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171)
운빨로 탑스타-171화(171/200)
제171화
심성보 감독이 건넨 [신작(가제) 콘티 초안]의 초반 내용을 보면 이러했다.
[난데없이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드러낸 대학생 주인공, 그에게 인터넷 방송을 도전해 보라며 권유하는 친구 하나가 있다.]여기서 캐스팅에 있어 중요한 건 전자가 아니었다. 어차피 주인공은 이민기, 그로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주인공의 사이드킥이 될 후자가 중요했는데, 이 사이드킥으로 누굴 뽑을 것인지가 중요한 포인트였다.
‘이번 작품은 주인공, 주인공의 사이드킥, 히로인 3명이 방송을 꾸려나가는 시스템이니까.’
짧게 요약하면 인터넷 방송 성공기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음악 그 자체에 재능 있는 메인, 히로인이 작곡과 편곡에 재능을 가진 또 다른 메인, 이 둘을 보조하는 게 바로 사이드킥이었다.
그런데 사이드킥이라는 게 쉬운 역할이 아니었다.
은근히 쭈글쭈글한 맛이 있으면서도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마냥 비굴한 성향도 있어야 했다. 그래야 머리에 생각이 안 든 게 아닌가 의심이 들리만치 막 나가는 주인공과 케미가 잘 맞을 테니까.
‘찾기가 쉽지 않았지. 아무래도 요즘 찌질하면서도 정감 드는 캐릭터를 잘 살리는 배우가 많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이민기는 꽤나 소년미가 풍기는 외모를 가진 편이었다. 이런 페이스에게 시종일관 숙일 만한 캐릭터라면 상대적으로 더 어린 외모를 가져야겠지.
그래서 이 역할에 누굴 캐스팅할 건지가 지금까지 줄곧 고민이었는데.
새로 나온 콘티 속에 그 대답이 사격 과녁처럼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형님, 지금 날 돈으로 때린 거예요?] [왜, 관둘래?] [아니, 오히려 좋아.]중간중간 예시처럼 적혀 있는 대사들. 저 급발진을 맛깔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민기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니, 불과 얼마 전에 같이 만났고, 심지어 함께 연기마저 펼치지 않았던가. 그것도 꽤 맛깔나게.
‘이거다.’
정답을 찾은 이민기가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말했다.
“감독님, 저희 캐스팅 오디션 열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 * *
불과 몇 시간 뒤.
마이야르 픽쳐스 사무실에 잔뜩 기죽은 채로 걸어들어온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저…… 부르셨나요?”
천건주.
표정부터 긴장한 티를 전혀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외모는 20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딱 대학생 연기하기 좋은 나이대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이에 비해서도 앳된 얼굴이 특징이었다.
“일단 잘 왔어요.”
심성보 감독이 다소 불신에 찬 표정으로 천건주를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아이돌 출신이라고 했나? 저런 여리여리한 얼굴이 그쪽 바닥에서 인기이기는 하지.’
하지만 여전히 신뢰는 안 간다. 출신 아이돌 그룹을 봤는데, 딱히 연기력이 좋으리라는 느낌은 안 들었다.
일단 존재감이 너무 흐릿했지.
배우의 존재감은 반쯤 타고나는 아우라 같은 것이라, 평소 이미지가 흐릿한 사람이 작품 속에서만 또렷하기는 쉽지 않았다.
후천적으로 익히려고 한들, 단순 반복훈련만으로는 안 된다. 특정 계기로 각성하지 않는 이상 한평생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심성보, 그였다면 절대 안 뽑았을 것이다. 눈길조차 안 줬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무실까지 불러낸 이유는.
[감독님, 저희 회사 후배인데 연기가 꽤 괜찮아요. 아니, 연기력이 좋다기보다는, 이 역할에 맞아요.]이민기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최근에 찍은 작품인데, 보이시죠? 사람이 좀 쭈글쭈글한 거.] [배우님과 케미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조금 당찬 느낌이 없어서 아쉽군요.] [그건 만나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 같은데, 음.] [캐스팅을 권유하려고 말씀을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대로는 어렵습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일단 한번 직접 보시는 게.]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일단 연기를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것.
[아니다 싶으면 냉정하게, 가차없이 쳐내셔도 돼요. 저도 상처 안 받아요. 구질구질하게 붙잡지도 않습니다.]이민기도 이 부분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캐스팅만큼은 감독의 고유한 권한일뿐더러, 심성보 감독의 눈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가 직접 눈으로 목격한 천건주의 실력을 믿기도 했고.
[……배우님 말씀이 정 그렇다면, 한번 보겠습니다만.]그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건 심성보 감독이었고.
결혼식에서 축사까지 서 준 사람의 제안인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나.
결혼 자체가 [만만투]의 성공 덕이 컸으니, 심성보 감독은 이민기에게 결혼을 빚졌다는 생각도 있었다.
향후 이민기의 부탁은 어지간하면 전부 들어주겠노라고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두기도 했고.
예를 들면 빚보증 같은 거.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심성보 감독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기의 안목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는 쓸데없이 사람이 좋을 때가 있다. 주위에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냉정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끌고 가려고 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모습이었다.
평소에도 엄청나게 손해 보면서 살겠지. 가망도 없는 일에 투자한다고. 운이 없었더라면 망해도 몇 번을 망했을 터.
‘나라면 안정적인 선택을 할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찰나, 심성보 감독이 문득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지, 어떻게 보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만만투] 이전의 마이야르 픽쳐스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이민기의 순수한 호의 하나로 가망 없었던 일에 전면적인 투자를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운을 나눔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순수하게 안목과 선택으로 말이다.
그런 이민기의 선택이다.
마음속으로 흐린 구름처럼 깔린 의심이 살짝 걷혔다. 눈앞을 바라보자 아직 기운이 없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저, 배우님이 보여주실 게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그 배우님은 어디 계시…….”
“잠깐 이 앞에 어디 다녀오신다네요.”
이민기는 자리를 비웠다.
지금은 심성보 감독과 천건주, 단둘만의 독대 자리다.
오디션은 그렇게 진행하기로 했다.
앞서 무슨 준비를 시켰을지, 무슨 준비를 해올지 또 모르니 즉석에서 대본을 제안하는 형식으로 가는 것.
오디션이라는 걸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게 심성보 감독의 눈에 들면 끝이다. 안 들어도 끝이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당연하지만, 이것도 알리지 않는다.
‘지인 버프를 줘도 부족할 것 같은데, 오히려 디버프를 걸고 시작하는군.’
아이러니한 상황에 심성보 감독이 작게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미안하지만, 제가 건주 배우님한테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보, 보고 싶은 거요?”
가뜩이나 주눅 들어 있었던 천건주의 어깨가 쭈뼛 떨렸다.
얼마나 심장이 약한 건가.
“예, 워낙에 민기 씨가 건주 씨에 대해서 극찬을 하셔서요. 연기 잘한다고.”
“선배님이 절 칭찬을…….”
이번에는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대체 얼마나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건가. 그건가, 얼굴이 도화지인가. 수채화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면 그대로 드러나는 건가.
심성보 감독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소개해 주고 싶은 후배라고 하시더군요. 나중에 크게 될 것 같다고 말씀을 몇 번이고 강조하셔서. 저한테도 소개시켜주고 싶다면서.”
그 말에 천건주의 표정이 이번에는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그 정도는 아닌데…….”
응, 적어도 감정의 폭은 다양하네.
말 몇 마디 했다고 긴장에서 감동으로, 또 부끄러움으로 간단 말인가.
이래저래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타입인가 보다.
사람으로서는 썩 재밌지만, 연기에서는 어떨까.
‘우선은 감점.’
심성보 감독이 마음속으로 채점을 하며 눈앞 테이블 위로 대본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연기력을 한번 보고 싶은데, 어때요?”
“제 연기를요?”
“왜요, 못 하겠어요? 너무 갑작스럽나?”
“아뇨, 아뇨, 그건 절대 아니고요. 오히려 전 너무 좋은데.”
천건주가 당황스럽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감독님께서 제 연기를 봐 주신다는 게 너무 황송해서.”
천진난만한 발언에 심성보 감독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거 봐라, 지금 아부라도 떤 건가.’
곧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는 이미 신인 배우들한테 저런 대접을 받을 입지에 와 있기는 했다.
“해 볼게요.”
의심이 옅은 걸까, 천건주는 처음 보는 감독의 연기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뜻 받아들였다.
드륵.
사무실에서 소파 하나를 치우고 동그란 공간을 만들어 즉석 오디션장을 만들기를 몇십 초. 그리 넓지는 않은 공간에 선 천건주가 손에 쥔 각본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심성보 감독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예요, 포기하게?”
벌써 관두나.
각본 주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살짝 실망이 감돈 찰나, 천건주가 한 말은 또 의외의 것이었다.
“다 외웠어요.”
그 짧은 새에 전부 외웠다는 것이었다.
‘외워? 전부?’
심성보 감독이 자그맣게 놀랐다.
‘지금, 1분이나 걸렸나? 아무리 대본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숙지까지 5분은 줄 생각이었는데.’
이민기가 미리 내용을 알려준 건가? 의심이 든 찰나 심성보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럴 리는 없다. 저 각본은 조금 전에 내가 직접 발췌한 거야.’
하물며 그는 이민기를 믿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이민기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고. 작품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그의 안목에도 조금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심성보, 감독 당사자보다도 [만만투]의 성공 가능성을 만에 하나 의심치 않았던 그 안목을 말이다.
“준비되면 바로 시작하면 됩니다.”
“네.”
천건주가 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몇십 초 뒤.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문장 하나와 함께 그가 개시를 알렸고.
천건주는 연기를 시작하기에 몇 초 앞서, 마음속으로 대사, 아니, 조언 하나를 되새겼다.
[네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는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당당하면 된다.
내가 내 연기를 의심하면, 남이 봐도 의심할 것이다.
물론, 심성보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다. 그런 사람의 앞에서 연기한다는 게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천건주의 연기는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훼손되어서는 안 될 그만의 오리지널리티.
이민기의 대사 한 줄을 마음속의 기둥처럼 굳게 박아넣은 천건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 방송을 해 보라니까? 방송. 아오, 진짜 개멍청해. 요즘 재능 좀 있으면 돈을 아주 갈퀴로 긁어모으는데, 그걸 왜 안 해? 자기 복을 걷어차도 유분수지.”
주인공에게 방송 활동을 권하는 상항.
그렇게 평범한 연기가 이어지기를 몇 초.
심성보 감독의 시선이 살짝 식으려는 순간, 천건주의 목소리 톤이 변했다.
“네가 7, 내가 3.”
몇 초의 정적, 천건주가 다시 말했다.
“……아니, 8, 내가 2.”
순간적으로 드러난 쭈글쭈글함 앞에, 심성보 감독의 눈빛에 비로소 흥미가 돌아왔다.
“……9 가져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