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63)
탑 매니지먼트 264화
어쨌든 정선우니까 (3)
스노우폴. 스노우폴.
스피커를 타고 엘제이의 쫀득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넋을 놓고 한참이나 듣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송하야, 잠깐만.”
“······!”
컨트롤룸 소파.
턱을 괸 채로 가사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송하가 벌떡 일어났다.
단숨에 내 쪽으로 다가온 이송하가 속삭이듯 물었다.
“오빠,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잠깐만 나와볼래? 할 얘기가 있어서.”
녹음에 방해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 컨트롤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담요를 덮어쓴 이송하를 슥 살펴봤다.
“넌 녹음 끝난 거야, 기다리는 중인 거야?”
“아까 끝났는데 마음에 안들어서요. 엘제이 언니가 마지막이니까 좀 기다렸다가 재녹음하려고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저 뭐 급하게 스케줄 잡힌 거 있어요?”
“아니. 네 차기작 때문에.”
이송하의 눈빛이 확 진지해졌다.
여전히 좀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무당이라고, 회사에서 준비 중인 드라만데. 네가 주인공을 하면 좋을 것 같거든. 기획안하고 대본은 서정이한테 너희 숙소로 보내놓으라고 했으니까 들어가서 검토해 봐. 이 얘기하려고 왔어.”
이송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 재밌을 것 같아요.”
“제목만 듣고?”
“팀장님이 고른 거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재밌을 거라고.
나보다 더 확신하는 듯한 눈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대본 보고 연락해. 녹음 잘하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무리 안 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거지. 그래도 언니들은 못 따라가지만.”
웃으며 말한 이송하가 다시 컨트롤룸으로 들어갔다.
나도 닫힌 문에 기대선 채로 잠시 안에 머물렀다.
“방금 좋다. 한 번만 더 해보자.”
“······.”
“너무 좋은데. 이거 킵하고, 한 번만 더 해보자. 핫초콜릿인데 코냑이나 럼주 들어간 것 같은 느낌으로.”
엔지니어 곁에 앉은 이태희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 번만 더’를 주문했다. 디렉팅대로 다시 녹음이 이어진다. 중독성 강한 후렴구 가사가 귓속에 쑤셔 박혔다.
몇 번이나 생각한 거지만.
······노래가 너무 좋지 않나?
엘제이의 녹음이 멈춘 틈을 타서 이태희에게 다가갔다.
“태희야, 우리 이거 뮤비 찍자.”
“갑자기요?”
“음원만 남기기엔 아까워서.”
어차피 렛잇스노우가 개봉하면 영화 편집본에 사운드트랙을 입힌 영상들이 나오겠지만, 그걸로는 뭔가 아쉬웠다.
영화 주인공이 아니라 넵튠이 등장하는 뮤비를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회사 예산은 넵튠 앨범에다 쏟아부어야 하니까 안되고.
남의 돈으로 찍어야지.
녹음실을 나가면서 곧바로 월드아트 픽처스 심부장에게 전화했다.
다음 일정까지 한 시간 반.
잠깐 들렀다 갈 시간은 되겠는데.
“뮤직비디오요?”
심부장은 월드아트 픽처스 건물 맞은편 카페에 있었다.
혼자, 고독을 씹으면서.
“국내 프로모션을 넵튠 곡 위주로 하실 거면, 다른데 마케팅 비용 쓰느니 뮤직비디오를 하나 찍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음원보단 영상 콘텐츠가 파급력이 더 크니까요.”
“그건 그렇죠. 제가 회사 들어가서 마케팅 쪽이랑 논의해 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오늘 녹음이라고요? 렛잇스노우 사운드트랙 프로듀서가 한국에 올 수도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쪽이 일정이 안 맞는 모양이더라고요. 태희하고 통화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진행했습니다.”
심부장이 찻잔에 홍차를 따르며 말했다.
“저번에 가이드 버전 들은 이후로 노래가 계속 귓전에서 돌아요. 제가 하도 중얼거리니까 집에서 애까지 배웠더라고요. 스노우폴, 스노우폴, 그게 자꾸 생각나서 시험을 망쳤다나?”
그가 소리 내 웃었다.
“어쨌든 렛잇스노우 잘돼서 연말 연초엔 좀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요즘 회사 분위기도 영 우울해서······ 오늘 홍길동전이 영화관에서 내려갔거든요.”
전국민의 조롱 속에서 이만큼 버틴 것도 대단했다.
“너무 요란하게 망하는 바람에 별 얘기가 다 나왔잖아요. 회사 손실액이 어마어마할 거다, 적자 전환하는 거 아니냐. 다들 홍길동전이 관짝에 못질하고 이미 49재까지 지낸 줄 아는데, 사실 그 정돈 아니에요.”
아니라고?
“정팀장님 덕분에 첫날에 백만이 들어서 산소호흡기 달았거든요. 지금도 빈사 상태긴 한데. 그래도 죽진 않았어요.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뭘요.”
축하한다고 하기도 그렇고. 다행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는데, 심부장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그런데. 소금 말이에요. 그쪽은 분위기가 아슬아슬한 모양이에요. 감독이랑 파인 엔터 양쪽에서 정팀장님 이름이 계속 나온다네요.”
“제 이름이요?”
“블랙리스튼지 뭔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뭐 그러면서요.”
“······.”
블랙리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놓으면서,
심부장이 눈을 반짝였다.
*
월드아트 픽처스를 나와서 곧장 IBC 방송사로 향했다.
약속 시간이 코앞이었다.
“정팀장님, 조심하세요. 오늘 국장님 분위기 살벌해요. 아까도 외주제작사 대표가 기획안 들고 왔다가 얼마나 까이고 갔는지······.”
“정팀장?”
국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왔다.
“아이고, 그새 왜 이렇게 말랐어요? 일도 좀 쉬엄쉬엄해야지,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얼른 들어와요. 야, 너 밑에 가서 커피 좀 사 와라.”
“어······ 네.”
기밀정보 제공하듯 국장의 컨디션을 알려주던 피디가 주춤주춤 멀어졌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오랜만에 다시 찾은 IBC 드라마국은 지난번과는 달랐다.
힐끔거리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우스갯거리라도 보는 양 시시덕대거나 저열한 흥미를 보이는 사람은 싹 사라졌다. 적어도 내 눈앞에선,
국장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안색이 좋아지셨네요.”
“나? 이거 다 약빨이예요. 지금 우리 수목 시청률 얼만 줄 알아요?”
3프로였나?
처참하던데.
“2프로예요, 2프로.”
“아.”
그새 더 떨어졌네.
“내가 요즘 회의를 못 들어가요, 쪽팔려서. 지상파 3사 꼴찌. 케이블하고 종편 다 합쳐서 동 시간대 5등. 약이라도 안 먹으면 뱃속에서 천불이 나서 살 수가 없어.”
한 손을 쫙 펴고 5등을 강조한 국장이 슬쩍 내 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러니까 속 태우지 말고 얼른 꺼내봐요. 작품만 좋으면 닥터 25시 빠진 자리, 그거 당장 줄게.”
“어떻게 그 자리가 아직도 비어있어요?”
사실 연락하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는데.
가방에서 준비해 온 서류 봉투를 꺼냈다. 내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국장이 빼앗듯이 봉투를 받아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첫사랑입니다의 기획안과 1, 2부 대본을 꺼냈다.
“제작사 미팅을 밥 먹듯이 하고 기획안도 눈알 빠지도록 봤는데, 없어요. 마음에 차는 게 하나도 없어. 이젠 진짜 발등에 불 떨어져서 뭐라도 갖다 박아야 할 판이었는데, 딱 정팀장님한테 전화가 왔네?”
“제가 타이밍이 좋았네요.”
“보자······ 첫사랑입니다, 제목 좋고.”
찬찬히 페이지가 넘어간다.
내가 프랜차이즈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국장은 진지하게 기획안을 검토했다. 실망하거나 탐탁잖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윽고 그가 기획안을 덮고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자, 내가 정팀장한테 궁금한 게 많아요. 정말 많은데,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게 잘될 것 같아요?”
“네.”
“오케이. 우리랑 합시다.”
지나치게 시원했다.
“······대본도 안 보시고요?”
“기획안에 캐릭터, 플롯, 다 있잖아요. 황금주 작가님이 설마 기획안으로 사기를 치진 않으셨겠지. 옛날엔 줄거리 적은 메모 한 장으로 편성 받으셨던 분인데.”
그가 기획안과 건드리지도 않은 대본을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그리고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
“뭣보다, 내가 무조건 한번은 정팀장 선택을 따라가 보고 싶어졌거든요. 그거······.”
“네?”
“아니. 내가 도박사의 심정으로 정팀장한테 칩을 한번 걸어 보고 싶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이거 지금 제작은 어떤 상황이에요?”
“······곧 촬영 들어갈 겁니다. 세븐클로버 스튜디오하고 W&U 공동제작이고요. 사실 저희 쪽 투자금에 PPL, 방영료하고 뭐 이것저것 하면 제작비는 문제가 아닌데, 당장 편성이 좀 애매하네요.”
“공동제작에 투자······.”
다시 국장이 내 쪽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팔이 부딪칠 정도였다.
“방송사엔 방영권만 팔고 작품 IP는 쥐고 있겠다? 투자 꽤 했겠네요? 정말 잘될 것 같은가 봐요, 드라마가.”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곰 발바닥 같은 두툼한 손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뭐, 이번엔 그렇게 합시다. 드물긴 하지만 없었던 일도 아니고. 당장 우리도 재고 따지고 할 여유가 없으니까.”
“그럼 세븐클로버 쪽에도 그렇게 얘기해 놓겠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정팀장이 새로 마음에 드는 작품 있으면 언제든 가져와요. W&U랑 우리랑 스케일 큰 거 하나 하면 좋잖아. 제작비 좀 쎄게 불러도 괜찮아요. 우리도 나름 돈 많아요.”
그래?
바로 가방을 열어 다른 서류 봉투를 꺼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응?”
“이게 방금 말씀하신 그런 작품인데······.”
무당에 대한 설명을 짧게 마쳤을 즈음.
국장은 부리부리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까지 쩍 벌리고 있었다.
“400억?”
“네.”
그의 엉덩이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
“피디님, 채영씨 왔어요.”
원장의 말에 신수연 피디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채영이 다니는 샵에서 값비싼 모발 영양클리닉과 두피 케어를 받고 있었다. 찐득찐득한 제품을 바른 머리카락이 가운 위로 늘어졌다.
손채영은 막 선글라스를 벗는 중이었다.
한 손엔 핸드백과 두꺼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곧 그녀가 원장과 함께 VIP룸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신수연 피디는 홀린 것처럼 멈춰 있었다.
“채영씨, 근데 누가 자기 찾는데. 오래 기다리셨어.”
원장이 말을 꺼내고 나서야 신수연 피디가 정신을 차렸다.
손채영이 눈썹을 찌푸렸다.
“나 찾는 사람이 한둘이에요? 난 사전에 약속 안 된 사람하곤 안 만나요. 볼일 있으면 회사로 연락하라고 해요. 그리고 여기가 언제부터 나 기다리는 장소가 됐어요? 원장님, 나 샵 옮겨요?”
“아니, 이상한 사람이면 안 들여보냈지. 드라마 피디님이야. 자기랑 같은 회사던데?”
“피디 누구요?”
신수연 피디가 재빨리 다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채영씨. 신수연이에요.”
손채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VIP룸에 마주 앉아 능숙하게 영업 멘트를 늘어놓는 동안에도, 신수연 피디는 몇 번이나 감탄했다.
손채영이었다.
연예인들의 연예인. 가끔 작품홍보 목적으로 나올 때를 제외하곤 예능 출연도 안 하고 대외 활동도 극히 드문, 작품이나 CF로만 얼굴을 볼 수 있는 이 시대에 몇 안 남은 신비주의 연예인.
그 때문인지, 영화와 드라마 판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는 편인데도 그녀는 어딘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다리를 비딱하게 꼬고 앉은 손채영이 말했다.
“표영호 감독님도 연락하셨었는데.”
“저희 부장님이요?”
“이번에 들어가는 신작, 꼭 저랑 같이 하고 싶으시다고요. 두 분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시잖아요. 서로 대화를 안 하시나 봐요?”
“채영씨, 표부장님보다 제가 더 실력 좋아요.”
신수연 피디가 아무렇지 않게 부장을 깎아내렸다.
“표부장님은 현장 뛰신 지도 좀 되셨고 연세도 있으셔서.”
“그래요?”
“그럼요. 아시잖아요. 똑같은 씬을 찍어도 세련되게 뽑느냐, 진부하게 뽑느냐, 이게 감독 감각에 달린 거거든요.”
느긋하게 찻잔 손잡이를 문지르던 손채영이 말했다.
“근데 저한테 가져오신 작품이 이거예요? 피디님도 W&U와서 첫 작품인데, 좀 안전하게 가는 게 낫지 않아요?”
“정선우 팀장님이 추천하셔서요.”
손채영이 멈칫했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를요?”
“이 작품을, 아니, 물론 손채영씨도 추천하셨죠. 배역에 잘 어울릴 거라고.”
손채영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발끝이 허공에서 까딱까딱 움직였다. 어딘가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정팀장님이 저한테 가보라고 했어요? 본인도 같이 와서 얘기하지 왜 감독님만 보냈대요?”
“사실 제가 손채영씨 담당실장님한테 먼저 제안했다가 까였거든요. 근데 정팀장님이 대놓고 접촉하면, 이게 월권행위 같은 걸로 비칠 수가 있잖아요? 아무래도 같은 회사니까······.”
“뭐 자기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다시금 코웃음을 친 손채영이 무당의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예요? 제목이 무당이니까, 무당인가?”
“무당은 무당인데, 주인공은 아니고요.”
손채영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뭐라고요?”
“악역인데, 주인공만큼이나 임팩트가 큰 역할이거든요. 캐릭,”
“악역?”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손채영이 대본을 덮었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 툭 던지듯이 내려놨다.
“지금 저한테 드라마 조연 롤을 가져오신 거예요?”
“아뇨, 당연히 주연급이죠. 멀티캐스팅. 남자주인공까지 거의 쓰리톱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영화 같은 경우는 오히려 주인공보다 악역에 더 존재감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도 많고.”
신수연 피디가 절절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채영씨, 속는 셈 치고 1부 대본만 봐줘요. 내가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뻔히 알면서 이렇게 찾아와서 부탁하는 이유, 대본 보면 아실 거예요. 이 역할 하시면 절대 후회 안,”
“이거 주인공이 누군데요?”
숨 막히는 침묵 끝에 대답이 나왔다.
“이송하씨랑 서지준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채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히 우스운 얘기라도 들은 양, 박장대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샵의 원장과 직원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들여다볼 정도였다.
한참을 웃은 손채영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오랜만에 웃었네.”
그녀가 신수연 피디를 바라봤다.
“이송하가 주인공인데 나보고 뭘 하라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