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87)
운빨로 탑스타-87화(87/200)
제87화
“패션과 관련된 작품이요.”
이민기가 거듭 강조하듯 말했다.
“제가 지금도 패션모델 일을 하고 있잖아요.”
“예, 규언 사장님과 쭉 진행하셨죠.”
그의 말대로다.
유규언 대표 밑에서 이민기는 여전히 모델 일을 하고 있었다.
비록 예전보다 건수가 줄기는 했다.
몇몇 작품을 거치면서 그간 몸집이 너무 커진 탓이었다.
‘사업이 요즘 잘 풀려서 페이를 못 줄 건 없다고 하셨지만.’
아무튼, 워낙 바쁘기도 했고.
그래도 여전히 유규언 대표와 진행하는 와중.
“그러다 보니까 이런 쪽으로도 깊이가 확실히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대중의 눈으로 봐도 재밌을 만한 그런 깊이가요.”
많은 걸 배웠다.
카메라에 더 멋진 모습으로 비추는 법.
손끝 하나로 사소한 뉘앙스를 조절하는 법 같은 거.
“또 의류는 인류사 이래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사업 중 하나라고 하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패션에 아예 관심이 없을 사람은 드물겠더라고요.”
“종종 나오는 소재이기는 합니다.”
“예, 그래서 이쪽 방면으로 찍어보고 싶은 작품이 생겼어요. 이건데요.”
이민기가 핸드폰을 꺼내서는 어느 영화의 배우 모집글이 적혀 있었다.
그곳에 한 작품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패션 앤 패션]말 그대로, 패션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패션 스타가 된 주인공 이야기지.’
패션모델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주인공.
그 주인공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는 돈맛을 보며 점차 타락하게 된다.
한 인간이 성공하고 타락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화제가 됐었지.
그 또한 재밌게 봤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었다.
바로, 상업성과 예술성을 함께 챙겼다는 점이 그러했다.
‘국내에서는 살짝 애매했지만, 해외 반응이 좋아서 뒤늦게 흥행작 반열에 합류했다고 했나?’
좋다.
남다르니까 좋다.
지금까지 상업적인 작품만 세 작품 연달아 촬영했다. 그러니 이제 예술성도 하나 찍을 시기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또.
유선아의 말을 들은 순간 떠오른 것도 있었고.
‘내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작품이야.’
몸선이 예쁘다고 했나.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한껏 살려 봐야지.
물론, 패션 영화의 모델 주인공으로 먹힐 정도일지는 모르겠다만.
반대로 말하면 패션모델들이 연기를 꼭 잘하는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비빌 구석은 있다는 게 이민기의 생각이었다.
“감독이…… 황의성 감독이군요.”
그 문서를 확인한 서정우 이사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저도 황의성 감독님은 개인적으로 팬이라 이분 작품은 전부 체크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상업적인 작품을 추구하는 분은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민기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술적인 면을 많이 챙기시는 것 같더라고요.”
챙기는 정도가 아니지.
아예 그쪽 방면에 쏠린 사람이다.
호불호가 워낙 강하게 갈려서, 안 보는 사람은 최악의 감독으로 뽑을 정도로.
“사실, 황의성 감독님은 신인 배우님에게는 추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서정우 이사가 뜸하게 말을 이었다.
“소재가 매력적이라고는 하나, 이쪽 작품은 아무래도 성적을 아예 포기해야 할 수도 있기에.”
“각오하고 있어요.”
성적이 아예 나쁜 건 아니었다.
예술성을 중시한 영화답지 않게 본전 회수는 한참 넘겼었지.
물론, 저자본의 힘이었다.
본격적인 상업 영화의 성공에는 못 미쳤지.
그럼에도 이민기가 황의성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이유.
그건 바로.
“그래도 그분 사단에서 한 작품 찍어보는 게 꿈이었어요.”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전설이기 때문이었다.
천재.
업계에서 천재성으로는 가히 한 손에 꼽힐 만큼.
아니, 한 손을 넘어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3대장 중에서는 황의성이 최고 아님?] [완벽주의자라 자기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무한 촬영한다던데 ㅋㅋ] [무한 촬영한다는 거 자체가 천재가 아니라는 증거임] [진짜 천재는 한 번에 한 장면 찍고 딱 끝냄. 이미 머릿속에 구도가 다 있어서.]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지. 완벽주의자가 감에 의존하면 그게 더 문제 아님?]물론, 사람마다 의견은 좀 달랐지만.
아무튼, 이민기가 생각하는 황의성이라는 감독은 수련 교관과도 같았다.
당장도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그의 미래는 훨씬 화려하다.
이쪽 외길을 파기를 5년 뒤, 무려 아카데미상 수상까지 간 사람이니 더 할 말이 있겠나.
해외에서 그의 작품은 충격 그 자체였다.
‘상업적인 성과는 어떨지 몰라도, 배우로서 한 단계 크게 성장할 기회다.’
몸집을 어느 정도 키웠으니, 슬슬 무르익고 싶다.
숙성이었다.
황의성 감독이라면 그가 바라는 숙성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해외 영화제에서 인지도를 가진 감독이기도 하니 만에 하나 그쪽으로도 확장성을 갖출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고.
“예, 버틸 수만 있다면 저도 황의성 감독님의 작품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정우 이사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할 줄 알았더니, 꽤나 산뜻하게 말이다.
의외다 싶은데 서정우 이사가 나긋나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붙기 어려울 겁니다.”
“……아.”
“황의성 감독님의 고집은 유명하거든요.”
그렇지.
황의성 감독이 그쪽으로 유명하긴 하지.
배우를 어지간히 깐깐하게 뽑는다고.
어느 감독이든 안 그러겠냐만, 황의성 감독은 배우의 명성 자체를 안 본다나.
그렇기에.
‘로망이네.’
이민기의 마음에 더 드는 부분이 있었다.
‘연기를 평가받을 기회다.’
좋은 감독에게는 좋은 배우가 따른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 황의성 감독의 작품에도 걸맞을 만큼 좋은 배우가 되어 있을까.
“알겠습니다.”
서정우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한번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강 이야기를 마쳤다는 짐작이 든 순간이었다.
“참, 그리고.”
서정우 이사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배우님이 슬슬 신작을 고민할 시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결정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네?”
의외의 말이었다.
먼저 작품 알아보라며 권유한 게 서정우 이사 아니었던가.
이민기가 영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빠를수록 좋죠. 휴식 시기가 너무 길어지면 감 놓칠 것 같아서요. 한창 노 저을 시기잖아요.”
“보통은 그렇기는 합니다만.”
서정우 이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혹여 지난번에 배우님께 말씀드렸던 것을 의식하고 계시는 것 같아 첨언을 드리자면, 그건 설마 너무 오래 쉬시는 게 아닐까 해서 미리 밑밥을 깔았던 겁니다.”
“밑밥이라면…… 아.”
“예, 꾸준히 이야기를 반복해 둬야, 본업을 아예 잊지 않으니까요.”
그건가.
시장에서 7천원이라고 적힌 물건을 5000원에 사고 싶으면, 3000원에 달라고 흥정해야 하는 거.
“가끔은 작품 하나 하고 아예 쉬시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일단 주기적으로 일하라고 권유하고 있기는 합니다. 어딜 가든 다 그렇습니다만.”
“음, 그렇군요. 전 또 처음 듣는 이야기라 놀랐네요.”
“예, 이제 막 데뷔하셨으니까요. 사실 어느 회사를 가든 같을 겁니다.”
아니야.
내가 옛날에 일했던 회사는 진짜로 최대한 일하게 시켰는데.
최대한이 뭐야.
뼈가 닳도록 국물 진하게 우려서 팔아먹었던 다음에, 남은 잔해마저 가루로 가공해다가 팔았지.
어디 싸구려 단역 자리라도 가서 푼돈이라도 벌어오라면서 말이다.
지방에 최저시급도 안 나올 액션 세트장에 사비로 다녀오라고 할 때는 사장이 정말 미쳤는 줄 알았다.
[야, 이민기, 너 임마, 원래 단역은 어디 안 가리는 거야. 네가 출연해 주는 게 아니야. 저쪽에서 기회를 준 거지. 에잉, 기껏 힘들게 연줄로 가져온 자리인데 고마운 줄 알아야지.]말과는 다르게 딱 4초 출연했다.
그게 정상인 줄 알았더니마는.
‘역시, 정상적인 기획사는 달랐구나.’
이민기가 정상과 비정상의 무한한 갭을 느끼는 참인데 서정우 이사가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는 배우님이 쉬지 않고 일하기를 바랄 테지만, 결국 일을 하는 건 배우님 본인입니다. 늘 워라밸을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한없이 깊은 진심이 담긴 조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진심이기도 하였고.
‘단기간에 휘몰아치듯 일을 했다가 정신적으로 무너져서 떠난 사람들도 있으니.’
수익을 생각해야 할 회사 임원으로서는 가능한 한 일을 시키는 게 맞다.
하지만 그전에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는, 배우가 오래오래 작품을 찍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조금 이른 말이지만, 배우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길 바라겠습니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말입니다.”
건강이라.
이번 생 들어서 처음 챙기기 시작한 것에, 이민기도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이사님도요.”
* * *
며칠 뒤.
어두운 방.
“으으으으.”
이민기가 허공을 향해 던지듯 팔을 꺾으며 길게 하품을 내쉬었다.
“후우, 간신히 다 끝났다.”
끝났다.
헬스장까지 빠지면서 며칠 동안 데이터 분류 작업에만 매진한 결과, 간신히 일을 마치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피해자를 최대한 줄이는 선에서 용의자를 고발할 수 있겠어.’
얼마 전 입수한 [김도하폰]의 분류였다.
김도하폰이라고 불리지만, 막상 김도하의 핸드폰은 아닌 그거.
자료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무려 2년 치 가까이 누적되어 있다 보니, 단순 분류라고 한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건의 특수성 탓에 어쩔 수 없이 그가 혼자 다 해야 한다는 점도 그러했고.
‘남한테 잘못 새어나갔다가는…… 피해자들만 사회에서 매장될 가능성도 크니.’
왜 법이 가해자를 못 잡는 것보다, 피해자를 안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설계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대충 끝이다.
신고할 방법 또한 대강은 찾아 두었다.
이민기가 선택한 방법, 그건 바로.
‘모든 언론에 싹 다 뿌린다.’
익명의 제보를 온 사방에 전부 뿌리는 것이었다.
국내 주요 언론사 열 곳을 비롯해 소규모 언론사들까지.
그리고 법적으로 수사 권한을 지닌 기관들과 프리랜서 기자들한테까지.
또 해외 위키까지.
모두 익명의 계정으로 자료를 제보할 절차를 마쳐 두었다.
굳이 이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옛날에 어정쩡하게 묻혔던 걸 보면, 언론들도 이미 유착이 있었다는 거겠지.’
애초에 언론들도 못 믿었기 때문이었다.
얽힌 배우, 기관이 한둘이 아닌데 이 중 3분의 1이나 제대로 밝혔을까.
아니, 제대로 밝혔다고 말하기도 어렵지.
그 꼴을 볼 바에야, 기왕 터뜨릴 거 아예 확실하게 터뜨리기로 정했다.
‘banchango, 이 계정이 나중에는 꽤 유명해지겠지.’
이민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찾으려 시간을 미루면 미룰수록, 사건에 노출되는 피해자도 늘어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엉성하더라도 일단 터뜨리고 보는 게 옳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민기는 여기에서 한가지 결심을 더 세웠다.
‘이번 일 끝나고 나면, 나도 이제 복잡한 일에 얽히지 말고 평범한 배우 생활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배우 생활로.
최근에 너무 분주했더니 본업이 무엇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찍고 싶은 작품을 정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하물며 그의 적성과 아주 잘 맞는 걸 말이다.
[일단 오디션에 나와 보라고 하십니다. 보고 결정하시겠다고. 하지만 뉘앙스가 좋았습니다. 요새 눈여겨보는 배우였다고 전해달라며 말씀을 덧붙이시더군요.]황의성 감독 측에서도 나름대로 좋은 평가가 온 것 같고.
다 정했다.
여기까지만 업무 외적으로 머리 아프고, 앞으로는 일로만 머리 아프자.
결심을 완전히 굳힌 이민기가 마우스를 클릭하려는 순간이었다.
위잉-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정보 없음].“뭐지?”
이민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이상한 전화가 걸려올 때가 많긴 하다만, 그래서 사생활용 폰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번 핸드폰도 그러했다.
업무용 폰은 이미 괴한 연락이 많이 걸려오니까, 아예 지인들과 연락할 때만 쓰려고 따로 만들었다.
업계에서 얼굴 좀 제대로 비춘 사람들과만 쓰는 핸드폰.
‘누구지?’
신경 쓰이는 마음에 일단 받아든 순간이었다.
“이민기 배우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
듣기만 해도 신뢰감과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목소리.
김도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적개심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