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170)
운빨로 탑스타-170화(170/200)
제170화
[슬슬 캐스팅 단계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캐스팅 단계에 들어가도 좋겠다.
저 말은 굳이 말하자면, 정말로 캐스팅을 들어가자는 말은 아니었다. 평소 심성보 감독의 각본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자면, 굳이 한 바퀴 돌려서 말한 것이다.
“캐스팅을 고려해도 될 만큼의 각본 초본이 준비됐다는 말인가요?”
각본이 대략적으로나마 틀이 잡혔다는 뜻.
이민기의 질문에 심성보 감독이 허탈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 딴에는 농담으로 돌려서 말한 겁니다만, 배우님에게는 못 당하겠군요.]“……!”
[예, 지금 오셔서 바로 한번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본 틀이 됐으니 다듬어서 바로 캐스팅에 쓸 장면 골라내고 공고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말에 이민기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드디어.’
그간 초반부만 몇 번을 갈아엎으면서 얼마나 고생하고 또 고생했던가.
시놉시스를 대략적으로 잡아 놓은 상황에서 씬(scene)은커녕 플롯을 짜는 과정까지도 수십 번을 엎고 또 엎기를 반복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신기루를 향해서 무한정 사막을 걷는 것처럼 말이다.
[이만하면 슬슬 진행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제 눈으로는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일뿐더러, 올해 본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게 재밌는 것 같은데.]어마어마한 과찬이었다.
이민기씩이나 되는 배우, 또한 영화 중독자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성보 감독은 한마디로 잘라냈다.
[손에 꼽는 정도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아카데미가 목표라면. 제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시절, 교수님께서 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질문형임에도 대답이 불가능한 말 속에 이민기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심성보 감독은 굳은 결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수작을 생각해야 졸작이, 명작을 생각해야 수작이, 최고를 생각해야 비로소 흥행작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저희 목표는 정말로 최고입니다. 어느 지점을 바라봐야 하겠습니까?]이번 질문에는 답이 있었다.
[영화사에 남을 작품을 노려야겠네요.] [예, 그 외에는 도전할 의미조차 없습니다. 제가 바라보고 있는 지점은 그 지점이며, 이 정도의 각본으로는 턱도 없습니다.]저 정도로 말했다.
감독이 저렇게까지 의지가 굳건하니 그러니 배우로서 뭐 어쩔 수가 있겠나. 말라비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도전하는 수밖에.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들려온 연락이었다. 이민기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올해 최고의 영화 맞죠?”
[그 이상입니다.]기대를 한참 뛰어넘은 대답에 이민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렇네, 올해 최고를 노리면, 21세기 최고 정도는 노려줘야겠네. 하여간 영화에 한해서라면 끝까지 방심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 바로 스튜디오로 갈게요.”
이민기가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두근거린다. 어서 가서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 호기심에 이민기의 가슴이 모처럼 폭발하는 활화산마냥 불타올랐다.
‘아, 궁금하다. 어떤 내용일까.’
이민기는 순간 깨달았다.
참, 지금까지는 다 아는 작품만 반복해서 봐 왔네. 그가 출연하며 스토리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변주 정도.
이번에는 다르다.
오리지널이다.
그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리지널은 처음이다.
가슴속에 거대한 즐거움을 안은 채, 스튜디오에서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헉, 허억! 선배님!”
천건주가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러고는 무릎에 손바닥을 얹은 채 지친 호흡을 고르기를 몇 초, 허리를 직각으로 곧추세우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였다.
기왕 하는 감사 인사라면 조금 꾸며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꾸밈없이 담백하기에 더더욱 감정이 느껴지는 말에 이민기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내가 고맙지. 애드립 잘 받아 줘서.”
“네?”
“다음에 또 같이 합 맞추자.”
그 말에 천건주가 환하게 웃었다.
또 만나자를 넘어서, 다시 또 함께 연기하자는 말 만한 덕담이 있을까.
하물며 상대가 이민기만 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꼭이요!”
* * *
서울 시내에 세워진 어느 아파트.
도심 속 아파트답지 않게 저층에 마당까지 딸린 이 고급 아파트는 얼핏 호화롭게마저 느껴졌는데, 흔히 테라스 타운이라고 부르는 그것이었다. 또 일각에서는 신혼집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심성보 감독이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주연이는 처음에 반대했습니다만, 어차피 오래 살 집이라고 생각해서 샀습니다.”
“와……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사실, 넷플레이 쪽에서 추가로 연락이 와서요. 곧 초과 수익금을 지불하겠다고.”
초과 수익금, 넷플레이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만만투]는 기본적으로 넷플레이에 매절 개념으로 판매한 작품이기에, 얼마나 인기를 끌든 제작진이 추가로 가져갈 소득은 없다.하지만 정말로 그랬다가는 제작자들이 차차 넷플레이를 떠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정말로 히트를 터뜨린 작품들은 없는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제작자들에게 소득을 제공, 만족시켜 주는 것.
‘하긴, 넷플레이 입장에서 [만만투]를 만든 감독이 극장가로 간다거나 다른 OTT 서비스로 간다거나 하는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겠지.’
일종의 뇌물과도 같았다. 그것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뇌물.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번 작품까지도 넷플레이에 꼭 줘야만 한다는 법은 또 없었다.
넷플레이 입장에서도 제작사가 아무리 히트작을 낸들, 매절 가격 이상으로 벌 수 없다는 이미지는 좋지 않을 테니까.
순수한 호의는 아닐 테고, 적당히 호의로 받아들이면 될 일.
“잘됐네요.”
이민기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런데 감독님, 이번에 받으신다는 그거, 넷플레이에서 차기작 하자고 러브레터 보낸 거 아니에요?”
“넷플레이에서 차기작이라.”
“나쁠 거 없잖아요. 보나마나 목숨을 걸고 밀어줄 테고. 만만투 때랑은 다르게 선투자금도 빵빵하게 줄 테고.”
“일단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조건을 제시하기에 따라서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정도입니다만…… 아직 작품이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이니 말입니다.”
작품 상황에 따라 다르다.
심성보 감독의 얼핏 여지를 남기는 듯한 말에 이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기왕이면 완성하고 결정하는 게 제일 낫기는 해요. 특히나 작품 퀄리티에 자신이 있다면요.”
결국에는 시기 문제였다.
[만만투]의 기대치만큼 선투자를 받고 그 수익에 만족하며 만드느냐, 아니면 훌륭한 작품을 제작해서 그걸 바탕으로 더 나은 협상 테이블을 끌어내느냐.차기작의 흥행 성적에 자신이 없다면 전자, 자신이 있다면 후자다.
즉, 마이야르 픽쳐스는 후자를 선택한 셈이었다. 차기작에서 다시 한번 흥행을 터뜨리겠노라고 공표한 셈.
‘역시, 감독님답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은 사업가 기질이 없었다. 완전히 감독, 감독으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벌이는 그 작품의 수준으로 정해지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 있을 뿐.
진주연이라는 실력 있는 사업가를 배우자로 맞이한 건 심성보 감독에게 다신 없을 큰 복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요.”
떠들기를 잠시, 이민기가 잠시 천장을 바라보더니 작게 읊조렸다.
“액수가 액수였는데.”
“예, 액수가.”
“1억.”
“예, 1억.”
심성보 감독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1억 달러 말입니다.”
그렇다.
넷플레이 측에서 제안한 액수는 무려 1억 달러에 달했다.
설령 어떤 영화가 나오든, 한화로 1,000억을 들여 사겠다고 제안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만만투로 조 단위 매출을 찍었다고 하니까 그거에 대한 보너스 개념도 있겠지만…… 그래도 1,000억은 큰데요.”
이거 하나면 건물 구매를 취미로 삼으며 놀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심성보 감독은 이걸 거절한 것.
“제가 나태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려는 의욕도 떨어질 것 같고,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넷플레이의 약점이기도 했다. 선금을 받은 스튜디오들이 갑자기 작품의 퀄리티 향상을 위한 노력을 내팽개치고, 게을러지는 것.
심성보 감독이 덧없는 상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배우님께는 죄송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만만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고는 하나, 거기에 안주하기보다는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야겠지요.”
굳이 사과를 하는 이유는, 이민기는 그 투자금을 받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을 했었기 때문.
사업가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제작비 걱정 없이 작품을 만들길 바랐기 때문이었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이민기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니요. 저도 실력만큼 벌어가는 게 더 취향이라.”
“자신 있습니다.”
“저도요. 신뢰도 있고요.”
“신뢰, 협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이미 한배를 탔다고 봐야죠.”
“산으로만 가지 않으면 좋을 텐데.”
“산도 산 나름이라, 동네 뒷산 정도 오르면 별로지만 히말라야 정도 오르면 또 모르죠.”
그래,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산으로 갈 줄 알았던 [우주에서 온 남사친]이 끝내 초대박을 터뜨린 것처럼 말이다.
“아니요. 그건 어려울 겁니다. 작품이라는 건 산에서 탄생하지 않으니.”
심성보는 이민기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슬슬 플롯 보고 같이 이야기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드디어.”
이민기가 오랫동안 기다린 정찬을 앞에 둔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대체 얼마나 잘 만든 플롯이기에 그렇게 자신에 찬 말을 했던 걸까. 어쩌면 이번 영화는 그가 태어나서 봤던 모든 작품 중에서 최고가 아닐까.
“보십시오.”
기대에 찬 찰나 심성보 감독이 노트북 화면을 이민기에게 넘겼다. 그 순간 이민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플롯 하나를 얼마나 자세히 쓰신 거야?’
무려 십만 자를 조금 넘기는 글자의 향연. 책으로 치면 한 권 분량일까.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건 잘해야 1~2만 자 언저리였던 것 같은데. 이건 왜 이렇게 많지.’
작업하다가 신나셨나.
단순히 읽는 데만 해도 시간 단위로 걸릴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이민기가 식은땀을 흘리려니 심성보 감독이 입을 열었다.
“배우님께서 읽어 보시고 별로라면 엎어도 상관없으니, 편히 감상을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더 지적을 못 하겠는데.
지적 하나 잘못했다가 이렇게 많은 글을 엎게 만든다면, 그것만큼 속이 쓰릴 수가 있겠나.
‘그래도 필요하다면 해야지.’
이민기가 결단을 내린 이방원처럼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읽기를 잠시.
십 분.
이십 분.
약 삼십 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어?”
이민기가 작게 놀라더니 말했다.
“여기, 감독님이 이번 버전 콘티에 넣으신 이 캐릭터, 딱 맞는 배우가 있는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