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60)
탑 매니지먼트 261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들끼리 (5)
“대표님, 뭐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법무팀장이 계약서를 챙기며 물었다.
턱을 괴고 앉아있던 백한성 대표가 눈길을 돌렸다.
“왜?”
“오늘따라 좀 그래 보이셔서요. 도통 웃지도 않으시고.”
“그랬나?”
백한성 대표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혹시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말씀하세요. 민사, 형사, 뭐 전문 분야는 아니어도 어지간한 선까진 다 상담이 가능하니까.”
“음······.”
고민하는 듯하던 백한성 대표가 입을 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일은, 평생 없을 줄 알았는데.”
“네.”
“애가 말을 안 들어.”
“네?”
법무팀장의 손에서 계약서가 구겨졌다. 황급히 구겨진 부분을 편 그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백한성 대표를 바라봤다.
“애가, 없으시잖아요? 설마 있으······.”
“······.”
“시진 않으실 거고. 혹시 동물 키우세요?”
“더 나은 길이 있는데, 자꾸 딴 길로 가려고 하네.”
백한성 대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두꺼운 안경 너머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 법무팀장이 말했다.
“어······ 요즘 애들이 다 그렇죠. 저도 애들 키우지만 제 마음대로 되는 애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지들 딴에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믿고 맡겨 보는 것도 괜찮던데요.”
“어차피 나중에 후회할 텐데. 소모될 시간과 기회가 아깝잖아.”
“사실 애 판단이 맞는 경우도 있어서······.”
“이건 그럴 수가 없어. 나도 겪어본 일이라.”
“아.”
“잘 키워보려고 했더니 쉽지가 않네. 내 마음대로 끌어다 놓으면 정말 뛰쳐나가겠다고 소란 피울 것 같고. 이걸 어떻게 고치지.”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인 법무팀장이 농담처럼 대꾸했다.
“내 손에서 어떻게 안 되면, 남한테 좀 맡겨 보는 건 어떠세요. 보통 어떤 문제든 전문가가,”
“그건 안 되겠는데.”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남 손에서 더 잘 크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대표님, 근데 이게 전부 비유인 거죠? 왜냐면, 이게 진짜 애 얘기면 제가 법률상담을 할 게 아니라 가족 심리상담사를 소개해 드려야 할 것 같거든요.”
“······그냥 해 본 말이야.”
백한성 대표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잊어버려.”
“네. 어쨌든, 대표님은 애를 안 낳으시는 게 좋겠네요.”
“음?”
“죄송합니다. 갑자기 진심이 튀어나와서.”
법무팀장이 멋쩍게 웃으며 계약서를 챙겨 대표실을 나갔다.
얼마 후. 본부장이 머그잔을 핫팩처럼 양손에 쥐고 들어왔다.
겨울도 아닌데 벌써 추워진다느니, 이러다 금방 한파경보 뜨고 동파주의보 내리게 생겼다느니, 한참 너스레를 떨던 본부장이 밀크티를 후후 불며 말했다.
“대표님. 손채영이 그거 안 하겠다고 했다네요? 첫사랑입니다.”
“······안 한다고 했다고?”
“그렇대요. 그래서 조실장 걔가 얼굴이 죽상이더라고요. 그거 정선우가 딱 꽂혀서 우리가 투자까지 들어간 작품이라고, 그 얘기까지 다 했다는데. 손채영이 그냥 여지도 안 남기고 깠대요. 희한하죠?”
모호한 표정으로, 백한성 대표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건 좀······ 의외네.”
***
자고 일어나니,
나는 또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자기 대표님이랑 싸웠어?”
“······누가 그래요?”
어제 내가 회사에서 김현조와 3팀장한테 얘기했을 때는, 분명 주위에 듣는 귀가 없었는데. 그 둘이 떠든 게 아니라면 남은 건······.
“2팀에서 소문 돌기 시작한 걸로 봐선 조병한 임시팀장님이 매우 의심스러운데. 본인은 절대 아니라네?”
“소문이 뭐라고 났는데요?”
“왜, 자기 어제 대표실 들어갔었잖아. 그때 안에 분위기 안 좋았다고. 별 얘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자긴 오늘 술 퍼마신 얼굴로 출근했지. 대표님도 아침에 오실 때 표정이 안 좋으셨었나 봐. 그래서 소문에 살이 좀 붙었어.”
“······.”
놀랍지도 않다.
내 소문이야 뭐, 늘 물만 먹어도 살이 찌니까.
무당 대본을 챙겨 미리 신수연 피디와 약속한 회의실을 찾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의자 편하네요. 회의실 분위기도 산뜻하고. GTBN은 무슨 골방 같았거든요. 여기선 회의 한 열 시간씩 해도 괜찮겠는데요?”
“회의를요?”
“기획할 땐 다 그렇게 하잖아요. 여긴 안 그래요?”
신수연 피디가 발로 브레이크를 걸어 의자를 세우며 말했다.
“근데 정팀장님이 백대표님하고 갈라선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그게 피디님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권피디, 우리 기획피디가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 알려주던데요. W&U 정선우 팀장과 백한성 대표의 밀월관계 파국, 워낙 관심 가는 이슈잖아요.”
“파국······ 그냥 무시하셔도 돼요.”
맞은편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드르륵, 발을 구른 신수연 피디가 의자를 타고 눈앞까지 다가왔다.
지난번엔 첫 출근이라 그나마 격식을 차린 모습이었는지, 오늘은 반지에 팔찌, 귓바퀴의 피어싱까지 액세서리가 다양했다. 쇳덩어리 같은 심플한 디자인에, 전부 검은색이었다.
“다행이네요. 전 이번 작품 꼭 정팀장님이랑 하고 싶은데, 여기 대표님한테 밉보여서 쌍으로 나가리되는 거 아닌가 했어요. 정팀장님도 회사 생활 버라이어티하신가 봐요. 새삼 동질감 느껴지네.”
씩 웃은 그녀가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참, 정팀장님. 장민정 작가님이랑 친하죠?”
“장작가님이요?”
로열패밀리?
“저번에 작품 같이할 때 두 분이 사이 되게 좋았다고 들었는데. 장민정 작가님은 차기작 준비 안 하신대요? 우리가 그거 가져올 수 있으면 완전 퍼펙튼데.”
눈동자가 열기로 반질반질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꽂히는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분 요즘 영화 하신다고 시나리오 공부 중이시라.”
“아, 왜? 그냥 잘하는 드라마 하시면서 떼돈이나 버시지. 영화 시나리오는 갑자기 왜요?”
“그냥 한번은 해 보고 싶으셨대요. 떼돈은 이미 버셨으니까.”
안타까워하는 그녀에게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이거 한번 읽어보실래요?”
“뭐······ 대본이에요?”
“네. 제가 피디님이랑 꼭 같이 하고 싶은 작품인데.”
신수연 피디가 일주일은 굶은 사람처럼 종이가방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 무당 1화 대본을 꺼내 구석구석 살폈다.
“장준섭 작가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직 드라마 하신 적이 없는 분이라서요.”
그녀가 떨떠름한 소리를 냈다.
“신인? 입봉 작가예요?”
“원래 웹툰 작간데, 본인 대표작을 직접 대본으로 만들었어요.”
“웹툰?”
날 보던 눈동자가 왼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찌푸려졌다.
“이거 혹시 예전에 영화로 한 번, 쫄딱······.”
“맞아요.”
“망했던 거 맞구나.”
신수연 피디가 혀를 찼다.
“정팀장님. 저도 이직하고 첫 작품이고, W&U도 막 콘텐츠사업 시작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번 작품은 모험하면 안 돼요. 스타작가 쓰고, 돈지랄도 하고. 우리 장난하는 거 아니고 제대로 된 드라마 만들 거라고 아주 광고를 해야 한다니까요?”
그녀가 담배 연기처럼 한숨을 훅 뱉었다.
“저 지상파 있다가 GTBN으로 갔을 때. 너도 거기 가면 개떡 같은 막장 드라마나 찍고 시청률 1프로 나올 거라고 하도 지랄들을 하길래 내가 좆같아서 신명길 작가님 모셔 왔잖아요. 그 작가님 애들 어린이집 하원도 시켜주고, 아주 별짓을 다 해서.”
그렇게 신명길 작가와 만든 작품이 대박이 났지.
“첫 작품은 그런 걸로 해야 돼요. 빵빵한 거. 이 이미지가 앞으로 쭉 갈 거니까. 아, 혹시 표영호 부장님이 안전빵으로 드라마 만들 거니까 우린 모험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면.”
신수연 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우리 표부장님 현장 안 나가고 사무실에서 노닥거린 지 오래돼서 감 다 떨어졌어요. 표부장님이 메인이 아니라 제가 메인이에요. 지원도 우리가 더 받을 거고. 시청률도, 결과도, 우리가 내야 돼요.”
“······일단 대본 한 번 봐주세요. 그 후에 다시 얘기할까요?”
내 말에 신수연 피디가 종이가방을 들여다봤다.
탑처럼 쌓여있는 16부 대본을 보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다 보고 연락드릴게요.”
하루가 저물었을 즈음에도 소문은 식지 않았다.
물밑에선 정선우가 백한성 대표한테 주제도 모르고 대들어서 모가지가 간당간당한다더라. 그동안 온갖 편애는 다 받더니 정선우 좋은 날도 이제 끝났다, 뭐 이런 말까지 도는 모양이었다.
내가 당장 짐 싸서 나갈 거라는 예측도 있었다.
전에 2팀장이 백한성 대표하고 대립각을 세웠다가 다음날 바로 잡초처럼 뽑혀서 내던져진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제2의 2팀장이 될 것인가, 하는 게 관심 포인트겠지.
시계를 보고 일찍 짐을 챙겨 일어났다.
오늘은 회사에 오래 남아있어 봐야 헛소리만 듣게 될 것 같아서.
막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또, 손채영이었다.
잠깐 바라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네.”
-진짜 대표님한테 대들었어요?
회사엔 얼굴도 안 비추는 사람인데 소식 한번 빠르다.
조병환 실장이 쫓아가서 떠들었나?
-내가 우리 사이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
-웬만하면 대표님하고 안 좋게 회사 그만두지 마요.
“······손채영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W&U에서 백한성 대표랑 안 좋게 회사 그만둘 것 같은 사람 투표하면 1위로 뽑힐 것 같은 사람이. 아, 지금 소문이 더 무성해지면 곧 나랑 1위 다툼할지도 모르겠네. 아주 박 터지는 대결이겠어.
핸드폰 너머에서 손채영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맨날 계약 문제다 뭐다 해서 백대표님 긁어도, 진짜로 계약 끝내게 되는 날엔 그 사람이랑 밥 먹고 헤어질 거예요. 마음만 먹으면 내 인생 망칠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니까.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욘 없잖아요?
시큰둥하게 말한 손채영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백대표님이랑 정말 싸웠으면, 완전히 등지고 빼도 박도 못할 사태 만들지 말고 대충 얼버무려요. 그냥 성질머리 더러운 정선우가 성질냈다, 이런 느낌으로. 이게 다 경험에서 나오는 충고예요.
그러니까.
나더러 제2의 손채영이 되란 소린가?
말문이 막혀서 잠깐 멈춰있는데, 손채영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대표님도 넘어갈걸요? 아무리 성질내고 뒤집어엎어도, 쓸모만 있으면 어지간해선 안 놓거든요, 그 사람.
“······.”
통화를 끝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홍보팀 직원들이 내려가는 버튼을 눌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팀장님 퇴근하세요? 웬일로 일찍 가시네요.”
“네,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회사 안팎의 소문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게 저 사람들일 텐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스몰 토크를 걸어오는 게 고맙기 짝이 없다.
“앞으로도 계속 바쁘실······.”
위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들어가려던 홍보팀 직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아, 제가 뭘 좀 놓고 와서, 다음 거 타야겠네.”
“내가 같이 가줄게.”
나란히 횡설수설하더니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나만 남겨두고.
승객을 잃은 엘리베이터가 다시 닫히려는 순간, 혼자 안쪽에 서 있던 백한성 대표가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다시 열렸다.
“안 타?”
“······타야죠.”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사무실로 가다 말고 이쪽을 쳐다보는 홍보팀 직원들이 보인다.
나를 보는 표정이 뭐랄까······.
돕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움과 참담함이 섞인 표정이랄까.
뭐,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슨 사고라도 날 것 같은가 보지?
전광판의 숫자가 줄어든다. 4층에서 멈췄는데, 열리는 문 너머로 서너 명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타지 않았다.
새로운 가십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내일이면 태어나겠지.
······좀 웃을 걸 그랬나?
다시 줄어드는 숫자를 쳐다보며 텁텁한 숨을 쉬었을 때였다.
“내일 투자팀하고 첫사랑입니다쪽 제작사 방문한다고?”
“네.”
조병환이 그쪽 제작사에 분탕이라도 쳐놓은 건 아닌가 싶어서.
만약 그랬으면, 제작사든 배우들 소속사든 뒤숭숭할 테니까.
“무당 쪽은. 잘 돼가?”
“아, 네.”
“잘 해봐.”
“······네.”
그게 다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을 사람들은 좀 아쉽겠지만.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없었다.
어제 일이 떠올라서 얼굴 맞대고 있는 게 좀 거북하긴 한데. 생각해 보면 어차피 이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 심신이 편했던 적이 드물었다.
체감상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럼.”
“들어가세요.”
천천히 걸어가던 백한성 대표가 돌연 내 쪽을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이내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정팀장은 참······.”
참?
“아니야. 들어가.”
참, 뭐?
남은 사람이 답답해서 숨이 넘어가건 말건, 말을 하다가 만 당사자는 그대로 롤스로이스를 끌고 가버렸다.
뭐지 이건?
‘아는지 모르겠는데, 정팀장은 참······.’
마지막 말이 귓전에서 하염없이 맴돌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