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Management RAW novel - Chapter (78)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 임서영의 동그란 이마가 문짝 대신 내 손바닥을 들이받고 퉁겨졌다. 그리고 붙잡을 새도 없이 맨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임서영의 얼굴이 서러워 죽겠다는 것처럼 구겨진다.
내심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멀쩡한 머리통은 왜 괴롭혀, 스튜디오 말고 응급실로 가려고?”
“아으니요오. 으으응.”
그래도 녹화는 해야겠던지 비척비척 일어난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듯, 입을 앙다물고 발그레한 코를 훌쩍거리면서.
기회가 오기만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막상 닥치니 덜컥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왔나 보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강박.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 그리고 믿고 있을 동료들에게 실망을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삽질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주변에서 소녀 가장, 소녀 가장 했다고 네가 진짜 소녀 가장인 줄 알아? 실장님이나, 다른 애들이나, 네가 방송분량 못 뽑는다고 실망할 사람 아무도 없어. 오히려 너 이런 생각하고 있는 줄 알면 난리 날 걸.”
애 멘탈이 곤죽이 된 것 같아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나가는 예능마다 휩쓸고 다니면 천재게? 이번에는 공중파 예능에 출사표나 던지려고 나왔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솔직히, 오늘 사고를 쳐도 내가 치겠지, 네가 치겠냐.”
임서영이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빠,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연예인도 아닌데. 처음 녹화하는 건데 겁 안 나요?”
“멀쩡해 보여?”
“네. 완전 멀쩡해 보여요.”
“안 멀쩡해. 사실 어제부터 뇌가 반만 돌아가는 중이야. 청심환이라도 먹을 걸 그랬나 후회 중인데.”
한숨을 푹 쉬며 말했더니, 임서영이 웃는듯한 눈으로 대꾸했다.
“사실 저는 몰래 청심환 먹었어요.”
“혼자 먹었어? 좋은 거 있으면 좀 나눠 먹지 그랬냐.”
“전 오빠는 말짱한 줄 알았죠!”
임서영이 내 팔뚝을 찰싹 두드린다.
“있어봐요, 하나 더 있어요. 내가 또 혹시 몰라서 챙겨왔지.”
그러더니 자기 가방에서 정말 청심환을 하나 꺼내온다. 어이가 없어 웃었더니, 포장까지 까서 척 내민다. 어쨌든 사양하지 않고 잘 씹어 삼켰다.
“고맙다. 이제 약빨로 어떻게든 해보자.”
“저기요, 오빠. 혹시, 혹시 해서 그런데.”
“어, 말해.”
“오늘 잘 될 거라고 한마디만 해줘요. 으음, 오빠가 잘될 거라고 해서 송하 드라마도 잘됐고, 태희 언니 곡도 잘됐고. 저는 그런 거 잘 믿는단 말이에요. 복뱀 꼬리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 그….”
“그래, 잘 될 거야.”
미래는 못 봤지만.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말했다.
임서영이 속눈썹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헤벌쭉 웃는다.
“야, 너 울다가 웃으면…….”
말하다가 뚝 멈췄다. 음, 다 큰 여자애한테 할 말은 아니지.
“저 운 거 티 나요?”
“어.”
“으아아, 어떡하죠? 티 나면 안 되는데? 뭐라고 그러지?”
“개인기 연습하다가 문에 머리 박고 엎어져서 운 걸로 하자.”
“그게 뭐예요, 너무 멍청이 같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네 입으로 똥멍청이라면서.”
웃으며 말했더니 임서영이 뭐라고 재잘거리면서 내 팔뚝을 찰싹찰싹 때린다. 부담이 다 덜어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눈물은 쏙 들어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진짜로. 우는 걸 달래는 건 앞으로도 익숙해지진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손끝에 얇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심결에 네쌍둥이들한테 하던 버릇이 나왔는지 내 손이 임서영 머리 위에 올라가 있다.
“아, 미안. 우리 집 애들이 생각나서.”
“왜요? 뭐가요? 왜 미안하세요? 괜찮은데?”
“여자들은 머리 쓰다듬는 거 싫어하잖아.”
“아닌데요. 전 좋은데요.”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숙인다. 눈은 어느새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치웠던 손을 다시 작은 머리 위에 얹었다.
청심환의 효과인지, 아니면 애니멀테라피 덕분인지.
나도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대기실을 나가자마자 김현조와 넵튠 애들과 맞닥뜨렸다. 기다리지 못하고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애들 사이에 섞인 임서영은 언제 땅을 파고 들어갔었냐는 듯, 문에 머리를 박고 너무 아파서 울었다고 능청스러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무도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괜찮겠어?’ 김현조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스튜디오 세트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
AM. 10:35. 널찍한 VIP 분장실.
각지고 딱딱한 인상의 윤 피디. 그리고 공중파 예능에서 잔뼈가 굵은, 메인경력 10년의 박 작가. 두 사람이 방송 큐카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롤을 설명했다.
“그리고 넵튠에는 임서영이라는 친구가 예능을 몇 번 했대요. 그러니까 멘트 넘기실 때는 사고 안 나게 그 친구 위주로 해 주시면 좋을 것 같고….”
“몇 번 줘보고 못 받아먹으면 난 걔들한테 말 안 시킨다?”
2MC 중 한 명. IBC 공채 개그맨 출신이자, 까칠한 캐릭터로 유명한 박태평이 말했다. 느긋하게 에너지바를 먹고 있던 아나운서 출신의 MC, 홍석우가 대신 대꾸했다.
“신인이라잖아. 형은 싹 틔우기도 전에 밟아 죽일 생각부터 해?”
“줘보고 못하면 말이야, 못하면! 출연자도 많은데 멘트 하나 못 따먹는 애들을 가르치고 있냐, 그럼? 여기가 학교야? 그 정도도 안 되면 앞으론 교양프로 가서 대본 읽으라그래!”
“하여튼, 그러니까 후배들이 다 형을 어려워하지.”
“나도 잘하는 놈은 아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 작가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알았어요, 알았고, 연예인들은 그렇다 치고 매니저들은 좀 신경 써주세요. 그 사람들은 일반인이잖아.”
윤 피디도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맞아요. 우리도 방송용으로 고른다고 골랐는데, 아시잖아요. 일반인들 카메라 앞에 세워놓으면 암만 입담 좋은 사람도 제 실력 다 발휘 못 하는 거. 선배들이 안 살려주면 우리 방송 망해요.”
“살리는 건 의사한테 살려달라 그래. 뭐, 괜찮은 사람은 좀 있어?”
박태평의 대꾸에 윤 피디가 입술을 핥았다.
“이현종 매니저가 방송을 몇 번 타서 감은 좀 있어요. 장녹수 매니저도 개그맨 지망했었던 친구고. 그리고 넵튠 매니저는 이송하랑 엮어서 사연이 좀 있는 친구라, 눈여겨보고 있구요.”
“어휴, 연예인들이야 뭐 허구한 날 보던 그림 또 보는 거고. 다른 방송사 설 특집들 꺾으려면 매니저 중에서 물건이 나와야 되는데.”
혀를 끌끌 차며, 박태평이 매니저들의 프로필을 들춰봤다.
홍석우가 웃으며 덧붙였다.
“한번 잘 찾아보죠, 물건이 있나 없나.”
AM. 10:55. 녹화 10분 전.
조명이 한여름 뙤약볕처럼 쏟아지는 세트장.
가운데 MC석을 두고, 계단형 좌석이 날개처럼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한쪽에는 면면마다 화려한 연예인들이, 다른 쪽에는 가슴에 자기소개용 이름표를 붙인 매니저들이 하나둘씩 착석했다.
젊은 여 피디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매니저들 앞에서 설명했다.
“생방송 아니니까 말씀들 편안하게 하시구요. 마이크 차셔서 오디오 다 잡히니까 지방방송 안 됩니다. 그리고 작가님들이 스케치북에 지시사항 계속 적으시니까 틈틈이 곁눈질로 확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녹수의 매니저, 김동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전인터뷰 때처럼만 해주세요, 김 실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에 한우는 저랑 녹수가 가져갑니다.”
그는 여느 매니저들과는 표정부터 달랐다. 다른 매니저들이 긴장하는 티를 낼수록, 그의 얼굴에는 더욱 느긋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자신이 가장 돋보일 거라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피디가 세트장에서 내려가자 매니저들은 서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김동호는 하필이면 가장자리에 그를 안내한 피디를 욕하면서 옆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넵튠 매니저. 정선우.
김동호의 마음에 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단 그보다 키가 컸고, 그보다 뭔가 있어 보였으며, 그보다 큰 회사 소속이었으니까. 게다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넵튠 애들한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이 사람은 뭔데 이렇게 느긋해? 팀장급인가?
김동호는 내심 구시렁거리면서 말을 붙였다.
“저기, 안녕하세요. 옆자린데 리액션 좀 잘 부탁드려요.”
나는 안 할거지만, 하는 생각은 물론 속으로 삼켰다.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정선우가 마주 인사했다. 김동호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시청자 눈에 비호감으로 보일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호감형도 아니었는데. 목소리가 합쳐지니 호감형 쪽으로 저울추가 더 기울어진다.
“그쪽은 어쩌다 나오셨어요? 넵튠이면, 아, 신인들 키우시려고?”
“네. 그렇죠.”
“아이고, 신인 맡아서 고생하시네. 저는 이거 기획안 나오기도 전에 섭외됐어요. 제가 원래 개그맨 지망생이었거든요. 운이 안 따라줘서 매니저 일 하고 있지만, 지금도 꿈은 방송인 되는 거고.”
“그럼 오늘 녹화 걱정은 안 되시겠네요.”
“저한테 딱 맞는 프로죠, 뭐.”
거만하게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김동호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일한 게 6년 찬데 긴장할 거 뭐 있어요? 다른 분들도 연차 꽤 쌓이신 분들 같은데, 왜 저렇게 긴장들 하시나 모르겠네. 안 그래요?”
“저는 연차가 별로 안 돼서. 청심환 먹고 왔어요.”
“어,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연차 얼마나 되셨는데요?”
“4개월째예요.”
김동호가 눈을 껌뻑거렸다.
“아니, 넵튠 매니저 한 기간 말고, 전체요, 전체.”
“네. 일 시작한 지 4개월 됐습니다.”
“……아.”
김동호는 내심 견제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이건 그냥 병풍이었다.
*
열한 시. 마침내 큐사인이 떨어졌다.
수십 명의 스텝과 관계자들이 바글거리는 스튜디오에 정적이 쫙 깔렸다. 정면에 보이는 연예인들도, 그리고 내 주변에 앉은 매니저들도 표정이 달라졌다. 따끔따끔한 긴장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TV만 틀면 나오는 두 MC는 능숙하게 오프닝을 진행했다.
다행히 넵튠 애들은 크게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다. 임서영도 아직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아까보단 훨씬 상태가 좋고. MC들도 나쁘게 보지 않았는지 다른 연예인들보다 소개가 좀 길었다.
문제는 이쪽이다. 매니저들.
총체적 난국이란 딱, 이런 때 쓰라고 만든 말이지. MC들이 말을 시킬 때마다 몇 초씩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반 이상이 말을 더듬거나 헛소리를 했다. 피디들 편집할 때 사리 생기지 싶다.
MC들이 농담으로 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박태평은 몇 번이나 큐카드를 이쪽으로 던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피디와 작가들도 얼굴이 우중충해지고 있고.
덕분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매니저들이 너도나도 자폭하는 걸 보면서 내 마음은 오히려 굳건해졌다. 반면교사 효과랄까. 부모님이나 친척들도 이 방송을 볼 텐데, 어쩌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일지도 모르는데. 절대 저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자기소개도 문제없이 잘 넘긴 것 같다. 곁눈질했을 때 김현조의 표정이 좋았던 걸 보면.
출연자 소개와 가벼운 신변잡기가 끝난 후.
MC들이 매니저들 테이블에 장난감 같은 걸 하나씩 올려놓았다. 반원 형태, 한 손에 빠듯하게 들어오는 크기. 위에는 손가락 모양으로 얕게 홈이 파여있다.
이렇게 생긴 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MC들이 짓궂게 말했다.
“자, 지금부터 매니저분들은 그 기계 위에다가 손을 딱 붙입니다!”
“방송에서 보신 분들 있으실 텐데, 휴대용 거짓말 탐지기예요.”
거짓말 탐지기?
“지금부터 매니저분들 입에서는 사실만 나와야 하거든. 근데 매니저들이랑 연예인 사이가 워낙에 돈독해서, 또는 회사 사장님 눈치 보느라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준비한 소품이죠. 거짓말을 하면 기계에서 전기충격이 오니까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이거 중요하니까 강조합니다. 어쩔 수 없이 사실만 말하는 거예요!”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거짓말 탐지기 기계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놓았다.
워낙 비밀이라고 할만한 게 많아서 그런지, 이 작은 기계가 마치 폭탄처럼 느껴진다.
사실이라.
MC들이 뭘 물어보려나. 내가 미리 준비한 멘트들이야 거짓말이라고 할만한 건 없고. 그리고 거짓말 탐지기라고 해도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확실한 건 아닐 테니까, 장난삼아 하는 거 같긴 한데.
뭐…… 별일 없겠지?
[ 스타 매니저 (2) > 끝ⓒ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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