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67)
운빨로 탑스타-67화(67/200)
제67화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드라마 존재한다.
코미디, 사극, 로맨스, 액션, 스릴러, 공포, 법률, 의학 등등.
그 종류란 가히 샐 수가 없을 정도.
하지만 이 중에서도 신인 배우들이 유달리 선호하는 드라마가 존재했다.
그건 바로.
[음식 드라마 하나만 찍어 보고 싶다.]음식 소재 드라마였다.
주인공이 작중에서 요리하고, 식당을 경영하는 등의 이야기가 담긴 드라마.
왜 이것을 선호하는가.
그 이유를 말하자면, 다름 아닌 광고 때문이었다.
[제빵사 역 ‘원진’, 현실 속 제빵에 도전] [리얼 쉐프 출연진 기세를 몰아 이탈리안 레스토랑 개업] [드라마 속 그 한식집이 건대입구역에 등장했다!]음식이란 곧 대중의 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분야.
그러다 보니 곧 기업들과도 맞닿아 있었고, 이로 인해 관련 광고를 얻어내기에도 수월한 것이다.
최근 성황리에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카페 델 디아]에 출연한 이민기라고 해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후후, 후후후, 후후.”
이민기가 콧노래를 불렀다.
박자에 맞춰 둠칫둠칫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어 들어갈 광경이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하늘에 둥실둥실 떠오를 것만 같은 기분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왜냐.
‘이제 나도 당당한 TV CF 출연 배우다!’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 그것도 아주 괜찮은 기업과 함께 말이다.
[배우님, 광고대행사를 통해 음료 관련 홍보모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JC의 박한모 매니저가 전해 주었다.
커피 드라마에서 활약한 그의 모습을 보고, 무려 식품 업계에서 3위 정도의 위치를 지닌 회사가 그에게 계약 의사를 밝혔다고.
[당신만을 위한 개인 바리스타, 커피오]커피오.
그럭저럭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였다.
고객별로 계정을 따로 관리하며 커스텀 메뉴를 제공한다는 게 특징.
‘계약 조건은 평균보다 좋다고 했지. 신인이 받을 수 있는 조건 중에서는 가장 좋다고 봐도 좋다고.’
계약 조건만 좋았을까.
커피 광고라는 것 자체가 엄청난 수혜라고 봐도 좋았다.
이 업계에는 지나가는 뉴트리아조차도 알고 있는 명언이 있다.
[모름지기 배우라면 작품을 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광고는 가려야 한다.]광고 하나에 따라서 향후 그 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진다는 말이었다.
달리 말하면, 잘못 고르면 조진다는 말.
이 말은 단순히 격언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사실이었다.
패션 광고 위주로 찍은 배우는 앞으로도 패션을 찍는 경우가 많다.
전자기기는 전자기기.
보험 광고는 보험 광고.
게임 속 전사가 성기사나 버서커로 전직하듯, 배우들도 어느 테크트리를 밟게 된다고 봐도 좋으리라.
사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누구나 하는 것들이기도 하고.
문제는 대부업이나 속옷 광고 같은 것들이었다.
‘이미지를 제대로 망쳐서 몸값이 폭락한 연예인들도 있었지.’
그만큼 부르는 돈도 크다지만 리스크도 극심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커피는 어떠한가.
이걸 말해 보자면.
[커피 광고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광고입니다.]그야말로 완벽했다.
[이미지를 망칠 것도 없고, 관련 후속 광고를 얻어내기도 좋습니다. 예로부터 커피 광고는 톱스타들이 사랑하는 광고로도 유명했지요.]광고 중에서도 상위권.
거리낄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신인 배우에게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기회인데, 아마 그가 초청을 받은 건 [카페 델 디아]의 힘이 컸겠지.
‘내가 TV CF를 찍는 날이 오는구나.’
그간 TV에서 얼굴을 비친 연예인들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던가.
아니, 부럽다는 생각마저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손을 뻗으면 잡힐 영역에 있어야 부러워하지, 아예 저 구름 위 세상이면 마냥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안 믿기네.’
이민기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물며 그냥 TV CF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커피 아닌가.
‘고상하고, 부드럽고, 세련되고, 은은하고, 도도하고, 하늘하늘하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향기롭고, 가정적이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 저렇다.
비록 1위 업체나 2위 업체가 아닌, 3위 업체와 계약을 맺었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3위도 대기업인데.
제작발표회에서 범천 푸드 컴퍼니의 송진배 회장이 뭐라고 했던 건 기억나지만, 그 정도 립서비스는 어디나 다 하는 거고.
‘이제 드라마 출연료도 있고 광고비도 있으니까 돈 걱정은 당분간 없겠네.’
이민기의 얼굴에 헤실헤실 웃음이 떠올랐다.
‘나도 이제 자유의 몸이라네.’
한평생 돈에 쫓겨 왔는데, 이제 슬슬 벗어날 기미가 보인다.
가족들한테 소고기도 사줘야지.
이번에는 당당하게 놀러 가는 거다.
‘이틀 뒤부터 시작이다.’
이틀 뒤, 스튜디오에서 첫 촬영이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후후, 후후후, 후후. 흐히히, 후흐흐흐흐.”
그렇게 인쇄해 온 계약서 사본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룰루랄라 거실을 굴러다니는 와중이었다.
부우웅-
“흡!”
갑작스럽게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버텼다.
‘나도 이제 발전했단 말이지.’
그간 전화 좀 걸려오면 깜짝깜짝 놀랐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는 걸려오는 전화의 상당수가 독촉 전화였기 때문.
트라우마가 은근히 남아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에 식겁했던 게 사실이지만, 이제 서서히 극복해 나가는 와중이었다.
‘장하다. 나 자신.’
그렇게 전화 한 통에 소소한 성장을 느끼며 전화를 받아든 순간이었다.
“네, 이사님.”
그 전화 내용이, 조금 남달랐다.
이민기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범천에서 연락이 왔다고요?”
범천.
한국 커피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업이었다.
* * *
오래간만에 방문한 JC 본사.
마포구 인근의 사옥에 접근하려니, 한 남자가 바깥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배우님, 이쪽입니다.”
박한모 매니저였다.
사람 좋은 얼굴과는 별개로 은근히 독설을 쏟아내는 남자.
그가 이민기를 발견하고는,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말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이사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정우 이사님이요?”
“예, 이번 일은 다 같이 상의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 그 정도 일이었던가.
이민기가 작게 신음을 흘리려니 박한모 매니저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다름 아닌 계약해지 이야기니까 말입니다.”
“…….”
“어쩌면 향후 배우님의 활동 반경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시작부터 나온 본론에 이민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죠.”
그렇다.
지금, 이민기가 JC 본사에 방문한 건 기존에 계약했던 계약을 해지할지 말지를 논의하기 의함이었다.
상식적으로라면 기존 계약 업체를 우선시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하필, 중간에 머리를 들이민 업체가 그 범천이었으니.
“이쪽입니다.”
드륵.
JC 사옥의 5층에 올라가자 간이 회의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안에 서정우 이사가 느긋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오셨군요.”
서정우 이사가 빙그레 웃으며 읽던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겉표지에 적힌 제목은 이러했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17가지 이유]고상한 필체와는 달리, 참으로 자기계발서 느낌이 풀풀 풍기는 제목이었다.
‘저런 거 재밌긴 하지.’
하지만 오늘 논의할 것은, 착하게 살아가는 것과는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그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이기적으로, 손해 안 보고 살아가는 법이라고나 할까.
좋게 말하면 어른스럽게 사는 법.
“안녕하세요.”
이민기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 앉으려니 서정우 이사가 대뜸 입을 열었다.
“배우님, 이번 광고 관련해서 이야기는 대강 들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해지할지 말지가 문제라고.”
“그렇습니다. 제 생각을 먼저 확실하게 말씀드리자면”
다음 순간.
서정우 이사가 기습 공격을 하듯 말했다.
“해지하는 게 맞습니다.”
“…….”
빠르게도 나왔다.
그래도 한 번쯤은 말릴 줄 알았기에 저 말이 다소 의아한 참인데, 서정우 이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범천은 광고 하나를 찍더라도 모델을 썩 신중하게 고르는 편입니다. 업계 1위라는 위치가 있어서 그런지, 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모델만을 기용하려고 하지요.”
업계 1위라.
문득, 이민기는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범천과 일하면 곧 1위가 된다는 말이군요.”
광고는 광고를 낳는다.
이건 이민기가 해당 브랜드를 광고하는 게 맞기도 하지만, 반대로 해당 브랜드가 이민기라는 배우를 광고해 주기도 한다는 말이었다.
요컨대, 이번 광고는 게임 속 배치고사와도 같았다.
한 번이라도 범천급 회사와 광고로 인연을 맺어 두거든, 앞으로는 비슷한 체급의 회사와 일하기도 수월할 터.
신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예, 광고는 광고를 낳으니까요.”
서정우 이사가 기대했던 반응에 빙그레 웃고는 말을 이었다.
“미리 짚고 넘어가자면, 배우님이 지난주에 계약한 커피오도 차고 넘치게 좋은 기업니다.”
“음.”
“하지만 범천은 체급부터 다르지요. 하이에나와 사자만큼이나 다릅니다.”
서정우 이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커피오가 썩 허접한 브랜드인 듯했다.
하지만 저 말에는 크게 과장이 없었다.
어쩌면 최대한 얌전하게 말한 것일지도 모를 노릇.
‘업계 1위와 2위도 차이가 큰데, 3위라면 말할 것도 없지.’
더욱이 이번 일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배우님, 지금부터 할 말은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 범천 측에서 제안이 있었습니다.”
박한모 매니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목소리까지 줄이며 말했다.
“미리 계약한 업체가 있을 시, 계약 해지금을 덤으로 얹어 주겠다고 밝혔습니다.”
“허.”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올 거, 고민의 여지마저도 없애 주겠다는 뜻.
너무 공격적으로 나서는 거 아닌가.
밖에 알려지면 어쩌려고.
물론, 그만큼 범천의 위치가 공고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흔치 않은 조건이지요. 그만큼 배우님에게 욕심이 있다는 말일 겁니다.”
그쪽 대표 얼굴이 떠올랐다.
송진배 대표라고 했나, 얼굴만 보면 딱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다 떠나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 열 중 아홉은 범천을 선택하겠지요. 배우님도 마음에 동하는 쪽을 고르시면 됩니다.”
서정우 이사가 늘 그렇듯 반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늦으면 늦을수록 실례가 될 테니 최대한 빨리 말입니다.”
지금 계약을 거절하면 아직 실례가 아니라는 걸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민기의 귀에는 저 부드러운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이 들렸다.
‘다른 곳에서 좋은 조건을 불렀으니, 바로 어제 계약한 업체를 배신하고 간다라.’
관례처럼 일어나는 일이다.
이민기는 지난주, 함께 계약서를 작성한 대행사 측 직원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 좋았지.’
쿼카처럼 생긴 사람이었다.
이민기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던 그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굳이 따지자면 저쪽이 일을 주는 입장이니 저렇게까지 굽신거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를 극히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옛날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태도.
고민이 더 깊어졌다.
‘내가 갑자기 계약을 해지하자고 하면 곤란해할까.’
광고라는 건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계약서를 작성한 지는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저쪽 광고팀에서는 온갖 업무를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현장 섭외.
소품 제작.
패키징 제작, 위아래로 결재 자료를 주고받고, 검토하고.
적어도 수십 명의 인력이 종일 분주하게 일했겠지.
그사이에 계약이 몇 장 더 이뤄졌을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도 않았다.
‘본 촬영까지 고작 이틀 남은 시점이기도 하고.’
이민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매니저님, 제가 계약을 해지하면 저쪽 사람들은 좀 허탈해하겠지요?”
“예, 그건 당연합니다.”
박한모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촬영까지 이틀 남은 상황에 해지하는데, 욕을 안 먹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양심을 개밥에 말아먹은 사람입니다.”
“…….”
말이 좀 세네.
그가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달리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고수하며 말을 이었다.
“드라마가 방영하는 사이 최대한 본전을 뽑으려고 이미 사전 업무의 태반을 마쳤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에 붕 뜨면, 뒤에서 이민기 배우님과 JC를 껌처럼 씹겠지요. 이제 막 뜬 신인 주제에 콧대만 높다고.”
음,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린다.
충분히 이해했다 싶은데 박한모 매니저는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는 듯 특유의 독설을 이어나갔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시간 좀 지나서, 배우님이 자기들을 버리고 범천이랑 계약했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라면 앞으로 평생 원한을 품을 겁니다.”
“…….”
“어쩌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손이 근질거리는군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이민기는 저 말이 반쯤은 농담이리라고 짐작하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일 구석은 있었다.
‘내 이득을 위해 그 사람들한테 물을 먹인다라.’
하면 된다지만, 이건 할까 말까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나는 오로지 눈앞의 이득만을 좇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걸까.
계약서라도 한낱 종잇장 취급하는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민기는 모처럼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 보았다.
‘이건 운일까.’
커피로 3위 업체에게 연락이 왔을 때 이미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서 1위 업체에게도 연락이 왔다.
이건 운이 좋은 걸까.
운이 좋다고 불러도 좋은 걸까.
어떻게 보면 운이라는 건 잔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선함과 악함의 구분이 없으니.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운만큼은 얼마든지 좋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 그 사람처럼.’
이민기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옛날, 그러니까 이민기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일했던 회사의 사장 말이다.
운 하나는 지독하게 좋은 사람이었지.
정말 뭘 하든 잘 풀리는 인간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은 그 운을 전부 남 등쳐먹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참 알뜰살뜰하게도 조져놓았지.
‘당장 나부터 노예 계약서였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연예인이 많았다.
그렇게 피해자가 쌓이고 쌓인 끝에, 회사를 터뜨리고 도망갔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부도였다.
그래, 문제는 없었다.
아마 뒷돈도 많이 꿍쳐 두었으리라.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한강 앞 아파트 한 채 뽑았다는 것이었으니.
‘그 개X끼가 보기에는 그게 합리적이고 어른스러운 선택이었을까.’
이 사장 하나로 끝이 아니지.
옛날에 나랑 뭐 하나 찍자면서 불러 놓고, 당일 캔슬 냈던 그 사람들도 전부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걸까.
뭐가 그렇게 합리적이었기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 먹였던 걸까.
여기까지 이민기의 생각이 닿은 순간이었다.
‘화나네.’
화가 났다.
사장에게 화가 났다.
그와의 계약을 가볍게 어겼던 과거의 모든 사람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까짓 일로 흔들려 고민에 취한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민기야, 대체 언제부터 추해졌냐.’
그렇다.
이민기는 자기 자신이 추해졌다고 느꼈다.
없이 살아도 없어 보이게 살지는 말라 했는데, 이게 얼마나 없어 보이는 선택인가.
처음이니까 어렵지, 나중에 가면 쉬울 텐데. 그때 가면 또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라고.
‘이제 내가 유리한 입장에 섰으니까 똑같은 사람이 되라고? 헛소리.’
아무리 무명 배우로 살아왔다고는 하나, 그 전에 사람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드륵.
이민기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후우.”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기를 잠시, 마침내 각오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거절할게요.”
“커피오 측 일 말씀이시지요?”
서정우 대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민기는 앞을 직시하며 말했다.
“아니요, 범천의 제안이요.”
“예?”
그 순간이었다.
시종일관 태연하기만 했던 서정우 이사가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이민기가 자기 예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처럼.
그럼에도 이민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모델 일은 커피오 측이랑 진행하고 싶어요. 아니, 할 거예요.”
확답이었다.
너무나도 확고한 목소리에 서정우 이사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사이, 박한모 매니저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배우님, 혹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범천이 분명 더 나을 겁니다.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배우님의 체급이 올라간다면.”
“네, 아마 그럴 것 같기는 해요. 욕 좀 먹고 넘어가겠지요. 그래도요.”
이민기가 한 차례 더 말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요.”
“……!”
강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박한모 매니저가 눈을 깜빡였다.
하고 싶다.
할 수 있는가 못 하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다.
그런 의지가 이민기의 목소리에, 표정에, 손짓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매니저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쪽에서 엄청 열심히 준비하고 계신다면서요. 그걸 제가 갑자기 엎으면 민폐잖아요. 그렇죠?”
이민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견고했기 때문일까.
정적이 흐르기를 몇 초.
“후후.”
갑자기 웃음을 흘린 사람이 있었다.
서정우 이사였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지 혼자 큭큭 웃더니, 어딘가 안도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그쪽이 더 구미가 당기기는 했습니다.”
“예?”
“조마조마했네요.”
이 사람, 아까까지 거절하라고 말하는 수준 아니었나.
의외다 싶은데 서정우 이사가 말을 이었다.
“자못 남자라면 가오 아니겠습니까. 돈보다는 의리를 선택하는 쪽이 더 가오가 삽니다.”
“…….”
“몸의 흉터는 시간이 흐르면 낫지만, 마음의 흉터는 낫지 않습니다.”
아, 그런 이유.
생긴 것과는 달리 좀 화끈한 이유네.
김성모 유니버스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대사에 이민기가 헛웃음을 짓는 한편, 서정우 이사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내가 사람을 잘 골랐네.’
겉으로는 꿈과 희망이 가득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숫자만 보고 굴러가는 업계다.
이민기 같은 사람은 결코 흔치 않았다.
비록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정우 이사는 이런 로망 어린 선택이 그리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박한모 매니저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바보인가?’
누가 봐도 범천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윤이 아닌, 의리를 선택하겠다는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재밌다.
사람이 재밌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즐거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월급쟁이 처지에서는 즐겁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박한모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일이 줄어서 편하겠군요.”
참으로 회사 소속 매니저다운 이유다.
“잘됐네요. 그럼.”
서정우 이사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기왕 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시지요.”
“아, 좋죠.”
“이 주변에 연어장을 정말 잘하는 가게가 있습니다.”
연어장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이민기의 입에서 긴장은 어디로 갔는지 군침이 흘렀다.
요즘 연어장을 자주 먹네.
‘태양 씨가 만든 연어장이랑 이쪽 연어장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을까.’
회의로 쌓은 긴장감은 풀려나고, 어느덧 머릿속에는 음식 생각만이 가득해졌다.
기대감에 차 JC 본사 바깥으로 룰루랄라 발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위이잉-
가게 앞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박한모 매니저의 핸드폰이 울렸고.
“잠시만요.”
그가 몸을 사선으로 기울이며 핸드폰을 쥐고 천천히 읽더니 말했다.
“어이쿠.”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말입니다.”
박한모 매니저가 그답지 않게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계약 해지하자고 합니다.”
“네?”
“커피오 측에서.”
“……네?”
이건 또 무슨 일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