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100)
운빨로 탑스타-100화(100/200)
제100화
유규언 대표가 상의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감추고 몇십 분 뒤.
“정말요?!”
“네, 꼭 배우님께서 테르미누스의 얼굴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
이민기는 서울 패션 위크에 참가할 권리를 공식적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유규언 대표의 새 브랜드, 테르미누스 컬렉션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주저했던 모습을 보인 탓일까, 급격한 변심에 정가연 이사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마음이 변하셨나 봐요.”
“예, 이민기 배우님과 저희 테르미누스 브랜드의 지향점에서는 다소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오히려 그 부분이 매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 어중간한 말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말.
하지만 정가연 이사는 구체적인 이유 따위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디자이너 철학은 들어 봐야 귀만 아프지.’
원래 디자이너라는 사람들은 사고관이 남달라 이해하기가 어려울뿐더러, 하나같이 변덕이 심하기 때문.
또 결정적으로.
“그거 알아요? 전 두 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낙장불입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유 따지다가 섭외에 실패하느니,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나았다.
두 사람의 합의는 영 어중간했지만, 정작 정가연 이사는 웃음을 차마 참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민기다. 패션모델로 현장에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홍보 효과는 확실할 거야.’
사실, 처음에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이민기 본인이 패션 위크에 참가하고 싶을지가 첫 번째 난관이었다면, 그 두 번째 난관은 유규언 대표였다.
디자이너가 모델 선정을 깐깐하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자기 브랜드 색깔이 안 맞는 모델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가 흔하지.
유규언 대표는 더더욱 이쪽으로 까다로운 면이 있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찌 됐든 깨달았다.
이민기에게는 통상적인 배우들보다 더 밝은 아우라가 있었다.
전문 패션모델로서는 부족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살릴 수 있는 영역 또한 존재하겠지.
두 사람의 케미는 패션쇼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으리라.
“배우님.”
유규언 대표가 이민기를 향해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간 습관적으로 했던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살짝 다른 뉘앙스의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쇼핑몰의 대표로서 상업적인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 디자이너로서 철학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어 한 말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갭을 느낀 이민기가 힘차게 답했다.
“제가 할 말이네요.”
* * *
이민기의 테르미누스 컬렉션 참가가 결정되었다.
JC 측에서는 크게 반기는 눈치였다.
배우로서 패션 광고는 이미지에 어지간하면 도움이 될뿐더러, 서정우 이사가 주장한 바가 있으니.
하물며 황의성 감독의 촬영장에서도 그러했다.
“패션쇼에 참가한다. 이 말이군요.”
황의성 감독의 그리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리액션에 이민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품을 촬영하면서 늘 한 번쯤은 진짜 런웨이에도 올라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인풋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침 타이밍이 좋다.
[패션 앤 패션]에서는 주인공 [이종호]가 런웨이를 뛰는 장면이 몇 번이고 나온다.그 연기 경험을 실제 패션쇼에서도 살려볼 생각이었다.
물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촬영 가능한 스튜디오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실제 현장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제가 이만큼 패션에 진심입니다. 제가 늘 감독님에게 감사히 생각하고 있는 거 아시죠? 덕분에 이런 기회로도 이어지고요.”
이민기가 환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뭘 감사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황의성 감독은 그걸 또 상대 무안하게 무뚝뚝하게 쳐내는 듯했고.
그렇다.
쳐낸 게 아니라 쳐낸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감독님께서 뿌듯해하고 계신다고?’
연출 감독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아니, 들렸다.
조금 전 황의성 감독이 했던 말, 그걸 연출 감독의 필터를 덮어씌워서 보자면 내막은 이러했다.
“뭘 감사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
“(배우님이 자기 노력과 실력으로 스스로 얻은 성취인데 제게) 뭘 감사한다는 건지 (딱히 해준 게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고작 몇 마디 단어를 덧붙인 것 가지고 그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말주변이 짧을 뿐, 황의성 감독은 진심으로 이민기를 기특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오해가 아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쪽도 디테일에 대한 고집이 있군. 스스로 찾아가는 모습도 나쁘지 않아.’
황의성 감독은 이민기의 행동에 그를 한층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짧은 연기 지도조차도 번거로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아예 진짜 패션업계에서 종적을 남겨 보겠다는 것 아닌가.
촬영에 무조건 도움이 되겠지.
‘미래가 기대되는군.’
그는 이미 이민기를 반쯤 인정했다.
다만, 저것들을 전부 마음속으로만 내뱉어서 문제일 뿐.
“작품에서 보겠습니다.”
황의성 감독은 짧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저 문장의 내막을 해석하자면.
“(배우님의 노력의 결실을) 작품에서 (제가 온전히 녹여낼 수 있을지) 보겠습니다.”
이렇게 된다.
하지만 황의성 감독의 화법을 잘 모르는 현장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디 입을 나불거릴 만큼 잘하나 한번 보겠습니다.”
이렇게 들렸으며.
당사자인 이민기의 귀에는.
“(슬슬 촬영 재개하니) 작품에서 (디테일을) 보겠습니다.”
이런 말에 가까웠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 자! 그만 쉬고 일합시다!”
그렇게 힘찬 목소리와 함께 다시 시작된 촬영 현장.
오늘의 장면은 작중에서 썩 거대한 의미를 갖춘 장면이었다.
바로 [패션 앤 패션]의 주인공 [이종호]가 스토리에서 처음으로 런웨이에 서는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자기한테 모델로서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이종호]는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이다.워낙에 삶이 팍팍하다 보니, 돈을 버는 것 외에는 큰 관심도 없다.
꿈도 없고 취미랄 것도 없다.
하지만 런웨이에서 본격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고는, 모델로서 성공하며 그와 동시에 타락으로 향해가는 길에 서게 된다.
즉, 여기에서 이민기가 요구받는 디테일은 단 하나였다.
‘잘해야 한다.’
무조건 잘하는 것.
작중에서 [이종호]가 천재라는 게 선명하게 보일 만큼, 런웨이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일 것이었다.
물론, 쉽지 않겠지.
타고난 키가 모델치고는 다소 아쉬운 편이니까.
더군다나 경쟁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민기의 앞 차례를 준비하는 배우가 그러했다.
‘키 한번 엄청나게 크네.’
키 185cm짜리 배우가 스튜디오 구석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여자 기준으로도 작은 머리와 더불어 훤칠한 팔다리.
길거리에서 덩그러니 세워놓으면 저 사람 한 명만 눈에 띄겠지.
누가 보더라도 모델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
아니, 실제로 모델이기도 했다.
오늘의 런웨이 장면 촬영을 위해 섭외한 모델 말이다.
허수오.
현역 모델로서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 모델이었다.
허수오는 예명이 아닌 본명이다.
‘저 사람한테 안 묻히려면 어지간히 잘해야겠지.’
이민기가 작게 긴장을 느꼈다.
제아무리 카메라와 편집의 힘을 받는다고는 하나, 현장은 현장이다.
그렇게 이민기가 전의를 불태우는 한편, 허수오 또한 역으로 이민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봐줘야 하나?’
잘하리라는 기대 자체가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이민기라는 사람이 모델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쉬운 게 무엇인가.
결격 사항이 넘쳐났다.
‘흠, 저런 신체 조건으로 우리 업계에 오면, 어느 런웨이에 간들 옷걸이로도 못 쓸 텐데.’
객관적인 평가였다.
프로이기에 내릴 수 있는 평가.
비록 [패션 앤 패션]이 영화라고는 하나, 패션 영화에 모델로 참여한 게 이해가 안 될 수준이었다.
아니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이민기에게 작은 반감마저 가졌다.
‘아까 이야기를 듣자 하니까 서울 패션 위크에 참가한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다.
허수오는 배우라는 것들이 유명세를 무기 삼아 모델 업계에 기웃거리는 게 싫었다.
‘저런 사람들이 모델 업계 물을 흐리지. 자기가 하는 짓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뮤지컬 판에 아이돌들이 기웃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이돌들은 티케팅 파워를 한껏 발휘해 다 죽어가는 뮤지컬 시장에 새 팬들을 수혈하며 제 몫을 다하고 있다.
그 실력도 날이 갈수록 상향 평준화가 되고 있지.
하지만 그럼에도 코어 팬들과 근본 뮤지컬배우들 사이에서 아이돌 출신을 혐오하는 여론은 조금씩 남는 법이었다.
이민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허수오 그 또한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모델로서의 커리어 덕에 배우 업계에 쉽사리 기웃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게 이중적인 생물인 법.
그에게 이민기가 모델 업계에 진출한 건 전적으로 이름빨로 보이는 반면.
자기가 [패션 앤 패션]에 단역으로나마 등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기 재능과 노력 덕분이었다.
‘진짜 모델의 런웨이라는 걸 보여주마.’
그렇게 전의를 넘어 은근한 적의마저 느껴지는 한편.
“자, 자, 수오 씨 먼저 합시다.”
연출 감독의 지시와 함께 허수오가 먼저 스튜디오의 런웨이 세트장 위로 올랐다.
“후우.”
그 순간 허수오는 하나의 마네킹이 되었다.
오로지 옷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마네킹.
표정은 돌처럼 무표정하게 굳었으며, 자세는 오로지 옷을 보여주기 위해 반듯하게 펴졌다.
하이패션 모델의 전형적인 포징이었다.
뚜벅, 뚜벅.
그대로 세트장 끝까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허수오의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신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이 강림한 모습을 보는 듯했다.
‘모델이 모델이기는 하네.’
‘하, 나도 저 기럭지로 하루만 살아보고 싶으면.’
‘왜 패션쇼를 돈 주고 보러 가나 했더니, 보러 갈 만하네.’
패션모델이라는 건 단순히 외모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프로정신이 허수오의 몸짓에서 짙게 배어났다.
스튜디오의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한편, 알게 모르게 걱정을 품는 사람들 또한 존재했다.
‘이민기 배우님 어쩌지?’
이민기가 걱정이다.
키가 저것보다 한참 작던데.
깔창에 한결 시점이 낮은 카메라에 뭐에 많이도 보탰다.
하지만 과연 저 포스에 안 눌릴 수 있을까.
“컷!”
고민이 오가는 사이, 허수오의 런웨이가 끝났다.
“완벽하네.”
연출 감독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면 많이 만질 필요도 없겠다.
전문 모델들은 이래서 좋다.
카메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기가 비칠지를 고려한다고나 할까.
“그럼 다음 차례는…… 이민기 배우님이네. 준비되셨죠?”
“네.”
곧 호령과 함께 이민기가 세트장 뒤편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저 세트장을 뚫고 [이종호]가 나오겠지.
무뚝뚝한 마네킹 같은 캐릭터 [이종호]가 말이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천재 패션모델다운 모습을 대중에게 과시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허수오의 런웨이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넘어서는 건 기대도 안 한다.’
촌스럽게만 보이지 마라.
그 정도만 해도 살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튜디오의 누구 하나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낮춘 찰나였다.
“어?”
이민기의 런웨이에는.
“…….”
“…….”
스튜디오 모두의 입을 자동으로 닥치게 만들 만한 파괴력이 있었다.
‘뭐 저렇게 화사해?’
런웨이 세트장에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