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167)
운빨로 탑스타-167화(167/200)
제167화
마이야르 픽쳐스의 신작 기획 회의.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이야기가 진행됐다.
“네? 제가 각본을요?”
이민기에게 각본가로서의 업무를 요청한 것.
‘내가? 각본을?’
자타공인 바지 감독 아니었나. 이미 천재라는 컨셉으로 팔리고 있는 와중에 할 말은 아니다만, 이 컨셉으로 계속 밀고 나갈 줄 알았는데.
이민기가 놀란 마음을 못 가라앉히고는 휘핑 치듯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무리 그래도 각본 같은 중요한 일은 전문가가 맡는 게.”
“배우님, 전문가가 왜 전문가겠습니까. 크고 중요한 일일수록 세분화해서 나눌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 방면에 숙달된 전문가가 존재하는 겁니다.”
“…….”
뭐라는 거지.
심성보 감독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이민기가 눈만 깜빡거렸다.
‘감독님, 거참 그럴듯한 말인데 말입니다. 저도 깜빡 넘어갔을 것 같은데, 그래서 그 전문가라는 게 도대체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래도 감독이다. 말 삼가자. 이민기가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간신히 가슴 속으로 꾹꾹 억누르는 와중이었다.
“아니, 이해가 안 돼서 여쭙는 건데 그래서 그 전문가라는 게 저랑 대체 무슨 상관이길래.”
아차.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심성보 감독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각본가라고 해서 꼭 배우님이 모든 스토리에 개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황의성 감독님도 그렇고, 이번 일은 굳이 한국식 영화 제작에 맞출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할리우드처럼 각본 담당을 여럿 두되, 그중에서 배우님은 큰 플롯과 세부 디테일을 봐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 말에 이민기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원작자처럼 스토리의 큰 줄기를 봐 달라는 말이었구나. 그럼 각본 집필보다는 검수하는 쪽에 가깝겠네.
“영화에 걸맞게 연출하는 일, 화면을 구성하는 일, 배치하는 일은 전부 저와 주연이가 할 겁니다.”
심성보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 배우님은 전체적인 줄기를 전담하며 아낌없이 의견을 주시면 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쪽 방면의 전문가라.
생각해 보면, 전문가라고 해서 특별히 영화 제작 전반에 숙달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못 하는 일은 부담없이 전문가에게 넘기면 될 뿐.
‘내가 너무 무겁게 받아들였을지도 몰라.’
어느덧 그의 말에 반쯤 넘어간 걸까. 아니면 내심 이민기 또한 바라고 있었던 걸까.
검수자라는 업무에 마음이 살짝 동해버린 이민기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일단은 해 볼게요.”
그리고는 심성보 감독이 물어 채기 전에 재빠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배우님만큼 영화를 잘 아시는 분도 드무니.”
자기보다도 그의 능력에 확신을 품고 있는 듯한 심성보 감독의 웃음소리에 이민기가 불안한 웃음을 마주 흘렸다.
거기에 진주연 감독이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추가로 투척했다.
“배우님은 확실히 시야가 넓으시지. 시나리오 라이터가 아니라 감독을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주연아, 이번 작품은 내가 감독.”
“왜? 미국에서는 감독도 공동체재로 많이 하는데.”
“……말을 말자.”
“그러니까 배우님, 잘 부탁드립니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자기들끼리 결론을 다 내려버린 듯한 두 부부의 대화 속에 이민기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망했네.’
에라이.
그래도 옛날부터 꿈꿔오기는 했다.
배우로서 영화 스토리에 참여하면서 함께 제작하는 거.
‘생각해 보면 판매 루트 좌지우지하는 것보다는, 각본 쪽이 더 배우의 본분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을 말자.
대충 회의 정리하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려는 찰나였다.
“저기, 이번 영화 제목 말인데요.”
주하나가 까먹을 뻔했던 의제 하나를 던졌다.
“제목도 아예 웹소설 느낌으로 가는 거 어떨까요? 왜, 알고 보니 천재 가수라던지. 눈 뜨고 보니 천재 가수도 좋고.”
그 순간이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하나 씨, 이거 미국에 팔 작품이고, 또 작품성도 중시할 작품인데 조금이나마 그럴듯한 제목이 좋지 않을…….”
이민기가 황급히 덮으려는 찰나였다.
그만.
“호오.”
심성보 감독의 눈빛이 번뜩이고 말았다.
“그거참 괜찮은 아이디어군요.”
“…….”
이 사람 은근히 팔랑귀 아니야?
이민기는 황당한 마음속에서 갈피를 못 잡기를 한참, 그만 체념해 버렸다.
될 대로 되라.
* * *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이 잡혔다. 그렇다고는 하나,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또 아니었다.
아직 때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
왜, 어느 게임 속 악마 캐릭터의 명대사가 있지 않나.
[너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그 말이 맞다.
갈비찜은 서두르면 망친다고, 우선은 기다리는 게 먼저겠지.
‘당분간은 한가하겠네.’
그래도 기왕 생긴 시간 여유다. 이민기는 이 김을 몰아, 모처럼 휴일을 활용할 계획을 잔뜩 세웠다.
해외여행이라든지 맛집 탐방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원래 조난이라도 당할까 무서워 꿈에서도 못 꿨던 등산이라든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생 들어 그의 계획은 언제나 시작부터 살짝 틀어지는 듯했다.
“까메오 출연이요?”
“예.”
작은 소일거리가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호록.
서정우 이사가 어디에서 가져온 건지 지극히 익숙한 향이 풍기는 홍차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배우님께서도 이번에 저희 기획사에 들어온 신인 배우가 새 작품을 촬영 중인 건 아실 겁니다.”
“그건…… 이야기는 들어봤죠. 그 배우 이름이 천건주라고 했나요?”
“예, 아이돌 출신입니다만. 이번 작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민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였더라. 그 작품 제목이 우주에서 온 남사친이었나.’
몇 년을 알고 지냈던 친구가 사실은 외계인 왕자였고, 거기에 엮인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러브 코미디물이 있었지. 최근 들어서 급격하게 뜬 판타지 융합 드라마 중 하나.
재밌게 봤던 만큼, 이민기는 당연히 결말까지 알고 있었다.
지구인들의 인간성에 실망한 외계종족이 끝내 지구에 레이저 빔을 쏴서 멸망시키려는 순간.
[야, 외계인은 지구인이랑 못 사귀냐?]여자 주인공이 남주와 약혼하며 지구를 지키는 데 성공한다는 그런 내용.
‘이거 어디에 스포일러라고 해도 안 믿겠지? 여자 주인공이 심심하면 외계 조직에 납치당해서 장르가 테이큰이라는 농담도 있었는데.’
까놓고 오글거렸다. 마치 00년대 러브 코미디를 보듯 대사 하나하나가 간드러졌었지. 각본가가 작정하고 시청자들 손발을 고장 내려 한 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미친 듯이 팔렸지.’
그게 초대박을 쳐버렸다.
한국에서는 딱 평균적인 성적이었지만, 동남아 등지에서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가며 일약 대세 작품에 올라버린 것.
최종화 방영 때는 수만 명이 길거리로 나와서 프로젝터로 다 같이 봤다나. 촌스러우면서도 맛깔스러운 그 감성이 동남아 시장에서 스트라이크로 꽂힌 것이다.
[나랑 같이 관찰해줄래?]오죽하면 현지에서는 작중 명대사로 고백하는 유행마저 생겼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배우였다.
‘이거, 원래 천건주가 찍을 작품이었던가?’
아닌 것 같은데.
이번 작의 주연, 천건주는 아이돌 출신 배우로서 공중파 연기 오디션에서 8강까지 찍고 아이돌 그룹에 스카웃 된 건 좋았지만, 정작 그 뒤에 묻힌 배우였다.
전형적인 물로켓 타입.
운도 좀 나빴다.
‘원래부터 아이돌이 될 생각은 없었는데, 소속사 사장이 돈 벌려면 아이돌이 최고라면서 시켰다지.’
노래는 할 줄도 모르는데 비주얼이 나름 반반했던 탓일까. 천건주는 그룹 내에서 랩 담당을 맡았다.
하지만 그 끝이 좋지 못했다. 결국, 계약 종료보다 그룹이 먼저 해체된 후에 JC로 이적해버린 것. 그것도 무려 연기자로 돌아가겠다면서.
‘참 많이 꼬였구나.’
얼마 전에 JC 내부 모임에서 얼굴 한번 마주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제대로 대화도 안 나눴으니 딱히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원래 이 드라마도 다른 사람이 찍었지.’
그쪽은 어디에 갔…….
아, 감옥 갔지.
‘세상.’
이민기가 톱니바퀴와도 같이 돌아가는 세상의 오묘함을 절감하고 있으려니, 서정우 이사가 말을 이었다.
“거절하셔도 무방합니다만. 저희 회사 입장에서는 배우님의 유명세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활용이요?”
“가진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저희 같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특히나 요즘은 할 일이 없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어딘가 능글능글한 표정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음,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시니까 역으로 당황스럽네요. 이사님은 좀 더.”
“좀 더?”
“세련된 화법이 흘러넘친다는 이미지였는데요.”
“예, 제가 화법으로 어디 가서 모자란 편은 아니지요. 배우님처럼.”
서정우 이사가 작게 웃더니 말했다.
“하지만 굳이 돌려서 말한들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말 많은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했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말을 빙빙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건 잘 모르는 사람 한정이죠.”
“전 이제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슬슬 그렇습니다.”
“대표님은 저랑 처음 뵀을 때부터 지나치게 솔직하시던데요.”
“그래서 제가 대표님 몫까지 덤으로 고생하는 겁니다.”
서정우 이사가 피식 웃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자질구레한 격식은 필요 없어졌다는 걸까.
호흡을 몇 년씩이나 맞추고 있는 만큼, 물고기의 비늘처럼 서서히 벗겨져 어느새 속내까지 터놓을 수 있게 된 것.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거칠하다고 해서 그 속내가 무례한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뭐, 그렇습니다.”
그가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말했다.
“천건주 배우님은 지금, 연이은 실패로 자신감을 많이 잃으신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계실 수도 있고…… 하지만 배우님 같은 대선배가 가서 기운을 북돋아 준다면 아마 결과물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기운이라.
내가 까메오로 참여하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을까. 이민기는 그 가능성에 대해 천천히 자리에 앉아 고민하기를 잠시.
‘뭐, 되든 안 되든 별로 상관없지?’
쉽게 결정을 내렸다.
[우주에서 온 남사친]은 대박 작품이다.거기 까메오로 출연한다고 해서 그의 이미지가 특별히 깎일 것도 아닐뿐더러, 후배 아니겠나.
실패를 반복해서 자신감이 깎여나간 사람의 기분은 알고 있다.
그 자신감을 책임지고 회복시켜준다거나, 그런 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사소한 도움 정도라면 못 줄 것도 없었다.
“좋아요.”
또 JC에서 여태껏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도 있어야겠고.
이민기가 양손을 깍지끼듯 포개며 말했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참.
그리고 까메오는 원래부터 해 보고 싶기도 했고. 까메오, 그거야말로 잘나가는 배우의 상징 아니겠나.
“얼굴 하나만으로도 화제성이 될 만큼의 커리어를 가진 배우들의 특권이잖아요. 저도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내가 그 영역에 다다른 거다. 배우로서 도전과제 하나 깨는 기분인데, 솔직히 하고 싶다. 하지 말라고 해도 자진해서 하고 싶은 상황.
하물며 이렇게 후배 챙겨주는 자상한 선배라는 좋은 구실까지 떠먹여 주지 않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마지못해 받아들여 주는 수밖에.
“이 한 몸, 귀여운 후배님을 위해 희생해야죠.”
이민기의 선뜻 튀어나온 말에 서정우 이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배우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 * *
[우주에서 온 남사친].전형적인 저예산 러브 코미디.
그런 주제에 소재는 자극적으로 잡은 만큼 감독의 신경이 갓 수확한 아스파라거스처럼 곤두설 수밖에 없었고, 그 이상으로 촬영 현장 분위기에서도 그러했다.
“이민기다! 이민기!”
이민기라는 거물 배우가 찾아온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반쯤 망해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런 잘나가는 인물이 와서 화제성에 거들어 주겠다니.
“캬, 거, 이민기 하면 까메오로 좀 와달라고 해도 그렇게 한사코 거절한다던 사람 아니야? 그런데 우리 드라마에 온다고? JC가 좋기는 좋아.”
문효성 감독이 껄껄 웃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받는 상대로서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러게요.”
천건주.
그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 따위가 뭐라고, 잘못하면 배우님한테 폐만 끼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