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23)
운빨로 탑스타-23화(23/200)
제23화
‘아니,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데?’
김아성 트레이너의 말에 이민기의 머릿속에 후끈한 열기가 스쳐 지나갔다.
‘조만간 단역이나 조연 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될 건 알았지만, 설마 첫날부터 바로 시작한다고? 나 오디션 합격 통지받은 게 이제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김아성 트레이너는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하품이나 한 번 느긋하게 뱉은 뒤 할 말을 이을 뿐이었다.
“왜요. 뭐.”
“아니, 그게 좀 당황스럽기는 해서.”
“당황스러울 게 뭐가 있나. 민기 씨 평소에 하는 거 보면 실력으로는 안 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뭐 거창한 작품에 주연으로 집어넣는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흔한 드라마에 단역으로 잠깐 들어가자는 건데?”
“…….”
“민기 씨, 잘 들어요. 겸손한 건 좋은 거지만, 자기 자신을 저평가하는 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지. 이제부터는 자신감을 가져.”
누가 뭐랬나.
자신감이 없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갑자기 일감 오니까 당황스럽다는 건데.
이민기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김아성은 자기가 명언 하나 뱉었다는 듯 스스로에게 취했다.
“장르는 캠퍼스 배경 로맨스코미디물이고, 최근에 TVM에서 방영하고 있는 종편 드라마인데 추세가 나쁘지 않아. 인기가 꽤 좋아.”
“혹시 그거 캠퍼스 스토리 아니에요?”
“오? 민기 씨도 아네?”
김아성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시청률도 별로 안 나오고 거의 여자 시청자들만 보는 건데.”
“아, 나오는 작품은 최대한 다 챙겨보고 있어서요.”
정확히는 옛날옛적에 다 봤다.
체감상 한 7년 전쯤에.
‘캠퍼스 스토리라. 종편에 배우들도 신인 위주로 용한 탓에 시청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완성도가 썩 괜찮아서 오랫동안 명작으로 회자됐지.’
내용은 뭐였더라.
캠퍼스에서 포크 기타 동아리에 들어간 사람 이야기였나.
남학생이 반한 여학생한테 관심을 받고 싶어서 기타를 칠 줄 안다고 거짓말한 탓에, 급하게 기타를 시작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
적당히 순한 맛 로코였다.
‘순하다기보다는 좀 유치찬란하다고 해야 하나. 오글거리는 장면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남주가 꽃이랑 양초 깔아놓고 고백한다던가.’
이 작품의 특징은 김아성 트레이너의 말마따나 10~20대 여성 시청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
반대급부로 중장년층 시청자들에게는 거의 외면을 받았다.
“하긴,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 오디션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지?”
김아성은 이민기가 대충 둘러댄 말을 나름대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지금 급하다는데. 안 할 거면 안 할 거라고 말해야 저쪽에서도 대책을 찾지. 이미 깔쌈한 신인 하나 데려가겠다고 현장에 말해 놨다는데.”
이야, 참 대단하다.
이쪽과는 상의도 없이 이야기를 다 마쳐 뒀구나.
하지만 됐다.
신인이 일감을 가릴 처지냐.
‘캠퍼스 스토리라면 나도 꽤 감명 깊게 본 작품이기도 하고. 차라리 잘 됐어.’
또 단역이면 부담도 없다.
이민기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갈게요.”
“그래,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니까 바로 출발하자고.”
두 사람은 그대로 짐을 챙기고는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어느새 연습실에 남은 두 사람.
유선아는 그들이 떠난 연습실 문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새삼 부럽네요.”
“부러우시면 다음에 오디션을 붙으세요.”
“탁 씨, 제가 분위기 좀 읽으라고 했죠?”
“아차.”
* * *
캠퍼스 스토리.
얼핏 보기에는 적당한 반응을 얻으며 순항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그 내막은 다소 시끌벅적했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다름이 아니라 몇 시간 몇 분 몇 초를 다투며 급하게 촬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비축 분량은 옛날 옛적에 동이 났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헛디디거든, 그대로 낭떠러지까지 떨어질 판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 이런 와중에 빵꾸라니.’
이 와중에 단역 하나가 급성 맹장염으로 실려 가기까지.
말이 단역이지, 조연과 단역 사이의 적당한 비중을 가진 캐릭터였다.
즉, 아무나 데려와서 무작정 쓸 수가 없다.
덕분에 이번 작품의 제작을 맡은 PD, 박유찬은 말 그대로 돌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왜냐.
[캠퍼스 스토리]는 그의 입봉작이었으니까.배우 수급은 PD에게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런 식으로 차질이 생기거든 그건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온 사방에 떠벌리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으윽, 돌아버리겠네. 그나마 JC에서 신인 하나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긴 했는데.’
어떻게 촬영 순서를 미뤄 시간을 모으고 또 긁어모았지만, 그것도 곧 한계다.
“슬슬 촬영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다음 장면 갈 거면 지금입니다.”
연출자가 그에게 촬영 진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촬영을 마치더라도 편집팀이 쓸 시간을 고려하면, 이 이상은 어쩔 수 없다.
뺄 수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입봉 PD가 유명 작가의 대본을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도 자살 행위였다.
‘세상이 날 괴롭히네.’
박유찬 PD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와중이었다.
“PD님.”
한 남자가 대뜸 걸어와서는 말을 걸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견줄 데 없을 정도로 건들건들하기 짝이 없는 남자.
“JC 엔터에서 왔습니다요.”
김아성이었다.
그가 이민기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팍 밀며 말했다.
“미리 연락드렸는데, 이 친구입니다.”
“이름은요?”
“이민기. 이번 작품이 첫 출연일걸요? 맞죠?”
“아, 네. 그게 아니라, 네, 맞아요.”
어딘가 행동이 어설픈 그를 보며 박유찬 PD의 이마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이민기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얼굴만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만, 근데 왜 이렇게 어리숙해? 진짜로 쌩신인인가? JC는 소속 배우들 관리 잘하는 거로 유명한데?’
지금 투입해야 하는 단역은 그냥 단역이 아니다.
조연급에 근접한 단역이다.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을 쥐고 있는 인물, 조교였다.
여주의 속을 박박 긁으면서 남주와의 관계가 호전될 여지를 주는 역할.
아무나 쓸 수는 없었다.
‘으, 이 사람, 아무리 봐도 악역을 맡기에는 얼굴이 너무 순해 보이는데.’
고민하기를 잠시.
박유찬 PD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니다. 어차피 시간도 없어. 이판사판이다. 정 안 되면 작가님한테 양해 구하고 각본 고쳐 달라고 부탁드리는 수밖에.’
이대로 간다.
그는 이민기를 붙잡듯 연출가에게 넘기며 말했다.
“빠르게 진행합시다. 우선 대본부터 숙지시켜요.”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한 장면만 무사하게 넘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딱 그 정도.
박유찬 PD가 이민기에게 바라는 건 그 수준이었다.
그리고.
“어?”
그의 기대가 좋은 의미로 배신당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지금 [캠퍼스 스토리] 제작진이 촬영하는 장면의 내용은 이러했다.
여주 ‘김하나’는 가난한 환경에 대학 생활을 소화하느라 시달리고 있다.
한 학기라도 장학금을 놓치거든, 그대로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와야 할 판.
그렇기에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남주와 관계가 틀어지기까지.
그런 그녀를 한계까지 내모는 게 조교 역할을 맡은 캐릭터 ‘이남욱’이었다.
그런데 그 ‘이남욱’을 맡을 예정이었던 배우가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단역이라고는 하나, 단역으로 연기력 없는 사람을 쓸 수는 없다.
그런 자리에 검증된 것 없는 신인을 꽂아 넣다니.
그 누구도 이민기에게 기대하지 않고 평균만 해 주기를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는 와중이었는데.
‘저 사람 뭐야?’
촬영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어제 면담 중에 다 말씀을 드렸잖아요. 추천서가 필요하시면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을 하셔야죠. 전 권한이 없어요.”
“지금 교수님이 해외로 가셔서 연락을 아예 안 받으신다면서요.”
“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죠.”
“이게 말이 돼요?”
조교 ‘이남욱’ 역할을 맡은 신인 배우, 이민기의 연기력이 워낙 걸출한 탓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하……솔직히 학생이 추천서 못 받는 게 제 탓이에요? 아니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옷 하나 갈아입고 대본 몇 분 읽었을 뿐인데, 말 그대로 조교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 불친절한 태도로 궁시렁거리는 조교.
“제가 추천서 써 드려요? 그러다가 저 서류 조작으로 쫓겨나면?”
“교수님한테 말씀 한마디만 좀 전해 주시면…….”
“그러니까 지금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들어요? 안 받으신대도! 저도 할 일 많아요. 예? 사정은 딱한데, 알겠는데! 학생 일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러고 있는다고 해결이 돼요?”
대사 하나하나가 아무리 봐도 신인의 연기가 아니었다.
얼굴 한 대 후려치고 싶다.
보통 신인들의 연기라는 것이 조금만 어색해도 위화감이 확 튀기 마련인데, 이민기의 연기에서는 한없이 자연스럽기만 하였다.
박유찬 PD는 그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만 깜빡거렸다.
‘연기 처음 하는 거 맞아? 뭐 이렇게 안정적이지? 대사 실수만 안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물며 악역 연기다.
드라마의 완성은 곧 악역의 연기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민기의 연기는 이미 익은 사과마냥 능숙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처음 하는 게 아니니까.
이민기의 지난 비공식 연기 경력의 90% 이상은 단역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땡큐지.’
애초에 본인은 행복하다 못해 황홀할 정도였다.
‘단역이라길래 잠깐 한 장면 나오고 마는 일이겠거니 했는데, 이 정도로 비중이 있는 역할이었다니.’
원래 맡았던 역할들은 어떠했던가.
사극에서 전쟁터 한복판을 무작정 달려가기만 하다가 칼에 찔려 넘어지는 연기.
주인공을 쫓다가 총에 맞는 연기.
카페에서 주인공보다 먼저 줄을 서서 커피 한 잔 주문하는 연기.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연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건 딱 한 편만 나오고 말 배역이라고 해도, 최소한 주역 배우와 합을 맞추지 않나.
‘완전 꿀이잖아.’
감사하는 마음에 열심히 할 뿐.
“그리고 그 추천서 그거. 하, 신청 기한이 아슬아슬했으면 며칠 여유를 두고 신청했어야죠. 제 말이 틀립니까?”
물론, 연기는 재수 없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스태프들은 생각했다.
‘……은근히 잘생겼네.’
짜증 나는 행동 사이에서도 은근한 잘생김이 빛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런 짜증이라면, 한 번쯤 받아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환영이다!
게다가 얼굴도 얼굴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입은 옷이 잘 어울리는 잘생김이 있었다.
‘나 대학교 다닐 때 저런 조교가 있었으면 시험공부 열심히…… 이게 아니지.’
‘학생 때 되게 인기 많았겠다.’
분명 악역인데 그 피로한 눈빛 연기를 보고 있으면 살짝 홀려버린다.
그렇게 촬영 현장에서 순식간에 구원투수로 등극한 이민기를 보며 박유찬 PD는 생각했다.
‘이거 단역 캐릭터로만 끝내기는 좀 아까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