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62)
탑 매니지먼트 263화
어쨌든 정선우니까 (2)
400억.
순제작비만으로, 최소 400억.
가능한가?
“전 이거 마음에 들어요.”
신수연 피디가 팔짱을 낀 채 회의실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앵클부츠 굽이 바닥을 경쾌하게 두들겼다.
“대본 잘 뽑혔고. 무사히 투자받아서 제작만 들어가면, 모두가 주목할 만한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될 거고. 전 그런 타이틀 좋아하거든요. 최초, 최고, 최대, 뭐 그런 거?”
홱 돌아선 그녀가 몇 걸음 만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눈이 나를 찌르듯 바라봤다.
“그런데 정팀장님은 감당이 되겠어요?”
“저요?”
“이 작품, 정선우 팀장님이 핸들 잡고 있잖아요. W&U에선 정팀장님 때문에 여기에 투자하기로 한 걸 테고. 400억이면 내부에서 소화 못 하니까 밖에서 제작비 끌어와야 할 텐데, 그때도 아마 정팀장님 이름을 꽤 팔아먹게 될 거고?”
그렇겠지.
이미 도시정글 때도 한번 해봤다.
“만약 결과가 안 좋으면, 정팀장님이 지금까지 한칸 한칸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단숨에 무너질 텐데. 그거까지 다 감당이 되겠느냐고요.”
결과가 안 좋으면?
불현듯 백한성 대표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정선우 팀장은, 실패하면 안 되니까.’
‘언제나 결과가 중요하니까.’
무당 망하면 후폭풍이 좀 크긴 하겠지.
그 결과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곧바로 털어버렸다.
벼락같이 꽂힌 작품이었다.
이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감이 지금도 이렇게 펄떡펄떡 뛰는데.
그런데도 여기에다 모든 걸 걸고 올인하지 못할 거면,
내가 미래예지 없이 앞으로 뭘 할 수 있는데?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고 말했다.
“감당해야죠. 저도 그런 거 좋아합니다.”
“네?”
“역대 최고, 사상 최초. 그런 타이틀이요.”
내 말에, 신수연 피디가 씩 웃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진행할까요?”
“합시다.”
내가 대답했다.
*
회의실에 빙 둘러앉았다.
투자팀부터 콘텐츠 제작사업부의 새로운 얼굴들까지.
나와 신수연 피디를 제외하곤, 저마다 앞에 놓인 무당의 기획안을 들춰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동안 날 바라보던 표영호 부장이 신수연 피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 진짜 하겠다고?”
“왜요?”
“야. 나도 편당 6억짜리 예산 잡고 준비하는 중인데, 너는 한 번에 400억을 태우겠다고?”
신수연 피디가 손에 쥔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꾸했다.
“제가 배포가 좀 크잖아요. 아, 이거 제 거니까 괜히 눈독 들이지 마세요. 부장님은 연출이 올드해서 이거 찍어봤자 욕먹어요.”
“······내가 하필 왜 이 물건을 데리고 왔을까?”
“부장님 라인에서 제가 제일 실력이 좋으니까요? 솔직히 나머진 철밥통 포기하고 밖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으니까 못 나온 거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표영호 부장이 일어섰다.
“그래, 너 잘났다. 잘난 신피디님 마음대로 한번 해 봐라. 난 내 작품이나 준비하러 갈 테니까.”
다시 한번, 할 말이 참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표영호 부장이 결국 회의실을 나갔다. 신수연 피디가 잡상인이라도 쫓아낸 것처럼 속 시원한 얼굴로 전면창 블라인드를 쫙 내려버렸다.
“16편에 400억. 회당 25억이네요.”
외부 프로덕션에서 쭉 기획피디로 일하다 온 권피디가 말했다.
“와······.”
“숫자만 들어도 눈앞이 캄캄하네. 제가 올 초에 총 70억짜리 드라마 기획하다가, 캐스팅까지 다 해 놓고 엎었거든요. 제작비가 부족해서.”
혀를 내두른 권피디가 슬쩍 목소리를 죽였다.
“근데 여기 대표님은 이런 걸 컨펌을 내줘요?”
시선들이 내 쪽을 힐끔 돌아본다.
“장르에, 사이즈에, 솔직히 대기업 끼고 있는 제작사도 이런 거 만든다고 발표하면 주가 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제작비야 외부자금 끌어와서 메꾼다고 해도, 콘텐츠 사업한다고 떠들썩하게 간판 걸어놓고 초장부터 이런 거 만들다 말아먹으면 회사도 타격이 크지 않나?”
“바로 다음 작품부터 투자받기 힘들어질걸요?”
“진짜, 정선우 팀장님쯤 되니까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작품이네요.”
이젠 아예 대놓고들 날 바라본다.
곧, 샛길로 빠졌던 화제가 다시 제작비 얘기로 돌아갔다.
“영화도 아니고, 이거 국내에서는 절대 회수 못 할 텐데요.”
“못하지. 방송사에선 제작비 얘기만 들어도 기겁할걸요? 드라마 대박 터져서 본방에 재방까지 광고 완판돼도 백억 벌까 말깐데, 수지가 안 맞잖아.”
“일단은 정부지원금 알아보고. PPL 적당히 넣는다고 해도······ 무조건 해외에 비싼 값으로 선판매가 돼야 그림이 나오겠네요.”
해외 선판매라.
가만히 얘기를 듣다가 물었다.
“국내에 들어온 OTT 쪽으로 먼저 접촉해 보면 어때요? 국내 동시 방영권이든, 해외방영권이든.”
“그것도 괜찮죠. 어쨌든 그쪽은 돈이 부족하진 않으니까.”
지금 국내에 진출한 해외 OTT 업체는 세 개였다.
플랜 플러스와 스튜디오 로건. 네온 TV.
엇비슷한 시기에 들어와서 한참 박 터지게 점유율 싸움을 하다가, 지금은 플랜 플러스의 판정승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던데. 내년엔 BP 하우스도 국내에 진출한다니까 그때가 되면 또 한바탕 시끌시끌하겠지.
세상이 정말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느낌이다.
“근데 국내 콘텐츠 투자는 줄일 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네온 TV는 아예 자체 제작은 올스톱 상태라는 말도 있고.”
“드라마든 영화든, IP 사들여서 자체 제작한 것들 반응이 다 어중간하니까. 뭐든 대박 하나만 터져라, 하고 쏟아붓기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죠.”
“일단 접촉은 해보지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신수연 피디가 볼펜 끝으로 노트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정팀장님은 우리 드라마가 해외에서 먹힐 것 같으세요?”
“네.”
곧바로 대답했다.
“오컬트 장르야 어디서나 주류는 아니지만, 국내에선 한 줌이어도 해외엔 한 트럭쯤 될 거고. 히어로물 쪽 팬덤은 이제 비주류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크니까요.”
“해외시장이라······.”
맞은편에서, 그녀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럼 제일 중요한 얘기 좀 할까요? 해외든 국내든 비싸게 팔려면 우리 간판이 좋아야 할 텐데. 이거 주연, W&U에서 그렇게 깔아줄 수 있어요?”
“······저번에 장준섭 작가님 처음 뵀을 때 얘기했었는데, 주인공은 송하가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 생각은 어떠세요?”
내 말에 신수연 피디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이송하씨, 당연히 좋죠. 국내, 해외, 전부 잘 먹히는 배운데.”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사실 남조윤이 하면 어떨까를 줄곧 고민했었다.
마침 지금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기도 하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엔 서지준씨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감독님 의견은,”
“완전 땡큐죠.”
신수연 피디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기울어지다 못해 거의 테이블을 넘어올 지경이다.
“그럼, 제가 대본 가져가서 배우들하고 얘기해 볼게요. 송하는 넵튠 앨범 준비 중이고 지준씨도 영화 들어가는 게 있어서, 두 사람이 오케이 해도 스케줄은 좀 조율이 필요할 겁니다.”
“스케줄이야 다 맞출 수 있죠. 그런데······.”
그녀가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무당이, 이 드라마가 악역이 꽤 중요하잖아요?”
“중요하죠.”
“손채영씨 어때요?”
눈이 어찌나 뜨거운지.
그 속에서 불꽃 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장준섭 작가님한테 얘기 들으셨어요?”
신수연 피디가 눈을 깜빡였다.
“아뇨, 제 생각인데. 작가님도 손채영이 좋으시대요? 정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이거 손채영씨가 하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울리긴 하죠. 그런데······.”
“힘들다는 건 알아요. 비중이 크다고는 해도, 손채영씨가 드라마에서 주인공 놔두고 악역 할 급이 아니니까. 근데 한번 손채영씨 생각을 하니까 다른 배우는 도저히 성이 안 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회의 들어오기 전에 조병환 실장님한테 한번 물어봤거든요.”
“네?”
물어봤다고?
“그분이 손채영씨 담당이시라길래. 그냥 툭 던지듯이 물어만 봤어요. 혹시 얻어걸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요?”
“까였죠.”
당연히 그랬겠지.
순간 긴장했네.
“말로는 정중하게 거절하는데, 눈으로 쌍욕을 하더라고요. 팀장님하고 그분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다면서요? 보아하니 손채영씨하고 이송하씨도 썩 친한 사이는 아니고?”
진실을 모르는 어린양들을 앞에 두고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신수연 피디가 계속 말했다.
“제가 아는 선배가 손채영씨하고 같이 작품 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썰을 좀 들었는데요.”
“아, 들었어요?”
“애티튜드가 정말 프로라면서요.”
물을 마시다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사람이 좀 친근한 스타일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쓸데없는 기 싸움 없고, 무리한 요구 안 하고, 공사 구분 확실하고.”
누가? 손채영이?
“딱 연기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어지간해선 촬영장에서 불화가 생길 일은 없을 거라던데. 그럼, 이송하씨하고도 괜찮지 않을까요?”
안 괜찮을걸요.
신수연 피디가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정팀장님이 한번 부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요? 누구, 조실장님한테요?”
부탁하라고?
차라리 내일까지 400억을 만들어 오라고 해라.
“안 되겠죠?”
“안 됩니다.”
“사이가 정말 안 좋으시구나. 그럼, 손채영씨한테는요?”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분이랑은 좀 친하시다고 들었는데.”
한숨과 함께 물을 쭉 들이켰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신수연 피디가 나를 설득했다.
“제가 매니지먼트 쪽은 잘 모르지만, 이미 손채영씨 담당하는 팀에서 거절한 걸 배우한테 다이렉트로, 그것도 정팀장님이 얘기하는 게 좀 그렇긴 하죠. 뭔가 내정간섭 같은 느낌인가?”
“······.”
“그래도 조병환 실장님이랑 정팀장님은 이미 사이가 나쁜 상태니까, 여기서 더 나빠져 봤자······ 뭐, 거기서 거기 아니에요?”
본인도 어처구니없는 말인 건 아는지 눈을 슬쩍 피한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제정신이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결국 신수연 피디가 손을 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원래 물불 안 가리는 스타일이라서. 그냥 말이나 한번 꺼내봤어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네, 그럼,”
“제가 손채영 씨 다니는 샵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들이대 볼게요. 뭘 좋아하시려나.”
“······손채영씨는 그냥 포기하시죠. 이거 절대 안 할 겁니다.”
“확실한 1순위가 있는데 어떻게 부딪쳐 보지도 않고 포기해요.”
신수연 피디가 테이블을 탁,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제가 이런 쪽으론 또 일가견이 있으니까. 예전에 심선경 씨 캐스팅하려고 그 집 어머니랑 색소폰 학원 같이 다니면서 합주까지 했던 사람이에요, 제가. 계약서에 도장 찍는데 딱 한 달 걸렸어요.”
신명길 작가 애들 어린이집 하원도 시켜줬었다더니.
인맥 관리로 탑급 연예인들 경조사 챙기고 선물 공세 하는 피디, 작가들은 여럿 봤지만, 이만큼 저돌적인 사람은 또 처음이다. 이 정도 되니까 하는 작품마다 작가와 배우들을 탑급으로 세팅할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신수연 피디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제 한 회사 식구가 된 사람들 얼굴을 쭉 돌아보고, 판도라의 상자를 살짝 열었다.
“피디님. 송하랑 손채영씨 사이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안 좋아요. 손채영씨는 송하 작품에 절대 서브로 안 들어올 겁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괜히 피디님 시간 낭비······.”
“걱정마세요. 배우들 기싸움이야 이골이 났으니까. 일단 계약하고 촬영장에 나오기만 하면 그때부턴 제가 휘어잡을 수 있어요.”
힘들 텐데.
“어쨌든 한번 만나보고, 씨알도 안 먹히면 진짜 포기할게요.”
신수연 피디가 말했다.
나도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본인이 납득을 해야 넘어가는 스타일인 모양이고, 본인 말대로라면 금방 포기하게 될 테니까.
이 제안을 들었을 때 손채영의 반응이야 뻔했다.
그 표정, 말투, 목소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마치 귓전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
‘이송하가 주인공인데, 나보고 뭘 하라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