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43)
운빨로 탑스타-43화(43/200)
제43화
[언제까지고 푸르른]의 촬영이 끝난 뒤.이민기가 집중한 일은 하나였다.
‘인풋이 부족하다.’
인풋을 쌓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뮤지컬을 보러 갔다.
필요하다면 현장 견학을 요청하기도 했다.
절대적인 인풋.
이민기가 [언제까지고 푸르른]을 촬영하면서 가장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었다.
‘시야가 깨인 뒤에 보는 것과, 시야가 깨이기 전에 보는 게 완전히 달라.’
남의 연기를 보고 분석하고 감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라면 어떨까.
머릿속에 넘치도록 꾹꾹 눌러 넣은 연기를 자기 자신에게 반영하는 것.
이민기는 이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마냥 쉬엄쉬엄 지내기만 한 건 아니고.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민기 씨는 갈수록 발성이 좋아지시는 것 같네요.”
“목소리가 너무 컸나요?”
“아닙니다. 기운차서 좋네요.”
유규언 대표의 쇼핑몰에 방문해 패션모델 일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델 일 또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애티튜드(몸가짐)를 익힌다는 점에서 좋은 공부가 됐을뿐더러, JC 엔터는 이런 부분에서 배우의 의지를 존중했기 때문.
재밌기도 하고.
“이번 옷도 좋은데요?”
하물며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옷이 저한테 딱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민기가 건네받은 옷을 입은 채로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포즈를 바꾸며 디테일을 살폈다.
그리고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예전에는 남의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 나한테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마치 맞춤 정장을 입은 것만 같은 기분.
놀라서 계속 그 이유를 궁리하고 있으려니 유규언 대표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민기 씨 체형에 맞는 옷을 매번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체형이요?”
“예,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만. 비슷한 스타일의 옷이라도 입는 사람의 체형에 따라 아예 다른 옷이 되거든요.”
유규언 대표가 이민기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민기 씨의 특징이라면 어디 봅시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작고 어깨가 넓죠. 자세가 바릅니다. 전체적인 비율이 좋죠.”
“하하…… 과찬이시네요.”
“하지만 전문적인 모델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약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무난한 키가 그렇죠.”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의 키는 178cm 남짓으로, 180cm를 넘나드는 모델이 넘쳐나는 이 바닥에서 특출난 수준은 아니었으니.
“다리 높이나 골반의 각도, 목의 길이까지 세세한 부분을 따지자면 전문 모델과는 거리가 있죠.”
조목조목 단점이 이어졌다.
“포징과 얼굴의 색채도 그렇습니다. 이목구비가 필요 이상으로 또렷한 모델은 사실 옷의 색채마저 묻어버릴 수 있어서 위험할 때가 있지요.”
평소 사람이 좋았기에 한층 와닿는 말들.
쉴새 없이 비수처럼 꽂히는 지적에 이민기의 자존감이 나뭇잎 한 장만큼 하락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규언 대표의 입에서 앞서 말했던 것들과 완전히 상반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민기 씨의 강점입니다.”
반전의 시작이었다.
“민기 씨는 단순히 좋은 체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한 명쯤 있을 법한 멋진 체형입니다. 하지만 막상 찾아보면 잘 없지요. 그럭저럭 괜찮은 체형과 아주 훤칠한 체형,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좋은 건가요?”
“예, 오히려 기성복 모델로서는 마냥 외계인 같은 비율보다 한층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이다.
칭찬인 듯했다.
이민기의 내면에서 떨어져 나갈 뻔했던 자존감 한 잎이 강력 본드로 접착됐다.
“그래서 민기 씨에게 어떤 옷이 어울릴지 매번 고민했습니다.”
유규언 대표가 쇼핑몰 사무실 모서리를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말을 이었다.
“작은 머리에 어울리게끔 넥 카라를 조절했고, 넓은 어깨를 살리기 위해 어깨선을 조금씩 매만졌습니다. 이상하게 치수에 맞춰도 맞춰도 얼마 지나서 보면 틀어져 있어서 이상했지만요.”
“크흠.”
운동에 공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권준용 관장의 광기 어린 관리 아래 광배근(등 근육)과 삼각근(어깨 근육) 운동을 뼈가 갈려 나가도록 했으니.
[어깨 넓히는 게 어렵다면서요.] [응, 죽을 만큼 안 넓어지지.] [인터넷 보니까 해도 안 늘어나는 사람이 꽤 많다고.] [걔들은 죽을 만큼 안 해서 그렇고, 죽을 만큼 하면 넓어지더라고.]그래 봤자 1mm씩 찔끔찔끔 느는 수준이지만, 사람들 어깨가 다 비슷비슷하다 보니 그 차이가 컸다.
머리가 작아서 어깨가 대조적으로 더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었고.
“그렇게 지난 몇 달 동안 민기 씨에게는 어떤 옷이 어울릴까 매번 고민해 왔는데.”
유규언 대표가 옷장에서 옷걸이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요즘 들어서 슬슬 제 나름의 대답을 찾아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는 옷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건.’
코트였다.
얕은 회색으로 위에서부터 라인이 시원하게 쭉 뻗은 코트.
특이한 점이라면, 장식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민기 씨, 요리할 줄 아시나요?”
“그냥 자취 요리 정도만요.”
“그렇군요. 요리를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좋은 재료를 쓰면 쓸수록 자질구레한 편법으로 맛을 치장하기보다는, 재료 그 자체의 맛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거죠. 양념도, 부식도.”
그가 옷을 든 채 이민기에게 차차 걸어오며 말했다.
“미니멀 룩입니다. 필요한 최소한의 디테일을 제외하고는 과감하게 제거해, 민기 씨의 체형을 강조할 수 있게끔 디자인했습니다.”
미니멀 룩.
단순함의 미를 최대한 살린 패션을 의미했다.
딱 봐도 깔끔해 누가 입어도 무난하나, 패션 자체의 맛을 정말로 살리려면 타고난 피지컬이 필요한 패션.
그중에서도 이민기의 체형에 완벽하게 맞춘 미니멀 룩이었다.
“시제품입니다. 천천히 보시지요.”
유규언 대표에게 옷을 건네받은 이민기가 고급스러운 원단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와……완성도가 남다른데요. 지금까지 대표님이 만든 옷은 다 좋았지만, 이건 정말로 다른 것 같아요.”
“열심히 만들었으니까요.”
유규언 대표는 이민기의 옷 칭찬이 자기 능력에 대한 칭찬이라는 듯 기쁘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 말이 맞기도 하였고.
그런데 이민기는 한가지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대표님, 원래는 코트를 안 만들지 않으셨나요?”
그 말에 유규언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었죠.”
말 그대로다.
유규언 대표는 그간 다양한 종류의 옷을 만들면서도, 유독 코트만큼은 손을 안 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기는 만들었다.
판매하지 않았을 뿐.
그 이유를 유규언 대표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코트는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듭니다. 한번 사면 오래 입는 만큼, 판매량이 적어 소량생산이 필수적이죠. 많이 만들지를 못하니, 적게 팔립니다. 그래서 비싸질 수밖에 없지요. 판매가로 따지면 티셔츠의 수십 배지만, 공임도 그만큼 들어갑니다.”
위험부담이 큰 상품이라는 말이었다.
RTS 게임 속의 높은 테크트리 유닛처럼.
일단 뽑으면 성능이 좋지만, 대신 뽑아 놓고 망하면 손해도 컸다.
“그래서 기왕 만들 거라면, 그 전에 먼저 잘 입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유규언 대표가 그렇게 말을 하며 이민기를 바라보았다.
“…….”
말없이 멀뚱멀뚱 서 있기를 잠시.
이민기는 비로소 유규언 대표가 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자기 옷에 맞는 모델을 꾸준히 찾아왔다는 거구나.’
그게 나고.
유규언 대표라면 전문 모델들도 많이 접했을 텐데, 그들을 거르고 자신을 선택했다니.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하였다.
일개 잠깐 쓰는 모델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로서 인정받았다는 말 아닌가.
그렇기에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인정해 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제가 고맙죠.”
지금 이 순간, 이민기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만나 생활비를 해결한 걸 넘어, 기성복 모델로서 한 차례 더 나아갈 기회를 얻었다.
운이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깊게 따져보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운이 좋았다.
유규언 대표의 운은 이민기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니.
운이라는 건 호혜적인 것이다.
이용하고 버리려 했더라면, 그에게 또한 이런 운은 찾아오지 않았을 터.
“말 나온 김에 한 번 입어 보시죠?”
“……크흠. 네, 잠시만요.”
그렇게 잠시 머쓱한 분위기가 스쳐 지나가는 와중이었다.
부우우웅――
이민기의 핸드폰이 맹렬하게 울부짖었다.
“아, 잠시만요.”
그 연락에 이민기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을 때, 이번에 온 연락은 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박한모 매니저의 통화였는데.
“언론 시사회요?”
[언제까지고 푸르른].얼마 전 촬영을 마친 작품의 언론 시사회에 참석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는 이민기에게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나 신인인데?’
보통, 언론시사회 단계에서는 감독과 주연 및 인지도 높은 조연 정도나 오가는 게 관례이기 때문.
쌩 신인 배우를 자리에 동석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언론시사회에 참여한 배우의 얼굴이 곧 매스컴을 타고 영화의 얼굴이 되기 때문.
굳이 신인을 내세워 홍보력을 분산시킬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꼭 가야죠!”
그렇게 이민기가 수화기 너머의 박한모 매니저를 향해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와중이었다.
“네?”
이어진 말은 더더욱 난해했다.
– 드레스 코드가 특별히 있는 건 아닌데, 가능하면 말쑥하게 차려입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장이나 코트 같은? 없으시다면 이번 기회에 맞춤으로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괜찮은 협찬사들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옷을 잘 차려입고 오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있네?’
마침, 이민기에게는 맞춤 복장이라고 할 것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
아주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몇 달에 걸쳐 그의 체형을 파악하며 손수 제작한 시제품이 말이다.
이민기는 마치 신이 정교하게 짜 놓은 것만 같은 우연의 일치에 찌르르 소름마저 느끼며 말했다.
“저기, 매니저님, 지금 혹시 어디로 잠깐만 와 주실 수 있으세요?”
-예?
“있어요. 맞춤 코트.”
* * *
다음 주.
코엑스에서 [언제까지고 푸르른]의 본격적인 언론 시사회가 개최되었다.
언론 시사회란, 조만간 이런 걸 개봉할 예정인데, 와서 한번 보고 평가해 달라는 자리였다.
언론에게 소스를 뿌린다고나 할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진 좀 잘 찍어가서 홍보 기사 써 달라고 여는 것이었다.
“후우.”
예상치 못하게 함께 초대받은 주하나가 가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긴장되기 마련.
“긴장됩니까?”
그런 그녀를 강도원 배우가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 아뇨. 괜찮아요.”
내색하지 않으려는 주하나의 말에, 강도원 배우가 고개를 돌렸다.
타고난 얼굴 탓인지 묵직하다.
그 눈빛이 그녀를 한심하게 보는 것도 같아,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든 순간이었다.
“원래 신인 때는 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강도원 배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카메라 플래시 터질 때 턱 집어넣지 않도록 의식하고, 콧구멍 벌름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
따뜻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은 콧구멍을 벌름거린다는 말이 대선배의 입에서 나온 게 어째서인지 웃겼다.
작은 웃음과 함께 주하나의 마음속 긴장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강도원은 인상과 말투가 딱딱해서 그렇지, 겉보기보다 주위를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주하나의 머릿속으로 곧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민기 씨는 언제 오시려나.’
이민기의 모습이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와중이었다.
그 사람은 신인이라기에는 이상하리만치 노련한 느낌이 있는데, 과연 이런 행사에서도 그 여유를 보여줄까.
‘괜히 궁금해지네.’
그런 와중이었다.
“저 사람 누구야?”
“대박.”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를 잠시, 인파를 헤치고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
그 끝에 등장한 사람의 모습에, 주하나가 가뜩이나 큰 눈을 훨씬 더 크게 떴다.
“먼저 오셨네요.”
“…….”
“하나 씨?”
“…….”
“하나 씨.”
“아, 네, 넥……!”
놀라서 말을 더듬다가 실수로 혀를 씹었다.
창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지나치게 비주얼이 좋은 사람을 보면, 순간적으로 뇌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거.
마침 이민기의 뒤편에서 쏟아지는 조명이 그의 실루엣을 강조해 흡사 르네상스의 명화를 자아낸 것도 한몫했다.
‘옷 핏이 미쳤어.’
이민기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어우, 역시 강도원 배우님이랑 최유창 배우님이 오셔서 그런가. 사방에서 시선이 따갑네요.”
아니, 너 때문이다.
너요, 너.
너.
주하나는 턱 끝까지 나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