 듣는 편이거든요.”
그러면서 손채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송하한테 말이나 전해줘요. 내 사춘기는 앞으로도 안 끝날 거니까 너나 계속 크시라고. 그리고 원래 내 거였던 것도, 지금 걔가 가진 것도, 내가 다 가져올 거라고.”
다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손채영이 새파란 우산을 펴들고 빗속으로 멀어졌다.
*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내내 오만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그럴만한 사람들은 결국 다 그렇게 된다는 말부터,
선전포고가 따로 없던 마지막 말까지.
손채영의 목소리가 한바탕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지나간 후에야, 한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뭘까?
왜 손채영과 관련된 일엔 미래예지가 널을 뛰는 거지?
아니, 생각해 보면 칸에서부터 쭉 이상하긴 했다.
내가 도시정글을 오현경 감독과 함께하기로 한 후로 꽤 오랫동안 감감무소식이던 미래예지가, 난데없이 하루걸러 한 번씩 튀어나오질 않나.
최근엔 운수 나쁜 날, 우렁이, 도돌이표까지, 내가 고른 작품마다 오디오 버전으로 초를 쳐서 사람 환장하게 만들질 않나.
깔짝거리면서 거슬리지 말고 전처럼 성공할 작품이나 보여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공범자를 내밀었지.
사실 이상하긴 그게 제일 이상했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이제 미래예지가 내 의사를 적극 반영할 생각인가 싶었지.
처음부터 몇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불통이더니, 드디어 나랑 소통이라는 걸 해볼 생각인가 했다고.
그래서 비슷한 상황으로 시뮬레이션도 해봤고, 속으로 미래예지를 불러보기도 했는데. 정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 놓고,
오늘 손채영만 연달아 세 번을 반복 재생하면서 나한테 사기를 쳐?
혀를 차며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빨간불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우산을 양손으로 부여잡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여전히 비를 퍼붓고 있는 거무죽죽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왕에 미래를 보여줄 거면, 나한테 도움 되는 정보나 보내라니까.
차라리 그거.
이십여 년 후, 미래의 나와 박국장이 나누던 대화.
그 뒷부분이 더 궁금한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음울한 잿빛 하늘이 뒤집히더니 선명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하나 더 생각났는데.”
내가 말했다.
미래의 내가.
눈앞에 앉은 박국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면 제 배우한테 갖다주고 싶은 작품이요. 그때쯤이면, 그거 나왔을 때 아닌가? 첫사랑입니다.”
이것 봐라?
타이밍이, 아무리 봐도 우연이 아닌데?
일단 난잡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밀어두고 눈앞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 첫사랑입니다. 그러네요, 그게 그때쯤이구나.”
‘첫사랑입니다’가 제목인가?
드라마? 영화?
박국장이 송기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도 봤니?”
“당연히 봤죠, 시대를 안타는 명작인데. 저희 엄마랑 할머니도 되게 좋아하셨던 드라마라 집에서 본방송도 다 챙겨봤었어요. 저 어렸을 때였는데도 그때 진짜 인기 많았었던 건 기억나요.”
“시청률이 처음에 4프론가? 그쯤에서 시작해서 거의 40프로 가까이 갔었으니까. 그 시절에도 시청률 40프로면 말도 안 되는 숫자였거든.”
40프로?
“나라가 들썩들썩했지. 신파 멜로는 이제 안 먹힌다고 가벼운 로코만 줄창 찍어내던 시기에, 화제성도 없는 배우들 데리고, 그것도 쥐꼬리만 한 제작비로.”
작은 탄성과 함께 박국장이 말했다.
“명작은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작품이니까.”
“······.”
다시 우중충한 하늘이 시야를 채웠다.
심장을 두들기는 듯한 요란한 빗소리도 다시 이어졌다.
물기 가득한 유리 너머, 여전히 사람들이 바쁘게 길을 건너고 있었다.
‘첫사랑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제목인데.
하긴, 공범자 때도 그랬지.
아직 대본이 밖에 안 나온 건가? 아니면 내가 놓쳤나?
뭐든 상관없다.
아직 안 나왔으면 지금부터 찾으면 되고,
내가 놓쳤으면 다시 가져오면 되니까.
회사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홍보팀부터 찾았다.
다행히 박팀장은 자리에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희한해진다.
“자기 손채영이랑 같이,”
“팀장님. 혹시 ‘첫사랑입니다’라는 드라마 들어보셨어요?”
“응?”
박팀장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대답했다.
“응.”
너무 간단해서 잠시 말문이 막힐 뻔했다.
“들어봤다고요? 멜로, 맞아요?”
“응. 황금주 작가님 거 말하는 거 아냐?”
“황금주······.”
정통 멜로 쪽으론 꽤 커리어가 쟁쟁한 베테랑 작가다.
왕년에는 시청률 40프로를 넘겨본 적도 있는.
물론 그 커리어의 황금기도 이미 이십 년쯤 지났고 공백기도 오래돼서, 지금은 과거의 영광만 남은 한물간 작가 취급을 받고 있지만.
“첫사랑입니다? 그런 작품이 있었어요?”
홍보팀 남직원의 물음에 여직원이 곧장 대답했다.
“저번에 기획안 들어온 거 못 봤어? 세상 시니컬하던 남녀 주인공이 서른 넘어서 서로 첫사랑에 빠져가지고 울고불고 염병하던 신파 있잖아. 남주가 불치병 걸려서 마지막에 죽고 여주도 따라 죽는 거.”
“아, 기억난다.”
둘의 대화에 끼어들어 물었다.
“저는 본 기억이 없는데. 언제 들어왔어요?”
회사로 들어오는 시놉이나 기획안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빼고는 어지간한 건 다 보는데. 아무리 옛날 작가라고 해도 황금주 작가 신작이면 내가 안 봤을 리가 없는데.
“그거 제안이, 손채영한테 다이렉트로 들어갔거든. 조병환 임시팀장님이 기획안 보고 바로 깠지. 대본은 받아보지도 않았을걸?”
손채영한테 들어왔었다고?
“근데 이건 깔만했어. 요즘 세상에 불치병 신파에 새드엔딩 러브스토리가 웬 말이야, 올드하게. 어우, 올드한 걸 넘어서 완전 쌍팔년도 감성이지.”
박팀장이 학을 떼며 말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주인공들이 사랑 때문에 죽네 사네 하다가 진짜로 죽는 드라마, 요즘 애들이 피곤해서 보겠어? 그깟 사랑 없으면 죽냐는 소리가 먼저 나오지?”
“요즘 트렌드가 아니긴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황금주 작가님 스타일이 그런데. 옛날엔 그런 신파 멜로로 시청률 잘 내셨었고요.”
“그래. 이십 년 전에. 폴더폰 쓰던 시절에.”
혀를 차는 박팀장에게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글빨은 좋은 작가님이잖아요. 아무리 요즘 트렌드가 점점 더 가벼워지는 추세라고 해도, 이런 운명적인 사랑 얘기는 클래식 아니에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전 이런 사랑 해보고 싶던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기도 하고?”
남직원이 동의했다. 박팀장이 둘을 쳐다보며 물었다.
“니들 노후 대비는 하고 있니?”
“······갑자기 뼈 때리시기 있어요?”
“백세시대에 노후 대비도 못 한 것들이 운명적인 사랑은 무슨. 그럴 시간에 적금이나 하나씩 더 드세요.”
“아니,”
“팀장님.”
조급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거 기획안, 지금도 있어요?”
시끌시끌하던 대화가 뚝 끊겼다.
박팀장과 홍보팀 직원들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정선우 팀장님이 이렇게 작품 하나 딱 찝어서 관심을 보이면, 보통 결과가 드라마틱한데.”
드르륵, 바퀴 소리와 함께 의자가 밀려 나갔다.
벌떡 일어난 박팀장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눈을 빛냈다.
“난 자기가 이럴 때 제일 기대되더라.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알아?”
“······.”
불현듯, 등줄기가 선뜩했다.
박팀장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에 떠올라 있을 희열과 기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40프로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할 작품.
반짝 성공이 아니라, 이십 년 후에도 명작소리를 듣는 작품.
그런걸,
“근데 이거 이미 주연 세팅 다 끝난 것 같은데요?”
······뭐?
“여기요.”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남직원이 모니터를 이쪽으로 돌렸다.
기사였다.
보름 전에 작성된, 남녀 배우 두 명의 프로필사진이 함께 들어 있는.
‘첫사랑입니다’의 캐스팅 확정 기사.
“뭐 기사만 몇 개 뜨고 다른 건 없어요. 아직 홍보를 안 했나?”
“장효은이랑 최종윤? 서브가 아니라 메인롤 맞아?”
“기사엔 그렇다고 돼 있는데?”
“주연이 너무 약하네. 이러니까 화제성이 없지. 기대가 안 되잖아.”
“섭외가 잘 안됐나? 그래도 황금주 작가님 작품인데 좀 심하다.”
주인공 섭외가 끝났다고? 벌써?
직접 마우스를 움직여 기사를 훑어봤다. 제작사나 배우 기획사에서 뿌렸을 보도자료를 성의 없이 옮겨적은 기사들 몇 개가 전부였다.
계약서를 썼을까?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만 않았으면······.
그럼.
그럼, 뭐? 뭐 어쩌자고?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
“장효은이랑 최종윤 부부가 그 드라마로 처음 만난 거죠?”
다시 미래였다.
송기자의 질문에 박국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그래서 둘이 결혼할 때 드라마 팬들이 난리 났었잖아. 드라마에서는 새드앤딩이었는데 현실은 해피엔딩.”
“드라마틱하네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그 두 사람 대표작이 ‘첫사랑입니다’인 거지. 그거 말곤 딱히 잘된 작품이 없어서기도 하지만. 어쨌든 당시엔 기자들 사이에서 둘이 쇼윈도 부부 아니냔 얘기도 많았는데, 이렇게 잘살 줄 몰랐네.”
“아, 그런데요.”
송기자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물론 가정이긴 하지만······ 대표님이 옛날로 돌아가서 이 작품을 해버리면, 장효은이랑 최종윤은 인생작도 놓치고 결혼도 못 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머리끝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입이 열리고,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나?”
“네?”
“그런 사정 다 따지면서 일하면 어느 세월에 성공하겠어요. 아니, 애초에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은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틸 수도 없을 텐데.”
그리고 박국장을 돌아봤다.
뺨이 움직이고, 입 끝이 빙긋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인터뷰할 때 이런 얘긴 하면 안 되는데.”
동시에 박국장이 검은 입술을 당기며 웃었다. 당황한 듯한 송기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내 쪽을 돌아본다.
“우리도 옛날엔 얘처럼 애 같을 때가 있었는데, 그죠?”
눈앞에 있던 박국장의 얼굴이 홱, 홍보팀 박팀장의 얼굴로 바뀌었다.
박팀장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회의실로 갈래? 우리 저번처럼 얘기 좀 할까?”
저번처럼.
배명진의 손에 가려던 시나리오를 가져왔던 때처럼.
“아, 기획안은 어디 있을 텐데. 일단 그거부터 찾아줄까?”
“······아뇨.”
꽉 막혀 있던 목소리를 끄집어내 대답했다.
“필요 없어요. 이거 안 할 거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