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25)
운빨로 탑스타-25화(25/200)
제25화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간혹 그런 캐릭터가 있었다.
[쟤 누구야?] [인상에 확 박히네] [내가 고자라니] [대사 찰진 거 봐 ㅋㅋㅋㅋ]짧게는 한 장면에서 길어 봤자 한 에피소드에 잠깐 등장하고 사라질 뿐인데, 그게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월세 떼먹는 악성 세입자처럼 머릿속에 틀어박혀서는 도저히 나갈 줄을 몰랐다.
오죽하면 그 작품 이름을 들었을 때, 주인공보다도 그 캐릭터의 얼굴이 먼저 떠오를 정도.
우리는 이 캐릭터를 두고 하는 용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신 스틸러(Scene Stealer).
지금의 이민기가 [캠퍼스 스토리]에서 소화해낸 역할이었다.
[조교님 매력 터져] [좀 피폐?한 모습이 있다 ㅋㅋㅋ] [진짜 피곤해 보이네. 가서 밥이라도 해 주고 싶어] [잘 생각해 보면 여주가 잘못한 거 아닐까?] [ㄹㅇ 조교님한테 왜 억지 부리고 난리냐고!! 자기가 제출 기한 늦어서 생긴 문제 아냐?]이민기가 맡은 캐릭터, 이남욱 조교는 엄밀히 말해서 악역이 맞았다.
다년간의 대학 생활에 찌들어 모든 게 귀찮다.
처음에는 해맑은 새내기였지만, 지긋지긋한 대학 생활이 그를 이기적인 인물로 만들어냈다.
그의 유일한 꿈이라면 어서 학위를 따내고 취업해 떠나는 정도일까.
– 아, 진짜 학교 엿 같다.
정상적인 시선이라면 호감이 들 수가 없는 캐릭터였다.
대놓고 노린 악역이라고 봐도 좋았다.
어지간한 대학생의 머릿속에는 깐깐한 조교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잘 박혀 있으니까.
단지.
[우리 학교에는 왜 저런 조교 없어? 왜 우리만 없어?]이민기가 맡은 조교 캐릭터가 예상 이상으로 매력적이었을 뿐.
[캠퍼스 스토리 이남욱 장면 움짤 모음집.GIF] [진짜 명짤… 명짤이다] [쟤 지난번에 야구장 관종남 아니야?] [오??] [헐 어떻게 둘이 같은 사람이야????] [완전 다르게 생겼는데??] [오 찾아보니까 쇼핑몰 모델도 하고 있대]시청자들의 평가는 정직하다.
원래대로라면 뜰 일이 없었던 배역을 이민기가 맡아서 떴다.
더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캠퍼스 스토리 10화는 특이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민기의 인생 또한 그러했다.
* * *
“…….”
이민기가 할 말을 잃었다.
단역으로 들어갔는데, 추가 출연을 시켜 준다기에 마냥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JC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거기에 이어서 시청자들의 반응까지 확인하자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이게 행복?’
가슴속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입가에 떠도는 웃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물론, 몸을 키워야 하니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는 했다.
고구마에 닭가슴살, 샐러드 믹스에 아몬드 다섯 알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지.
최근 금전 여유가 생긴 덕에 보충제도 깔끔하게 타 먹었다.
‘좋아, 잘 풀리고 있다. 앞으로도 잘해보자.’
이 기세를 이어, 아예 다음 편부터는 조연급으로 자리매김해버리는 거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한 번 일어난 기적이 두 번 일어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민기가 자리에 앉아 준비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아, 아.”
대본 리딩이었다.
“야, 넌 부모님이 교수님이잖아. 네 통장에 만 원이 없는 거랑 내 통장에 만 원이 없는 거랑 같겠냐? 나는 진짜로 삐끗하면 길거리 가서 노숙해야 되거든?”
김희진 작가에게 받아낸 대본에는, 이번 화부터는 ‘이남욱’의 역할이 대폭 보강되었다.
‘성격이 배배 꼬인 이유를 만들어냈네.’
원래 이민기가 아는 [캠퍼스 스토리]에서 이남욱은 그저 건성인 조교였다.
딱 전형적인 조교.
아래로는 학부생들한테 치이고, 위로는 교수님한테 노비처럼 이용당하는 조교.
하지만 새로 받은 대본에서는 그 캐릭터성이 완전히 바뀌었다.
‘조명하는 방식을 조금 바꿔준 것만으로도 캐릭터가 확 살아났다.’
여자 주인공에게 궁시렁거리면서도 교수님에게 설득을 시도했다.
“아, 어떻게 그걸 진짜로 모른 척해. 걔 장학금 한번 못 받으면 인생 꼬인다는데…… 하, 내가 꼭 입으로 말해야 알겠냐?”
불과 장면 하나로 이남욱이 흔히 말하는 츤데레 캐릭터로 재탄생한 것.
이것이야말로 김희진 작가의 주특기였다.
스테레오 타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캐릭터를 만들되, 거기에서 딱 한 박자만 꺾어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이민기가 연기한 이남욱이라는 캐릭터였다.
‘좋아, 이 캐릭터, 어딘가 나랑 잘 맞는다.’
이민기의 얼굴에서 마냥 해맑기만 했던 표정이 어느덧 사라졌다.
삶의 무게에 찌들어 나쁘게 살려 노력하면서도, 마냥 주위 사정을 무시하지는 못하는 ‘어설픈 이기주의자’ 캐릭터가 서서히 나타났다.
‘여기에서 맛을 하나만 더 가미해 보자면, 흠, 뭐가 좋을까.’
반면, 그렇게 대본을 이어나갈수록 이민기의 고민은 역으로 더 깊어졌다.
단역이 주 조연을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적은 분량을 극복할 만큼 강렬한 캐릭터성이 있어야 한다.
이게 단역 연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였다.
“아메리카노에 샷 두 개 추가……웁. 켁, 켁, 아야야…….”
리딩 연습을 하다가 실수로 혀를 씹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연습하다 보면 은근히 흔한 일.
‘잠깐 발음 연습이나 하고 다시 시작해야겠다.’
김아성 트레이너가 가르쳐 준 발음 연습 기법이 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물부터 마시고.
“푸하.”
그렇게 목을 축인 이민기가 다시 연습에 빠진 사이.
어딘가에서는 그가 차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그것을 아는가.
드라마에서 어느 누군가의 분량이 늘어난다는 건 곧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다른 누군가의 분량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캠퍼스 스토리]의 기존 출연진들이 그러했다.‘아, 짜증 나.’
이민기의 등장에 한층 더 짜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 또한 있었다.
신인 배우 박태견.
이번 드라마에서 서브 남자 주인공 정도의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보통 로코에서 서브 남주라고 하면 주연급이 맞다.
방송국에서도 홍보 차원에서 주연으로 밀어주며, 작품에 따라서는 주연이 남자 주인공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릴 때도 흔하지 않았나.
하지만 [캠퍼스 스토리]는 조금 달랐다.
서브 남주가 주연과 조연 사이에 낀 어중간한 입지라고나 해야 할까.
작품이 워낙 순애 로코에 가까운 탓이었다.
‘지금도 가뜩이나 분량이 적어서 스트레스 쌓여 죽겠는데, 여기서 더 뺏으면 뭐 어쩌라는 거야. 그냥 구석에 찌그러지라고?’
박태견이 그러했다.
가뜩이나 적은 분량에 불만을 품었던 그였다.
아예 굴러온 돌, 이민기까지 출연 분량이 늘자 분노가 화산처럼 치밀어오를 지경이었다.
‘지금 장난해?’
박태견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분노가 담긴 발걸음으로 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
사실, 김희진 작가는 처음부터 이번 작품에 서브 남주를 키울 계획이 없었다.
다양하게 써먹을 역할 하나쯤 있어서 나쁠 게 없으니 넣었을 뿐.
즉, 원래부터 주연의 탈을 쓴 조연이라고 봄이 옳았다.
따지고 보면 신인 배우가 이런 자리를 따내기라도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다만, 박태견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 자식, 좀 꿍꿍이가 이상해. 소속사도 JC라고 했지.’
하필 이민기가 첫 등장부터 시청자들의 주목을 가져간 것도 그러했다.
당장은 단역이라고 하지만, 또 혹시 모를 일 아니겠나.
지금보다 더 분량이 늘어날지도.
어쩌면 그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말이다.
물론 김희진 작가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마침 대본에서도 같은 장면에 겹치는 거 보면 뭔가 있어. 분명 있다.’
하지만 신인 배우의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기 시작한 피해망상을 멈출 방법은 없다.
그렇게 중간에 끼어 스트레스만 잔뜩 받는 와중이었다.
‘어?’
복도를 걸어가던 박태견의 눈에 멀리서 목소리가 들어왔다.
대기실.
그러니까 촬영이 시작하기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점인데, 임시로 마련한 대기실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깥에 다 들릴 정도로 말이다.
“지기, 지기, 자가, 자가, 주구, 주구. 치키,치키, 타카타카. 나니누네노.”
그것도 해괴한 발음을 중얼거리면서.
‘뭐지?’
호기심을 느낀 박태견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걸어 문이 열린 대기실 쪽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오호라.’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민기였다.
그가 자리에 앉아서는 해괴한 발음을 연발하고 있었다.
“닥닥닥닥, 낙낙낙낙, 칵칵칵칵, 탁탁탁탁, 팍팍팍팍.”
새는 발음을 막기 위한 연습 방법이었다.
이 연습을 꾸준히 하면 귓가에 깔끔하게 파고드는 딕션을 만들 수 있다.
연습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공용 대기실에 미리 와서 연습하는 건 그냥 성실한 거고.
하지만 박태견의 눈에 비친 이민기의 행동은 뭐라고 해야 할까.
‘병X, 눈에 띄려고 별 개지랄 쌩쇼를 다 하네.’
마냥 고깝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잠시, 문득 박태견의 가슴속에 악동 같은 감정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조용하네.’
인적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아직 촬영을 시작하기까지는 여분 시간이 남았기 때문.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를 잠시.
이내 박태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올라왔다.
‘살짝만 군기를 잡아보실까.’
그의 버릇이었다.
대학교 연극영화과 학부생 시절부터 일명 군기 반장으로 통했던 그다.
상대는 기껏 해 봐야 첫 단역 역할을 받은 신인. 게다가 어리버리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면 성격도 그렇겠지.
살짝 분위기를 만들어 압박하는 정도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당장 다음 화에 맞부딪치는 전개가 예정되어 있지 않나.
그 전에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를 눌러 주자.
‘원래 건방진 신인한테는 콧대를 눌러 줄 사람이 필요해.’
미리 신고식을 치러 줄 뿐이다.
그렇게 박태견은 엄한 마음을 가지고 대기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선배로서 위엄 있게 한마디만 해 줄 생각으로 말이다.
그렇게.
박태견이 큰 걸음으로 대기실 바닥을 밟은 순간이었다.
“으헉?!”
그의 몸이 예술적인 각도로 기울더니, 그대로 붕 떠올랐다.
콰당탕!
발이 미끄러졌다.
조금 전 이민기가 마시다가 흘린 물을 밟아버린 탓이었다.
“아야야야…….”
요란하게 굴렀다.
박태견은 아픈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앞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이민기였다.
그가 측은지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박태견의 얼굴에 화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쪽팔린다.
윽박지르려고 들어왔는데, 초장부터 이런 꼴이라니. 이래서야 군기 잡기는 시작부터 그르지 않았나.
그냥 물러나면 그만일 일이다.
하지만 이유 모를 분노와 수치심이 맞물려져 박태견의 머릿속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야.”
박태견이 윽박지르듯 외쳤다.
“너 죽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