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57)
운빨로 탑스타-57화(57/200)
제57화
“…….”
이민기의 말 한마디에 김지환이 얼어붙었다.
아니, 대본 리딩실에 앉은 전원이 겨울철 고드름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한번 열린 이민기의 입은 흥부네 박처럼 닫힐 줄을 몰랐다.
“내가 너 같은 사람 잘 알지. 바리스타라고 하면 고급스러워 보이니까, 요즘 뜨는 직업이라니까 학원 가서 허겁지겁 자격증 하나 땄다고 자기가 뭐라도 될 줄 아는 사람.”
“…….”
“그런데 그거 알아? 가짜랑 진짜는 원두 가는 폼만 봐도 다 드러나는 거.”
이민기의 입에서 차갑기 짝이 없는 말이 쏟아졌다.
냉혹하다 못해 혹독하기까지 하다.
시베리아 한복판의 만년설을 끼얹은 듯한 대사가 이민기의 혀끝에서 춤을 췄다.
모두가 멍하니 있기를 잠시.
‘대단한데?’
노호연 감독이 속으로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속으로는 부족했다.
“훗, 후훗. 후후후후훗.”
저절로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한창 독설 연기를 쏟아내던 이민기의 표정이 도로 순박해졌다.
“감독님?”
“아, 미안해요. 너무 재밌어서. 내가 분위기를 깼죠?”
노호연 감독은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즐겁다.
그로서는 이 상황이 못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민기 배우, 평소에는 순둥이다가도 입만 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잖아?’
상상했던 그 광경이 눈앞에서 그 이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전에 들은 말이 있었다.
이민기가 겉모습과는 달리 냉랭한 성격을 잘 표현한다는 것.
누구에게 들었을까.
바로, [캠퍼스 스토리]의 각본을 맡은 김희진 작가였다.
그녀야말로 노호연 감독에게 이민기의 연기력을 극찬한 장본인이었다.
‘희진이 말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이게 정답이었네.’
노호연 감독이 처음부터 이민기를 고를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연기력으로는 이민기가 압도적이지만,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이미지에는 살짝 못 미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작품의 주연 선정을 두고 누구를 고르면 좋을까 한참을 망설이던 무렵.
김희진 작가에게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 배우? 대단하지.]과거 [캠퍼스 스토리]를 촬영하던 시절, 이민기가 제작진에게 유독 고평가를 받았던 점이 있었다.
[기본적인 연기력도 쓸만한데, 그보다는 감각이 좋아. 캐릭터를 잡는 게 대단해. 혼자만 화면 속 등장인물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니까.]바로 캐릭터 소화력이 그러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알잖아. 대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거. 그래서 캐릭터를 이해하는 배우가 좋은 건데, 이민기는 아예 결과물을 내다보는 것 같아.]현장 속 구도를 이해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면 좋을지 완연히 깨닫고 있다.
압도적인 각본 이해력을 바탕으로, 그 사이에 퍼즐의 결정적인 한 조각처럼 자기 자신을 끼워 넣었다.
아니, 원래부터 그 대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 같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김희진 작가가 이민기를 추천했다.
이게 바로 노호연 감독이 마지막 순간에 그를 선택한 이유였다.
‘다른 사람을 골랐더라면 후회했겠어.’
마침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
이것 또한 이민기가 얻은 또 다른 종류의 인복이었다.
‘무난하게 잘하는 연기자가 안정적이겠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모험할 줄 아는 사람도 싫지는 않아.’
오디션 이후 결정을 내리기까지 지난 일주일,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과연 이민기가 [성진우] 역할에서 저 장점들을 여실 없이 드러낼 수 있을까.
그 고민의 결과물이.
“계속하세요.”
노호연 감독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밭에 같은 씨를 심는다고 같은 수확물이 나오나? 같은 원두로 커피를 뽑는다고 다 같은 결과물이 아니야.”
[카페 델 디아]에 굴러들어온 돌 [성진우]가 박혀 있던 돌 [차영환]에게 훈계를 쏟아내는 장면. [차영환]이 바리스타 일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원두 그라인더 세팅조차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장면이었다.“신 원두는 굵게, 쓴 원두는 잘게. 이 정도도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두고 보자고.”
커피에 한해서는 미치광이처럼 냉정하다.
다소 과하다고 느껴질 그 연기가 한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덕일까.
“…….”
상대역인 김지환은 미칠 지경이 되었다.
‘이 새끼, 말뽄새가 무슨.’
이민기의 앞에 선 그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
눈앞에 낭떠러지가 놓인 듯 끝을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그의 눈앞에 깔렸다.
‘내 눈 계속 피하기만 하던 그놈이랑 같은 사람 맞아?’
정답은 이러하다.
이민기는 애초에 그의 시선 따위에 위축된 적이 없었다.
배역 오디션에서 한 차례 그를 꺾은 시점에서, 번거로워서 피했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두렵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기의 앞에 있는 건 배우 김지환이 아니었다.
미숙한 바리스타, [차영환]에 불과했다.
[연기를 시작했다면 상대방을 연기자가 아니라 캐릭터로 봐라.]이민기는 김아성 트레이너의 조언을 차근차근 곱씹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답 안 하지?”
“…….”
한참이나 말로 얻어맞은 김지환의 눈빛이 흔들렸다.
반박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대본에 적혀 있는 그대로 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대사라는 것이 좀처럼 꽉 막혀 목 끝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설마 쫄았다고? 내가?’
김지환은 울컥하는 마음에 혀를 씹고는 외쳤다.
“……당신이 누구라고 잘난 척하고 그럽니까?”
간신히 뱉었다.
하지만 기껏 뱉은 보람도 없이 기가 잔뜩 눌려 있을 뿐이었다.
“이제 막 들어온 사람이 뭘 안다고 말을 그렇게 해요? 동네 장사에서 사람들이 맛을 그렇게 깊게 따질 것 같습니까?”
평소 기가 센 김지환이지만, 지금만큼은 이민기의 연기에 눌려 중얼거렸다.
내심 깔봤기에 반전이 더 크게 다가왔다.
예상을 깨부순 이민기의 연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 도저히 목소리를 곧게 뽑아낼 수가 없었다.
“……원두로 차력쇼? 그걸 누가 몰라서 못 합니까?”
“해 봤어?”
“네?”
“구분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은 해 봤냐고.”
“똥이랑 된장을 먹어 봐야만 구분합니까? 일반인들이 천 원짜리 원두랑 만 원짜리 원두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억눌린다.
이민기의 연기에 억눌려,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듯 말을 내뱉었다.
“가게 운영은 합리적으로 해야 할 거 아닙니까.”
“패배자들의 사고방식이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두 사람 다 연기 잘하네?’
남들의 시선에 비친 그들이 그러했다.
시종일관 압박하는 [성진우]와 거기에 한 발자국 뒤로 밀리면서도 할 말을 억지로 해내는 [차영환].
이 둘이 각본에서 튀어나온 듯 리딩실 한복판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민기 씨한테 너무 발리면 어쩌나 했는데, 지환 씨도 잘하는걸?’
‘눈빛 좀 봐. 되게 억울해 보여.’
‘하, 신인이 뜨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구나.’
‘이게 요즘 신인 수준인가.’
둘 다 잘한다.
새삼스럽지만 김지환도 최근 신인 중에서는 우량주로 꼽히는 축이었다.
넉넉하게 열 손가락에 들어가겠지.
그렇기에 궁지에 몰렸다고 하고 자기 몫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민기의 연기를 살려 주고 있었다.
본인은 차마 모르겠지만 말이다.
‘단순히 기를 팍 써서 눌러버리는 건 연기 밥 좀 먹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저렇게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게 보이는 노호연 감독은 신났고.
“영환 씨, 앞으로 잘하나 내가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웃기는 소리. 당신이야말로 망신당하고 쫓겨날 준비 하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만큼이나 라이벌 구도를 제대로 세워버렸다.
물론.
‘음, 좋아, 좋아.’
‘두 사람 다 디테일이 살아있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니었고.
* * *
일반적인 한국 미니 드라마의 방영 스케줄은 다음과 같다.
기획 단계에서 몇 부작인지를 먼저 정한 뒤, 방영 전까지 그 절반 분량을 가능한 한 촬영하고 첫 방영을 시작한다.
물론, 목표는 어디까지나 목표이니만큼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비축 분량이 줄어들 수도 있다.
정 급하면 한 달 방영 분량 정도만 가지고 방영하는 케이스도 있고.
[카페 델 디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본디 16부작으로 계획된 미니드라마인데, 방영 전까지 8화 정도를 마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그 촬영 현장은 예상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다.
“잘하면 정말로 8화 찍고 가겠는데?”
스케줄이 너무나도 순탄하게 풀린 덕분이었다.
“이야, 내가 지금까지 드라마만 거의 열 작품 찍으면서 이렇게까지 편한 건 처음이다.”
연출을 맡은 장태욱 PD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드라마만 아홉 작품을 촬영한 베테랑 PD.
그럼에도 영화판 출신 노호연 감독을 보조하는 게 그의 역할인데, 짬에 안 맞은 일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노 감독님, 드라마 촬영장에서는 저런 배우가 정말 귀합니다.”
바로 이민기 때문이었다.
“민기 씨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는 노호연 감독의 말에 장태욱 PD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말했다.
“감독님, 영화를 촬영할 때는 감독의 의도대로 짜임새 있게 흘러가죠? 스케줄도 좀 여유롭고.”
“대체로 그렇죠. 안 맞으면 억지로 될 때까지 재촬영하기도 하고. 예산만 맞춘다면요. 드라마는 조금 다른가요?”
“예, 스케줄이 급하다 보니까 다소 유도리 있게 진행해야 할 때가 많거든요.”
장태욱 PD가 손가락을 들어 저 멀리 이민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이민기 배우 같은 사람입니다. 딱 핵심이 되어서 작품을 밀고 가게 해주는 거죠. 조직의 리더 같이.”
리더.
신인 배우에게 붙이기에는 과분하지 않나 싶으면서도, 실제로 최근 이민기의 활약을 보고 있노라면 실로 송곳에 비견될 정도이기는 하였다.
“민기 씨, 이런 말 하면 이상할 수 있는데 좀 괴물이시네요.”
“네? 제가요?”
“그거 알아요? 민기 씨랑 같이 연기하고 있으면 저까지 실력이 느는 기분인 거.”
톤 앤 매너가 그러했다.
이민기의 캐릭터가 워낙 확고하니, 그를 구심점 삼아 다른 배우들의 캐릭터까지 저절로 잡혀버린 것.
김지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첫 기둥을 잘 박았으니 건물도 잘 지어질 수밖에.
막상 그 본인은 자기가 촬영장의 중심이 되었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걸까.
“제가 뭘요. 선배님들 보고 배우기 바쁜데요 하하…….”
매사에 겸손하기 짝이 없었다.
“어우, 민기 씨! 적당히 좀 겸손해! 사람이 겸손한 것도 적당히 겸손해야지, 계속 그러면 이건 기만이야!”
지금만 해도 그렇다.
쉬는 시간만 되면 온 사방에 말을 붙이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이미 그를 인정한 동료 배우들이 사방에 둘러싸 도란도란 잡담을 떠는 광경을 보는 게 일상이었다.
“…….”
김지환만 빼고.
멀찍이 떨어져서 대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게 어지간히 불타고 있구나 싶다.
하지만 저것 또한 작품성에 도움이 되니 선한 영향이라고 볼 수 있겠지.
‘다음 장면에 씹어먹고 만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선한 영향 맞나?
아무튼.
노호연 감독은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확실히 민기 씨가 독특하긴 하네요.”
뿌듯하게 웃더니 말했다.
“주위 사람들한테까지 좋은 에너지를 준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힘든 요구여도 나긋나긋 웃으며 소화하잖아요? 촬영장에서는 예민해지기 쉬운데 말이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장태욱 PD가 노호연 감독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껄껄 웃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민기 씨는요. 리더 타입이라기보다는…… 그보다는.”
이어서 또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참.”
노호연 감독은 말을 멈춰서더니, 시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그 타이밍이네요.”
“타이밍?”
“그거요. 민기 씨 전매특허.”
“아, 그렇네요.”
아무런 설명도 없었음에도 장태욱 PD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텔레파시로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모습.
그들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스태프들이 이 순간만을 기대했다는 듯 시선을 기웃거렸다.
기대감이 부푼 현장.
그 사이에서 이민기가 작게 외쳤다.
“목도 마른데 커피나 한잔할까요?”
잠시 뒤.
이민기가 물 흐르는듯한 동작으로 앞치마를 메고 머신 앞에 서더니, 곧바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고소한 커피 냄새가 곧 촬영장을 한가득 메웠다.
“난 이 순간이 제일 좋더라.”
“이상하게 맛있다니까.”
이민기가 휴식 시간을 활용해 커피를 뽑아 대접하는 것.
최근 몇 달 사이 [카페 델 디아] 촬영 현장의 정기 이벤트로 자리 잡은 현상이었다.
“확실히 폼이 나.”
“왜 커피 뽑는 남자가 인기 있는 줄 알겠네.”
“민기 씨는 뒷모습이 멋지지.”
“응, 어깨가. 쓰읍.”
어쩌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이민기가 현장에서 두루두루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작품 속을 너머 바깥 분위기까지 좋게 만들어주니 어쩔 도리가 있나.
물론, 이민기 본인에게는 썩 시커먼 의도도 있지만 말이다.
‘이럴 때 연습해 둬야지.’
시커먼 커피 뽑는 의도 말이다.
틈틈이 연습해서 카메라 앞에서는 더 멋진 동작으로 뽑겠다는 그거.
애초에 자기 커피 뽑는 연습 한다고 만든 커피를 버리기 아까워 주위에 제공한 게 이런 이벤트의 시초이기도 하고.
“민기 씨 커피 갈수록 맛있어지는 것 같네.”
“이번 촬영 끝나면 아쉬워서 어쩐대.”
“그러게. 50부작 찍었으면 좋겠다.”
“자기 손으로 끓일 생각은 없고?”
“제정신이야? 내 손으로 끓인 커피가 민기 씨 커피보다 맛있을 리가 없잖아.”
겸사겸사 윈윈이었다.
그렇게 커피 향이 한가득 풍기는 현장.
‘음, 역시 폼만 좋은 게 아니야. 향도 좋네.’
노호연 감독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민기 커피를 음미하는 와중이었다.
‘가만.’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곧 발표회 있었지?’
방영일 며칠 전에 여는 발표회.
거기에서 이색 이벤트를 열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