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55)
운빨로 탑스타-55화(55/200)
제55화
[페인 킬러].이민기가 생각하기에, 일반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재밌게 볼 수 없는 작품이었다.
여기서 일반적인 취향이란 대중의 입맛을 의미했다.
왜, 그런 영화들이 있지 않나.
감독이 이 세상을 증오하기라도 하는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만든 그런 작품들.
페인 킬러가 그런 작품이었다.
[감독이 너무 싸이코 같음] [아…. 보면서 가슴이 아파서 버틸 수가 없음] [영화관에서 1시간도 못 버티고 나왔다] [주인공이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감독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철저하게 관객들의 기대를 배신하게 만들어진 영화였다.
잘나가는 사회인 주인공의 삶이 망가지는 과정을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려내는데, 그게 참 고역이었다.
사랑받으며 살던 주인공이 언론의 오보 한 통에 대중에게 버림받고, 직장에서 버림받고, 가족에게 버림받는다.
끝내 자유마저도 박탈당했다.
철저하게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를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보는 이의 마음을 찢어버리는 데 집중했다고나 할까.
‘저거 보는 거 진짜 고문인데.’
상업적인 성과를 따지자면 묻혔을 작품.
문제라면, 저걸 만든 감독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마누엘 바그너.
무려 세계 명작 영화 100위 안에 자기 이름으로만 세 작품을 올린 불세출의 천재 감독의 작품이었으니까.
‘심지어 유작이지.’
죽으면서 남긴 작품이 저것이었다.
유작이라서 자기 입맛을 140% 반영한 건지, 바그너는 원래부터 매운맛 영화를 잘 만드는 거로 유명한 감독이었는데 [페인 킬러]는 그중에서도 날것이었다.
영화 좀 봤다는 사람도 혀 데이고 퉤퉤 뱉는다는 작품.
어지간해서는 볼 일이 없을 테지만.
물론, 이민기는 예외였다.
‘김태양, 영화 좀 볼 줄 알았구나.’
그는 이 세상의 어느 똥 영화라고 한들, 장점 하나만 있다면 그걸 붙들고 끝까지 재밌게 볼 수 있는 잡식 동물이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마누엘 바그너 작품이다 보니 완성도는 환상이었다.
[Society, so pathetic, so cinematic.]그렇게 한 발 떨어져서 화면에 몰두하던 와중이었다.
“아.”
김태양이 뒤늦게 이민기의 존재를 알아챈 듯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감명에 젖어 있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굳은 채로.
‘내 알 바냐.’
이민기는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이 영화, 좋아하시나 봐요.”
“……이거 아십니까?”
다음 순간.
이민기의 입에서 선명한 답이 흘러나왔다.
“페인 킬러 아니에요? 마누엘 바그너 감독의 유작. 개봉한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요.”
그 순간 김태양의 눈빛에 작게 이채가 돌았다.
설마 알아볼 줄이야.
하지만 이 충격마저도 다음 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되게 재밌게 봤거든요.”
말 한마디에 김태양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눈빛의 정체는 이러했다.
‘페인 킬러를 재밌게 봤다고? 이 사람, 제정신인가?’
앞서 이민기가 했던 생각과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거의 고문 취급받는 작품을 봤다는 것만 해도 신기한데, 심지어 그걸 또 재밌게 봤다니.
‘혹시 마조히스트 아닌가.’
이민기가 앞서 했던 추측이 한순간에 김태양의 머릿속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마누엘 바그너가 유명한 감독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재밌었다는 사람은 그의 지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감독 이름 때문에 제목만 들어보고 아는 척하는 거 같은데. 줄거리 정도 안다면 모를까.’
이민기의 인풋이 대단하다는 건 그도 알았다.
당장 JC 오디션 때만 해도 심사위원의 낚시를 웃으며 빠져나갔으니까.
하지만.
“진짜 오랜만에 보네.”
이어진 말에서 김태양은 이민기에 대한 평을 재평가해야만 했다.
“지금 주인공이 믿었던 직장 상사한테 배신당하는 장면 맞죠?”
“그건.”
“직장 상사가 오해를 풀어 주겠다면서 인터뷰하자고 찾아왔는데, 실제로는 그 사람도 주인공한테서 기삿거리 하나 뽑아가려는 배신자였잖아요.”
“…….”
“저 장면에서 저기 유리 창문 사이로 두 사람을 보여주는 구도. 저게 그 복선이고요. 물리적인 문은 열렸지만, 정신적인 문은 안 열렸다는 거지요. 주인공도 그걸 미리 눈치채서 쫓아내고.”
영화를 깊게 관찰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해설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민기는 아예 거실 의자 하나를 끌고 와서 앉더니 말을 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건물이 전체적으로 낮게 찍히고 하늘이 많이 보였죠. 그때는 사회가 따스한 공간처럼 연출됐어요. 하지만 지금은…… 건물이 커튼처럼 주인공을 에워싸고 있죠. 압박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상한 일이다.
그냥 봤다는 것만 해도 이상한데, 너무 자세히 알고 있지 않나.
김태양은 여전히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한 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럼 지금 주인공이 먹고 있는 오트밀은 뭡니까?”
함정이었다.
본 사람은 물론, 적당히 본 사람마저도 낚일 수밖에 없는 질문.
하지만 이것까지 맞춘다면, 이민기는 그와 동류가 맞다.
그렇기에 다음 답변을 두고 기대 반 의심 반을 교차시킨 순간이었다.
“아, 저거는 말이죠.”
이민기의 입에서 너무나도 가볍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의미가 없다? 정말입니까?”
김태양이 이민기를 추궁하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재차 물었다.
“저 오트밀을 해석할 때는 보통, 처음에는 화사한 식단을 고집하던 주인공이 점차 식사를 대충 때우며, 피폐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하지 않습니까?”
“그게 말이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번 지적에도 이민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답변했다.
“사실 평론가들이 멋대로 해석을 덧붙인 거죠. 실제로는 감독이 오트밀을 워낙 좋아해서 오트밀을 집어넣은 건데요.”
“…….”
“마누엘 바그너 감독이 어렸을 때 오트밀을 되게 좋아했는데, 부모님이 못 먹게 막았다고 하죠. 그래서 독립한 다음에는 입에 달고 살았다나. 촬영장에서도 심심하면 먹었고요.”
너무나도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자못 영화라는 건 매 순간이 감독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마치 정교한 시계처럼,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사물이라고 한들 감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런데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니.
심지어 감독이 마누엘 바그너라는 거장인데.
누가 저런 말을 믿겠나.
하지만.
‘정확하다.’
정답이었다.
그것도 의심의 여지 없이 핀포인트로 저격한 정답에 김태양의 가슴속으로 자그마한 감탄이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나갔다.
‘어떻게 안 거지? 이건 가짜 해석이 너무 퍼져서 어지간히 봤다는 사람들도 다 잘못 알고 있는데.’
[페인 킬러]를 그냥 본 사람이라면 대답 자체를 못 내놓으리라. [페인 킬러]를 깊게 본 사람이라면 오트밀에 부자유를 상징하는 연출이 담겨 있다고 말했으리라.하지만 [페인 킬러]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저기에 아무런 연출도 없다고 대답했으리라.
이민기는 세 번째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말인즉슨.
“영잘알(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시군요.”
이민기가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영화에 한해서라면.
“민기 씨가 이걸 보셨을 거라고는.”
“저야말로요. 저 말고 이거 재밌다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네요.”
“흠, 마누엘 바그너 감독 작품은 하나같이 다 재밌죠. 완성도부터 남다르고.”
“확실히 소품 하나하나까지 그 안에 담긴 디테일이 대단하기는 하죠. 오죽하면 뉴욕 타임스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어…… 뭐라고 했더라? 되게 유명한 말이 있었는데.”
“바그너 감독의 작품은 0.5초마다 일시정지 하고 곱씹어야 한다?”
“아, 맞아요, 그거죠. 망했다던 영화가 10년 만에 재평가되기도 하고.”
김태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누구는 페인 킬러를 두고 바그너 감독이 죽으면서 똥을 쌌다…… 고까지 말했지만,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전 오히려 이게 바그너 감독의 정수라고 봅니다.”
“그렇죠. 죽음을 앞에 뒀으니까 오히려 혼을 갈아 넣을 수 있었던 거죠.”
일주일 동안 변변찮은 대화랄 게 없었던 두 사람이다.
분명 그랬던 것이 불과 영화 해석을 주고받자마자, 대화의 꽃이 총천연색으로 만개하기 시작했다.
‘괜히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군. 분석의 깊이가 남달라. 대체 얼마나 많이 본 거지?’
김태양은 이민기를 속으로 재평가하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이민기와 함께 살며 그의 생활상에 나름대로 실망했던 그였다.
가진 연기력에 비해 평소 생활 루틴에서 특별하다고 할 게 없었기 때문.
오히려 집에서 너무 풀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끝내 찾아냈다.
이민기가 보이는 실력의 원천은 바로.
‘압도적인 인풋을 바탕으로 한 아웃풋이었군.’
인풋이었다.
적어도 이민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30시간 작품만 보고 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인풋의 끝을 알 수가 없었다.
하물며 300년 묵은 서당 개처럼 입에서 사서삼경이 술술 흘러나오지 않나.
“바그너 감독, 슈텐데라 감독, 베트클로 감독. 이 셋이 독일 영화계의 삼대장이죠. 마침 셋 다 서로 도제 관계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보면 공유하는 코드가 있어요.”
“바그너 감독의 오트밀이 베트클로 감독의 작품에서도 계속 나온다거나 하는 거군요.”
“네, 안다고 해서 영화 내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알면 아는 대로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예로부터 시네필(영화광)들끼리는 친해지기 쉽기 마련이었다.
평소 성격이 안 맞든, 음식이 안 맞든, 사람이 안 맞든,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방 날밤을 깔 만큼 대화의 꽃이 피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 영화가 마니악한 작품일수록 진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서로를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이 그러했다.
“태양 씨, 저 장면을 보시면 구태여 로우앵글로 촬영했죠? 저런 구도에서의 그룹 샷이라면 하이앵글로 촬영하는 게 정석인데도.”
“흠, 그렇군요? 저 장면을 왜 저렇게 촬영했지?”
“주인공의 다리만 보여서 존재감을 드러낸 거죠. 오히려 주인공이 우세해 보이게끔.”
“아.”
“하지만 저렇게 선별 초점(특정 한 명에 집중하는 촬영 방식)으로 찍으면 심도 문제로 거리감을 연출하기 어려워져요. 그래서 사실 저쪽 인원은 따로 촬영해서 합성하고, 그 위에 블러(흐림 효과)를 씌운 거라고 하네요.”
“되게 자연스럽게 처리했군요. 민기 씨는 이런 걸 어떻게 아신 거죠?”
“다큐멘터리 보면 나와요.”
대화가 이어졌다.
끊임없이 물꼬를 트며 이어졌다.
바그너로 시작된 이야기가 유럽을 거쳐 할리우드로 가더니, 어느새 국내 영화감독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다음에는 현장 이야기로.
또 취향 이야기로.
무한 도돌이표가 이어졌다.
“태양 씨랑은 영화 취향이 좀 맞네요.”
“그렇군요. 이런 작품들은 평생 저만 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우연히.”
“그렇죠. 남들은 이해 못 해주잖아요.”
“영화 좀 보자고 꼬셔도 맨날 이상한 거만 골라 먹어서 싫다나.”
“아, 이런 건 우리끼리나 먹는 거죠.”
어느 순간부터는 농담마저 흘러나올 정도가 되었고, 그다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참, 야식 좀 먹으면서 하죠.”
“야식 좋죠. 마침 배고프던 참인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이민기의 표정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잠깐 영화 이야기 좀 나누는가 했더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뭐 시킬까요?”
“만들 겁니다.”
그 순간 김태양이 부엌으로 가더니 앞치마를 질끈 동여맸다.
이어서 냉장고에서 새우와 마늘을 꺼내더니, 올리브유를 끓이기 시작했다.
감바스였다.
비주얼 대비 만들기 쉬운 스페인 요리의 대명사.
‘칼로리가 좀 나가기는 하지만…… 오늘은 치팅데이니까. 응, 냄새 되게 좋네.’
향긋한 냄새가 주방에서 풍겨오는 걸 맡기를 한참, 이민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편하네?’
집이 편해졌다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집이 콘크리트 우리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지트처럼 아늑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바뀐 거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사람과의 관계였다.
역시, 집이란 누구와 사는가가 가장 중요한가 보다.
‘앞으로는 영화라도 자주 봐야겠네.’
이민기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사람이 되게 딱딱하다고 느꼈는데, 막상 공감대를 찾고 나니까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다.
오히려 반대였다.
바그너 감독을 주제로 신나서 떠들만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김태양은 확실히 인복이었다.
어쩌면 평생 못 찾을지도 모를 인연이기도 했고.
‘가만, 그냥 앞으로는 다른 분들도 불러서 같이 볼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친김에 학원 동창들도 JC에 들어오면 좋을 것 같고.
잠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이 집을 아지트 삼아, 영화 상영회 겸 토론회를 주기적으로 열어본다면 어떨까 하는 것들.
그렇게 상상에 푹 빠진 찰나 김태양의 요리가 어느새 완성됐고.
“다 됐습니다. 와서 드세요.”
그와 거의 동시에 이민기의 핸드폰이 부웅 울렸다.
“잠시만요. 이것만 보고요.”
그 안에 담긴 연락은, 밤늦은 시간에 날아온 것치고는 썩 반가운 것이었다.
[안녕하세요.스튜디오 항해에서 연락드립니다.
이민기 배우님.
카페 델 디아 주연 오디션에 합격하신 걸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