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264)
탑 매니지먼트 265화
어쨌든 정선우니까 (4)
“나 3회 다 봤어! 4회! 4회 대본 어딨어?”
임서영이 쌓인 대본들을 들추며 부산을 떨었다.
이태희는 소파에 늘어져서, 엘제이와 이송하는 푹신한 러그 위에서, 각자 과자봉지를 하나씩 끼고 대본을 보는 중이었다.
“태희 언니 몇 편이야?”
“5부.”
“엘제이, 너는?”
“기다려.”
엘제이가 심드렁히 말했다. 그 손에 들린 4회 대본을 확인한 임서영이 초조한 얼굴로 엘제이의 등을 덮쳤다.
“빨리 봐, 빨리 봐.”
“아, 기다리라고!”
난장판에서 눈을 떼고 이송하에게 다가갔다.
이송하는 막 16부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중이었다.
“저 이거 할게요.”
“결정했어?”
“네. 대본 재밌어요. 언니들도 다 재밌대요.”
들었는지, 엘제이와 엎치락뒤치락하던 임서영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엄지를 세워 의견을 피력했다.
이송하가 계속 말했다.
“주인공이 마음에 들어요. 연기하는 것도 되게 재밌을 것 같고. 작가님하고 피디님한테 전해주세요. 제가 꼭 하고 싶다고. 아니, 지금 전화해서 얘기할까요?”
“진정해. 이거 네가 할 거니까, 가서 잠이나 좀 자. 눈 빨갛다.”
“잠이 안 와요.”
대본을 손에 쥐고, 이송하가 은은하게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빨리 찍고 싶다. 저 이거,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송하가 출연을 결정한 후.
해외 스케줄을 마치고 귀국한 서지준도 긍정적인 대답을 보내왔다.
주인공 둘의 윤곽이 잡힌 셈이었다.
그 이튿날에는 플랜플러스에서 미팅을 원한다는 연락이 왔다.
권피디가 그쪽 심사팀과 접촉하자마자 반응이 왔으니, 나쁜 신호는 아니었다.
신수연 피디와 콘텐츠 팀 직원들의 분위기는 연일 화창했다. 전신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사람 특유의 설렘과 열의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미팅 당일.
자기를 플랜플러스의 국내 총괄 디렉터라고 소개한 남자가 말했다.
“제작비를 최소 400억 정도로 생각 중이라고 하셨죠? 사업계획서 검토 후에 제작비 규모 산정에 문제가 없다면, 저희가 400억에 플러스알파까지 전액 투자하고 싶습니다.”
“······!”
“물론 작품 IP는 저희가 백프로 보유하는 조건이고요.”
나와 신수연 피디를 번갈아 보며, 디렉터가 생글생글 웃었다.
*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제작실장이 물었다.
“플랜플러스에서 까였어요? 까이고 오신 얼굴인데?”
신수연 피디가 이맛살을 구겼다.
회의실에 다시 둘러앉은 후에야 권피디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쪽에선 되게 적극적이었어요. 제작비 전액 투자하겠대.”
“전액이요?”
“네. 대신 IP 전매. 콘텐츠의 모든 권리는 플랜플러스에 귀속되는 조건으로요. 우린 제작비의 일정 퍼센트를 대가로 받고, 드라마 만들어서 납품하면 끝.”
“무슨 하청도 아니고.”
심기가 꽤 상했는지, 신수연 피디의 목소리가 까칠까칠했다.
“개고생해서 만든 작품 대박 나도, 내 손엔 추가 수익이고 인센티브고 한 푼도 안 들어온단 얘기잖아. 이거 완전 양아치들 아냐?”
“······.”
권피디와 제작실장이 신수연 피디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아니, 여태 지상파랑 케이블 방송사에서 쭉 일하셨던 피디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외주제작사에서 일하던 저희 같은 하청업자 입장에선 참 아이러니해서요.”
“양아치 짓으로 따지면 방송사가 제일이죠. 권리는 싸그리 가져가고 돈은 찔끔찔끔 주고.”
“제가 피디님이랑 작품 할 때, GTBN에서 제작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아등바등했던 거 생각하면, 와, 갑자기 눈물이 나네.”
신수연 피디가 입을 들썩거리다 말했다.
“······그래. 세상에 양아치들이 너무 많다.”
“뭐, 유럽 쪽엔 3년인가? 플랫폼 IP 독점 기간이 법적으로 제한된 나라도 있던데. 우린 그런 게 없어서요.”
권피디가 내 쪽을 돌아봤다.
“전 플랜플러스 제안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제작비 많이 퍼주고 리스크 감수하는 대신, 작품 잘되면 달달한 과실도 다 가져가겠다는 건데. W&U는 콘텐츠 제작 쪽으론 이제 막 첫발을 뗀 상황이니까 위험부담 없이 400억짜리 드라마 하나 대표작에 넣는다고 생각하면······.”
“일단은 좀 더 알아볼까요?”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말했다.
“급하게 결정할 필요 없으니까. 우리 쪽에서 제작비를 일정 부분 끌어오고, 사업권이나 수익 배분에 대한 권리도 나눠 갖는 방향이 베스트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가면, 비율 협상이 중요하겠네요.”
“선택지가 플랜플러스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조건을 좀 비교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스튜디오 로건이나 BP하우스 쪽도 접촉해 볼게요. BP하우스는 후발 주자인 데다 경쟁사들도 만만찮으니까,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리고 우리가 끌어와야 할 제작비는······.
입술 언저리를 문지르며 고민했다.
사실 조금만 기다리면 첫사랑입니다가 방영될 테고.
그러면······.
“아, 손채영 씨한테 다시 연락해 봐야겠다.”
신수연 피디가 불쑥 말했다.
“이송하, 서지준, 여기다가 손채영 이름까지 딱 올라오면 라인업 끝내줄 텐데. 패키징이 좋으면 뭐든 협상하기도 쉽고.”
아직도 포기를 안 했나?
“피디님. 한번 말해보고 안 되면 바로 포기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랬죠. 근데.”
신수연 피디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
“손채영이 이거 할 것 같아요.”
“······?”
머리에 전원이 꺼졌다가 재부팅됐다.
“누가요?”
“손채영이요.”
“뭘 해요?”
“이거요. 무당. 우리 드라마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권피디가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요? 말도 안 돼, 뭐라는데요? 계약 얘기까지 꺼내셨어요?”
“그 정돈 아니고. 아직은 설득하는 과정이긴 한데, 얘기하다 보면 삘이 오잖아. 반응이 괜찮아. 대본도 벌써 16부까지 받아 갔어. 관심 없으면 그걸 다 보겠어?”
“손채영까지 한다고 하면 진짜 대박인데. 저도 같이 가서 설득해 볼까요? 피디님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겠어요?”
“아냐, 부담스럽게 하지 말고 좀 기다려 봐. 내가 전화······ 아, 통화 중이네.”
“피디님.”
겨우 정신을 차리고 끼어들었다.
“손채영 씨한테 악역 롤 제안하신 거 맞아요? 주인공인 줄 아는 거 아니고?”
“당연히 제대로 설명했죠. 그걸 숨겼다가 사달 낼 일 있어요?”
“주인공이 이송하인 것도 알고요?”
“네. 듣자마자 엄청 웃던데요?”
웃었다고? 손채영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송하가 끔찍할 정도로 싫다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오던 사람인데. 절대 이런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나?
이송하가 잘되는 꼴 보기 싫어서 깽판이라도 칠 생각이라거나.
설마설마 싶으면서도, 손채영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일단 일어났다.
손채영을 만나야겠다. 당장.
차 키를 챙기려고 막 팀장실로 돌아갔을 때.
“야!”
조병환이 문을 들이박기라도 한 것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 뒤로 핸드폰을 귓가에 딱 붙인,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손채영의 로드매니저가 따라 들어온다. 문 뒤에는 홍보팀 박팀장까지 눈썹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너 채영이한테 뭐랬어? 뭐라고 구슬렸길래 얘가 갑자기 너랑 새 작품을 하네마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조병환이 볼썽사나운 얼굴로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좀 전까지 같이 회의했던 신수연 피디와 콘텐츠 팀 직원들도 다가왔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을 보니, 느닷없이 욕을 처먹은 와중에도 헛웃음이 났다.
“웃어? 야, 너 눈에 뵈는 게 없냐?”
“조실장님. 제가 저번에도 이 얘길 했던 것 같은데.”
일단은.
“남의 사무실에선 조용히 좀 하시라고.”
“이 새끼가 진짜!”
“조병환 실장님!”
박팀장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진정 좀 하고, 손채영 붙잡고 정확한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순서죠, 득달같이 선우씨한테 와서 이럴 게 아니라!”
“채영이가 지 용건만 말하고 뚝 끊었다니까요? 그러곤 전화도 안 받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붙잡고 얘기하든가 말든가 하죠!”
조병환이 뒤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로드매니저를 손가락질했다. 로드는 거의 울면서 뛰쳐나가기 직전처럼 보였다.
“그리고 상황 물어볼 것도 없어, 이 새끼가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채영이 가지고 수작 부리는 거라니까요? 아니, 이 새끼가 저번에 대놓고 나한테 회사 나가라고까지 했다고!”
들으라고 떠든 말에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박팀장마저도.
“야, 왜 꿀 먹은 벙어리야? 그땐 뭐 지가 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나가라마라 떠들더니?”
“······그랬죠, 내가.”
“거봐요, 박팀장님. 이 새끼가 나를!”
“너무 바빠서 잊어먹고 있었네.”
“뭐?”
“조실장님은 한가해서 머릿속에 제 생각밖에 없나 본데,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불쌍한 로드매니저 대신 운전대 잡고 손채영씨나 좀 따라다니지 그래요. 그럼 자기 배우 잃어버리고 다니진 않겠지.”
“너, 너 이······!”
욕설과 동시에 휘청거리는 손이 날아와 내 멱살을 붙들었다.
목을 빼고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울렸다. 순식간에 달려든 몇 명이 조병환을 붙잡아 나한테서 뜯어냈다.
“조실장님, 여기 회사예요! 왜 이래, 진짜?!”
박팀장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선우씨, 자긴 괜찮아?”
“······괜찮아요.”
셔츠 옷깃을 대충 정리했다. 내가 지금까지 사내에서 일하다가 얻어맞은 유일한 직원이었는데, 거기에 또 한 줄 더 추가하게 생겼네. 아주 W&U 역사를 새로 쓰는구만.
“일단 선우씨도 진정하고······.”
“제가 뭐 회사에서 사람이라도 칠까봐요? 깡패도 아니고.”
씨근덕거리고 있는 조병환 실장을 돌아봤다.
“조실장님 생각보다 되게 다혈질이네요. 보는 사람도 많은데 좀 참으세요. 회사에서도 이러면, 안 보이는 데선 자기 배우한테도 손찌검할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
아차 싶었는지, 조실장이 얼른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둘러봤다.
무시하고 핸드폰을 들어 손채영한테 전화를 걸었다. 당사자의 설명이 필요했다. 안 받으면 손채영 집으로 가면서 계속 걸 생각이었는데, 금방 신호가 멈췄다.
-왜요?
“손채영씨, 어디예요?”
조병환이 내 쪽을 홱 돌아봤다.
“우리 얘기 좀 해야겠는데요.”
-발레 레슨 중인데. 주소 보낼게요.
목이 졸린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조병환을 보고 덧붙였다.
“아, 그리고 여기 조실장님이 와서 손채영씨가 연락이 안 된다고······.”
뚝, 그걸로 끝이었다.
끊어진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고 차 키를 챙겼다.
“그럼 저는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갑니다. 조실장님은 뭐, 분노 조절이 계속 안 되면 제 사무실이라도 때려 부수든지 하세요. 다 끝나면 청소는 하고 가시고.”
“······야! 놔 봐, 야, 이 개새끼야!”
사람들한테 잡혀서 허우적거리는 조병환을 뒤로하고 회사를 나왔다.
손채영에게서 받은 스튜디오 주소를 찍고 곧장 차를 몰았다.
흐늘흐늘한 발레용 스커트 위에 져지를 걸친 손채영이 주차장 입구에 서 있었다. 얼굴도 팔릴 만큼 팔린 사람이. 이미 근처에서 서성대는 구경꾼이 한둘이 아니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익숙하게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내 얼굴을 뜯어본다.
“안전벨트 매요.”
“회사에서 맞았다면서요?”
“······조실장이 그래요?”
“아니, 신수연 피디님이 그러던데요. 좀 전에 회사에서 치고받고 난리 났었다고. 진짜 싸웠어요? 누가 먼저 때렸어요?”
“치고받고 안 했고, 전 사람 먼저 안 칩니다.”
내일쯤이면 누구 한 명 구급차에 실려 갔고 고소장까지 접수했다는 소문이 돌겠는데.
“아, 먼저 정당방위를 확보하는 편이구나?”
손채영이 안전벨트를 매며 픽 웃었다.
“박팀장님 스타일이네. 홍보팀에서 맨날 그러잖아요. 밖에서 사람 치지 말고, 쳐야겠으면 한 대 맞고 쳐라. 그래야 회사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정작 난 사람 칠 생각은 딱히 없는데.”
일단 주차장을 빠져나가 회사 쪽으로 운전했다.
느긋하게 다리를 꼰 손채영이 덧붙였다.
“아, 이송하한테나 말해놔요. 걘 사람 막 치잖아.”
“조실장님한텐 뭐라고 했길래 저 난리예요? 손채영씨가 작품을 하네마네 하던데.”
“신수연 피디님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손채영이 들고 있는 에코백에서 무당 대본을 꺼냈다.
“나 이 작품 할까, 생각 중인데.”
“왜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송하 때문에?”
“뭐,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기도 하고. 걔 때문이기도 하고.”
차갑게 흥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짧게 숨을 뱉고 말했다.
“손채영씨. 일부러 소란 피울 생각으로 이러는 거면 그만 해요. 이거 나한테 아주 중요한 작품이니까, 망치지 말라고요. 정말 진지하게 하는 말이에요.”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이 작품에 인생이라도 걸었어요?”
“비슷합니다.”
절대 내 손으론 망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는.
손채영이 내 쪽을 바라봤다.
“왜, 난 안 진지해 보이나 봐요?”
“네.”
“정말 사람 보는 눈 별로라니까. 난 일에 한해서는 너무 진지해서 문제인 사람인데.”
빈정거리듯 코끝으로 웃더니,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건다.
스피커폰을 눌렀는지 단조로운 통화음이 차 안을 울렸다.
조병환 실장인가? 아니면 신수연 피디?
한참 연결되기를 기다리던 손채영이 갑자기 전화를 끊고 문자를 하나 보냈다. 다음 순간, 곧바로 손채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반응 빠르네.”
다시 코웃음을 친 손채영이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누구세요.
서늘하게 깔린 목소리였다. 듣자마자 알았다.
이송하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