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30)
운빨로 탑스타-30화(30/200)
제30화
배역 오디션의 일반적인 진행 절차는 이러하다.
먼저, 제작사에서 약간의 시놉시스와 배역 설명이 적힌 공문을 각 기획사 및 학원으로 배부한다.
그 뒤 오디션 참가자들이 모이거든, 그제야 현장에서 발췌한 대본을 제공한다.
실제 영화에서 촬영할 장면 몇 개가 포함된 대본.
참가자들은 이 대본을 현장에서 보고, 거기에 맞춘 연기를 심사관들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중요한 게 이 부분이다.
‘대본 암기까지 참가자에게 주는 시간이 천차만별이지.’
대본 두세 장을 건네고는 암기하라며 10분 남짓하게 준비 시간을 제공하는 곳이 있었다.
이번 [언제까지고 푸르른]의 제작사, 울트라 스튜디오가 마침 그런 곳.
즉석 대본이라고는 하나 빼곡하게 적힌 글자로 3장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대사를 암기하고 캐릭터를 분석하고, 자기 자신한테 맞게끔 뜯어고쳐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민기의 경험상 이런 곳들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때로는 한두 번 간신히 읽을 시간만 준 뒤, 즉석에서 바로 연기를 시키는 곳도 있었으니까.
‘슬슬 시작해 볼까.’
오디션 대기실.
이민기는 스태프가 전해 준 대본을 붙잡기에 앞서, 잠시 주위를 훑어보았다.
대기실에는 이번 오디션의 지원자들이 저마다 꽈리를 튼 채 대본을 붙잡고 저마다의 개성을 보이고 있었다.
먼저, 벌써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후우.”
“아…… 아…….”
아무런 말도 없이 대본에서 눈을 고정한 채 손톱을 씹거나 다리를 달달 떤다.
양손을 모으고 작게 속닥이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런 사람들은 대개 신인들이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사실 지금도 그렇고.’
신인 때 배역 오디션의 무게감은 장난이 아니니까.
한 번이라도 탈락하면 기껏 들어간 기획사에서 버림받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하지만 기성들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바로.
‘캐릭터를 조금이라도 더 고민해 보자.’
편안한 자세로 앉아 대본을 붙잡으며 작게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이 진짜 경쟁자들이다.’
이민기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고는, 핸드폰을 꺼내 김아성 트레이너가 그에게 해 주었던 말들을 되새김질했다.
김아성 트레이너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외우지 마. 굳이 단어 하나하나 완벽하게 외울 필요 없어. 그냥 맥락만 숙지한 다음 적당히 흘리고, 그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일지 깊게 분석해 봐.]대본을 완벽하게 외우는 건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이민기도 한때는 대본 암기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본을 최대한 꼼꼼하게 외우면 그게 곧 연기의 완성도로 이어지리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심사위원들이 두뇌 회전이나 성실성을 봐주리라는 기대도 있었고.
하지만 이제 안다.
그게 잘못된 방식이라는 걸 말이다.
[대본을 외우면 대사가 정확해지겠지. 하지만 대본을 내려놓으면 연기가 살아난다. 이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뭘 보고 싶어 할지는 안 봐도 뻔하지?]김아성 트레이너의 말이 맞았다.
‘심사위원들이 정말로 보려 하는 건 캐릭터다.’
그들은 설령 대사를 틀리더라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대사 암기가 부족한 정도는 괜찮다.
그건 시간을 조금 더 주면 해결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캐릭터를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못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이민기도 방향을 바꿨다.
‘캐릭터를 외우자.’
생각을 마친 이민기가 사락사락 종이를 넘겨 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대본이 적혀 있었다.
[언제까지고 푸르른 – 배정욱]여기 옆집 사람이요? 아, 그러고 보니까 수상하기는 했어요. 집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해야 하나?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데요. 옷을 되게 두껍게 입고 나오는데 그걸 레인코트라고 하나? 맞네, 우비, 그걸 얼굴까지 안 보이게 덮어쓰고 나오거든요.
그럴 때면 꼭 눈이 충혈되어 있는데, 이상한 공구 상자를 손에 들고나오고.
집에다가 사람을 데려갈 때도 있는데 그렇게 들어가고 나면 한참이나 안 나와요.
사람을 데려갔잖아요.
그럼 뭐라도 말소리가 들려야 하잖아. 떠드는 소리든 뭐든 근데 안 들려.
집에서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네.
왜요, 내가 이상해요? 옆집 사람한테 너무 관심이 많아서? 그건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자기네 집에서는 층간소음만 들려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난리면서.
………
……
…
이민기가 작게 숨을 토해냈다.
이걸 통째로 다 외우려니 당연히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지금, 이 오디션 대기실에서 그만 가진 장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 영화 내용을 이미 안다.’
봤으니까 알았다.
염광호 감독이 만든 작품은 거의 다 챙겨 봤지만, 그중에서도 [언제까지고 푸르른]은 무려 세 번을 정주행했다.
세세한 대사를 전부 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저 대사를 배우가 어떻게 소화했는지, 작중에서 누구와 대화하면서 하는 대사들인지 이민기는 모든 걸 숙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냥 시민이 아니다. 살인마가 작업용으로 구해놓은 옆집에 사는 주민이야.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운데 소주 한잔 걸친 참에 갑자기 취재받는 참이라 은은하게 불쾌감을 내 비추기도 했고.’
옆집 사람이 살인마라는 걸 모르는 건 물론, 형사라는 사실도 모른다.
그 집에 들락날락할 때 형사 제복을 입고 방문한 적은 없었으니까.
‘좁은 문 앞에 서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몸은 기울겠지. 프레임 안에 갇혀서 위축될 테고. 당황스러울 거야.’
같은 연기를 해도 정확한 상황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하물며 이민기의 머릿속에 담긴 건 완성된 영상이었다.
이 시기에는 감독조차도 모를 그 영상.
이민기에게 남은 과제는 그에게 맞춰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뿐.
그런데.
‘…….’
갑자기 턱 막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따금 정말 사소하게 들은 말이 목에 생선 가시처럼 박힐 때가 있지 않나.
발가락 사이에 낀 모래처럼.
짜장면에 극소량 들어가는 오이채처럼.
이번에는 아까 박한모 매니저가 그에게 했던 말이 그러했다.
[배우와 배역 사이에는 인간 상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배우님 배역은 좀 건조한 캐릭터고. 제가 생각하는 배우님 캐릭터는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더 자극적인 맛이 있어야 하거든요. 격렬하게!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짠맛!]그의 캐릭터가 조금 더 자극적이라고 했다.
꼭 매니저의 말대로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캐릭터를 분석하라고 했지, 따라 하라고 한 적은 없었다.
과연 완성된 영화에서 나온 연기를 모방하는 게 이민기, 그의 연기일까. 감독들은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
그러한 연기가 과연 자신이 지향하는 바인가.
남의 연기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따라 한다면, 과연 그 맛을 그대로 살릴 수 있을까.
‘내 연기는 어떤 연기지?’
잠시 고민이 겹치고 겹쳤다.
그리고.
‘생각만 쓸데없이 많아서 문제야. 일단은 할 일을 해 보자.’
이민기는 행동에 옮겼다.
대본을 배부받고 1분 30초 지난 시간이었다.
* * *
오디션장 내부.
“예,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8번 김대철이었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앞서 8명의 심사를 마친 염광호 감독이 지친 숨을 내쉬었다.
“후우.”
“감독님, 왜 그러십니까.”
그런 그가 염려스럽다는 듯 예술감독이 물었다.
“역시 너무 과로하셔서.”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제 정신은 맑고 또렷합니다.”
“그럼 역시, 오디션이 문제군요.”
“예.”
염광호 감독이 예술감독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아직은 확 와닿는 무언가가 없네요. 범인의 옆집 사는 일반인이라는 캐릭터라서 그런가? 다 너무 소시민 캐릭터만 연기하려 하는 것 같고.”
“하하, 소시민이 맞으니까요.”
“예, 맞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방향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뭔가가 아쉽다.
김이 빠진 콜라 같다고나 할까.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스릴러라고 하면 배우의 연기가 워낙 중요하다 보니, 이런 사소한 게 작품의 질 자체를 끌어내릴 때가 있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런 염광호 감독을 위로하듯 예술감독이 웃음이 담긴 목소리를 건넸다.
“남은 지원자들이 한참 남았습니다. 설마 인물 한 명은 나오지 않겠습니까.”
“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아, 슬슬 시작이군요.”
잠시 뒤, 무대를 겸해 설치된 오디션장 커튼 옆쪽에서 어느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어두운 무대.
그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아슬아슬하게 비추는데, 아래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참가자의 이름은.
“9번 이민기입니다.”
이민기였다.
‘흐음.’
염광호 감독이 그의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러했다.
‘우선 마스크는 나쁘지 않군.’
마스크는 괜찮았다.
소시민 역할에 맞게 살짝 여리여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다소 잘생긴 외모가 몰입감을 깰까 걱정이긴 하지만, 저 정도는 분장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범주였다.
참가자들은 모르겠지만, 어차피 현장 카메라에서는 술에 취해서 달아오른 얼굴로 찍힐 테니까.
“시작하세요.”
염광호 감독의 말과 함께 이민기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3초 뒤.
한순간에 변화가 나타났다.
‘오?’
이민기의 변화, 그건 바로.
“여기 옆집 사람이요? 아…… 누구지? 좀 수상하기는 했는데. 집에서 이상한 비린내가 난다고 해야 하나? 예, 그랬지.”
건들건들해졌다.
특히 대사에 사족이 많이 붙었다.
소시민을 넘어서 살짝 삶이라는 것 자체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 같은 표정과 몸짓.
‘의도한 건가?’
지금까지의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면모에 염광호 감독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더 봐야 할 일.
그런데.
“집에 사람을 끌고 들어갈 때도 있는데, 그렇게 들어가고 나면 문 잠그잖아. 그러고 한참이나 안 나와.”
갈수록 대사가 원본에서 멀어졌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반말을 섞어가는 게 살짝 자극적이라 딱 좋았다.
괜히 집에 찾아와서 취조를 하는 경찰에 대한 반감이 팍팍 느껴진다.
소시민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기에 나오는 캐릭터가 있었다.
‘단순히 대본을 암기하고 줄줄 읊는 수준은 넘었네. 신인이라고 했나? 하는 가락만 보면 오디션장 많이 들락날락해본 것 같은데?’
지금, 염광호 감독의 눈에는 이민기가 촬영장 세트에 서 있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저걸 카메라로 찍으면……흠, 구도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니 숏으로 찍어 볼까? 불안불안한 느낌이 확 살 것 같은데. 아니면 다운앵글을 섞어?’
좋은 조짐이었다.
이민기의 연기를 보고 단순히 연기력을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그 용도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
이민기가 안다면 기뻐서 춤을 출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오디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이민기는 이제 대본 따위는 옛적에 잊어버렸다는 듯 반쯤 창작으로 독백을 이어나갔다.
“에헤이, 아니, 남의 집에 왜 함부로 발을 들이시려고 그러나. 영장은? 영장 없이 이렇게 막 침입하려고 그러고. 이거 범죄인 거 알아요? 이봐요. 나도 세금 내는 대한민국 국민이야.”
그렇게 약 20초 뒤.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이민기의 연기가 끝이 났다.
“감사합니다. 9번 이민기입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염광호 감독의 시선에는 야릇한 아쉬움의 감돌았다.
연기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캐릭터의 문제도 아니다.
당장 저 연기 그대로 채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갈증이 있었다.
활용하고 싶은 갈증.
좀 더, 다르게 활용하고 싶은 갈증.
그래, 예를 들자면.
“잠시만요.”
염광호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네?”
이민기가 움찔하더니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춘 사이, 염광호 감독은 자기 행동의 변명거리를 찾듯 입을 옴짝달싹했다.
그렇게 몇 초.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는 말했다.
“그쪽 연기는 이 정도면 됐고, 이 대본도 한번 읽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