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92)
운빨로 탑스타-92화(92/200)
제92화
‘엄청나다.’
포징(모델의 포즈)이 바뀌었다.
초 단위로 이민기의 포징이 기계처럼 포징을 바뀌었다.
마치 눈앞에서 패션 화보 페이지를 넘기듯, 제각각 다채로운 포징이 높은 완성도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계속해서 바뀌어 갔다.
아니, 여기까지는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화보 좀 찍어 봤다는 모델치고 저거 못 하는 사람이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민기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저건.’
옷이었다.
이민기는 매 포징마다 옷을 차례차례 갈아입고 있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가상의 옷을 말이다.
‘지금 건 코트에 페도라, 저건…… 워크웨어(미국 노동자들의 스타일)? 잠깐, 지금 지나간 건 라이더 자켓인가? 장발도 흉내 내고 있어.’
보이지 않는 빗으로 머리를 쓸어내려 저런 느낌을 유도하다니.
창의적이기 짝이 없다.
유규언 대표가 놀라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마임으로 옷을 갈아입는 건가.’
놀랍기 짝이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여전히 미묘한 지점이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10.1초를 찍었지만, 10초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여기까지도 누군가는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자유 연기가 이름은 자유 연기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외워온 동작일 뿐이니까.
매 순간마다 옷을 갈아입는 게 기예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곳 심사위원들은 연기를 보러 온 것이지, 기예를 본 게 아니었다.
‘민기 씨,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잘해야 할 겁니다.’
9.9초와 10.1초 사이에는 아득한 벽이 존재하고 있다.
이 둘은 0과 1의 차이만큼 극명했다.
그리고.
이건 이민기 본인이야말로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바였다.
그렇기에 유규언 대표를 한층 더 놀라게 할 수 있었다.
‘에티튜드가 완벽하다.’
에티튜드(attitude/스타일마다 따라오는 자세, 몸가짐)의 완성이었다.
“옷을 입는 법은 사람마다 다르죠.”
코트를 입었다면 중후하게.
“때로는 멋있게 보이고 싶고.”
슈트를 입었다면 말쑥하게.
“프레젠테이션에서 스마트하게 보이고 싶고.”
아메카지를 입었다면 아늑하게.
“홍대 거리 앞을 힙하게 돌아다니는 자신을 꿈꾸기도 합니다.”
아이비룩을 입었다면 활기차게.
“그러는가 하면 애인과 놀러 갈 때는 날아갈 듯 가벼워야지요.”
운동복을 입었다면 건강하게.
“땀을 흘리다 보면 덥죠. 시원한 옷이 땅깁니다.”
이민기의 동작에 따라 대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TV 쇼핑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상품을 소개하는 호스트처럼.
“오늘 하루는 힘들었습니다. 깊은 참을 취하고 싶네요.”
잠옷을 입었다면 포근하게.
“자주 입는 옷은 아니지만, 입어 봤습니다.”
드레스를 입었다면, 청순하게.
이민기의 포징에서는 단순히 옷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일 고유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흰 백지를 연상시키는 티셔츠를 입고 나왔을 뿐인데, 계속해서 보였다.
옷이 보였다.
투명한 옷이 너무나도 높은 선예도와 함께 동공에 박혀 들었다.
‘완벽하다.’
유규언 대표의 표정이 거듭 감탄으로 물들었다.
‘민기 씨가 잘 나가는 배우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하실 줄이야.’
이보다 더 완성도가 높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안타까웠다.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유규언이 이를 아득 물었다.
‘민기 씨, 이런 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많을 리가 없잖습니까!’
쇼핑몰 대표씩이나 돼서야 저 패션의 가치를 온전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 정도 안목이니 가능했던 일이다.
다른 두 명의 심사위원이 과연 알아볼 리가.
‘세상 사람들의 패션을 보는 안목은 민기 씨의 생각보다 아득히 낮단 말입니다!’
당사자들에게는 차마 들릴 가능성이 없는 외침이 처연히 퍼져나갔다.
그렇다.
너무 난이도가 높은 포징이었다.
옷을 잘 알다 못해, 그 옷의 에티튜드마저 알아야 제대로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연기라니.
이 얼마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연기인가.
유규언 대표 정도는 되니까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어지간한 패션 매니아라고 한들 그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50%라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유규언 대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참가자 중에서 패션모델로서는 제일 수준이 높은데, 정작 연기에서는 어떨지 모르니.’
연기를 잘 모르는 그이기에 한층 더 골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지금, 이민기가 선보이고 있는 것이 지금껏 참가했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뛰어나다는 걸 황의성 감독에게 대체 어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그가 미쳐버리려는 와중이었다.
“됐습니다. 더 볼 필요도 없겠군요.”
황의성 감독이 아직 연기를 덜 마친 이민기를 멈춰 세우더니 말했다.
“패션모델을 했었다고 했습니까.”
“아.”
그 말에 이민기가 눈을 거북이 기듯 돌려 유규언 대표에게 향하려는 찰나.
애써 제자리로 유턴하더니 말했다.
“네, 데뷔하기 전부터 꾸준히 해 왔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포징이 완벽하군요.”
황의성 감독의 입에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멘트가 흘러나왔다.
“……!”
유규언 대표가 눈을 크게 떴는데, 황의성 감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발언을 이어나갔다.
“단순히 옷을 갈아입는 수준을 넘어, 그 옷을 입은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민기 씨가 연기한 캐릭터를 제가 맞춰 보겠습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를 무렵.
황의성 감독이 눈을 이민기에게 고정한 채 깜빡이더니 말했다.
“마네킹이겠지요.”
“……!”
저 짧은 동작 속에서 캐릭터까지 분석한 건가.
유규언 대표가 놀라움을 못 감추는 사이 이민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감독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 말에 황의성 감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패션모델은 옷걸이입니다. 옷을 주인공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선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죽이고 옷을 보여줘야 합니다. 화려하게 보이려 욕심을 낸 나머지, 옷을 묻어버리는 패션모델은 무가치하지요.”
정론에 가까운 말이었다.
패션모델들은 얼마나 유명한 모델이라 한들, 런웨이에 올랐을 때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옷을 멋지게 보여주기 위한 매개체.
즉, 조연의 자리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이민기가 보여준 자유 연기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옷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연기.
단순한 패션쇼가 아닌, 패션쇼를 보이는 모델을 연기한 것이었다.
정석적인 영화 속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캐릭터.
“잘 봤습니다.”
그것에 황의성 감독이 작게 박수를 두드리더니 말했다.
“지정 연기는…… 굳이 안 봐도 충분할 것 같군요.”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도 이민기의 계산 범위 안이었다.
‘다 알아볼 줄 알았지.’
인터뷰에서 봤다.
황의성 감독이 [패션 앤 패션]이라는 작품을 기획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말이다.
‘해외 주요 패션쇼를 전부 탐방하는 건 물론, 아예 패션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몇 달 일하기까지 했다지.’
이뿐일까.
직접 대구에 있는 의류 공장에 들어가서 옷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고 들었다.
패션학과에서 외부 학생으로 수업을 듣는가 하면, 페어에 참가해 익명으로 출품하기도 했다.
평상시 옷에 각별한 관심이 있기도 했고.
종합해, [패션 앤 패션]이라는 작품 하나를 위해 스스로 공부한 시간만 1년이 가뿐히 넘어갔다.
단순히 소재로 패션을 고른 게 아니다.
패션이어야만 했기에, 패션을 선택한 것이었다.
황의성 감독은 그만큼 디테일에 미쳐 있는 사람이었다.
‘대충 찍을 사람이 아니지.’
그렇기에, 당연히 알아보리라고 생각했다.
유규언 대표?
그가 이번 오디션에 참가하리라는 정보 따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
이민기의 자유 연기에서 처음부터 유규언 대표가 보리라는 계산 따위는 끼어 있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단 한 명만을 저격한 연기였다.
‘황의성 감독, 당신을 위해 준비한 연기였습니다.’
황의성.
그가 패션에 품은 진심만큼이나, 자신의 진심 또한 내다봐 주길 바랐다.
대신 연기력 자랑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지정 연기로 밀어 넣었고.
[카페 델 디아] 오디션 때와 마찬가지로, 도박이었다.하지만 그 도박의 결과는.
“그럼,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스케쥴은 비워두셔도 좋겠습니다.”
볼 필요도 없었다.
물론, 완벽한 연기는 결코 아니었다.
이민기에게는 이번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타고난 단점이 있으니까.
본격적인 모델치고는 작은 키 같은 것.
하지만 뭐.
‘연출의 힘이 많이 필요하겠군.’
그런 건 감독들에게 일상이기도 했다.
165cm짜리 배우를 180cm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일상인데.
이민기 정도면 농구선수도 만들 수 있다.
“나가시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황의성 감독의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짧은 오디션이 끝을 맞이했다.
* * *
다음날.
이민기가 오디션 합격 통지를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정 연기를 보지도 않았다.
이는 네 연기력은 자유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니, 특출난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널 뽑겠다고 선언한 바와 다를 게 없음이었다.
‘영광이네.’
덕분에 이민기는 입가가 귀에 걸렸고.
“축하드립니다, 배우님.”
운전대를 잡은 박한모 매니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많이 기쁘신 것 같습니다. 원래 황의성 감독님을 좋아하셨나요?”
“네, 황의성 감독님이시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의성 감독님.”
이민기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답했다.
황의성 감독이 누구인가.
지금이니까 한국에서 예술적인 작품을 잘 만든다는 평가를 받지.
불과 몇 년만 지나면 세계적인 명감독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세기의 명감독이 아니던가.
그쯤 되자 몸값이 너무 올라, 할리우드에서도 제발 작품 하나만 달라며 사정사정할 지경이 되었다.
제작비라며 돈을 보따리로 싸가서 말이다.
이걸 누가 믿을까.
“…….”
생각해 보니까 아무도 안 믿겠군.
할리우드가 국내 감독에게 작품 달라고 조른다고 하면 비웃음당하겠지.
한국 감독이 아카데미를 씹어먹었다고 해도 안 믿을 테고.
더군다나 한국 드라마가 가까운 미래에는 세계 1위를 심심하면 찍는다고 하면 더 안 믿겠지.
머릿속에 구름 잡는 소리만 가득하다면서 아무도 상대 안 해 주지 않을까.
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빌보드 1위를 밥 먹듯 찍는 그룹이 나온다고 해도…… 아마 안 믿겠지?’
미래가 이렇다.
당장 코앞조차도 못 알아볼 지경이다.
“…….”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이민기가 박한모 매니저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매니저님. 하나만 의견 여쭤도 될까요?”
“그렇게 격식 차리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편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그게, 혹시 황의성 감독님이라면 할리우드에서도 충분히 먹히지 않을까요?”
“흐음, 그런 질문이군요.”
박한모 매니저가 생각에 빠진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답을 찾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 어렵겠지요.”
아.
대답 한마디에 맥이 탁 풀렸다.
박한모 매니저가 평소 작품을 보는 안목이 어마어마해서, 혹시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역시 시대가 너무 이른가.’
이민기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신 순간이었다.
“영화라는 건 감독 한 명이 잘나서 원맨 플레이를 한다고 될 물건이 아니니까요.”
박한모 매니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네?”
“황의성 감독님 개인의 역량이라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작품이 할리우드에 먹히려면, 배우부터 CG, 마케팅, 로케까지 다방면에 걸쳐 발전해야 합니다. 쉽지 않겠지요.”
박한모 매니저의 말을 조곤조곤하기 짝이 없었다.
이 순간의 답을 꺼낸 게 아니라.
평소에도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다듬어 왔던 철학을 살짝 선보인다는 것처럼.
“하지만 만약 그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촘촘히 맞물린다면, 지금의 한국 영화에는 할리우드에서도 먹힐 포텐셜이 충분하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답이 흘러나왔다.
박한모 매니저라는 사람이 이 업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관한 그런 거.
천재 혼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다 같이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현실적이면서도 그 위에 이상론이 부드럽게 섞인 대답이었다.
‘협업이라.’
어느 영화에 그런 대사가 있지 않나.
[Together, we stand.]그야말로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듯한 말에 이민기가 자그맣게 웃음을 지었다.
기대 이상의 의견에 이민기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매니저님, 그러고 보니까.”
“참, 배우님이라면 당장 할리우드에 진출해도 먹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빠릿하다.
얼굴이 절로 씰룩거릴 만한 말이 다짜고짜 튀어나왔다.
공감해주기도 그렇고, 반박하기에도 좀 미묘한 그런 말이 말이다.
‘영어가 가능하다라.’
영어를 아예 못 하는 건 아니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감이 넘치기도 한다만, 언어라는 게 하나 된다고 다른 게 되지는 않지.
일본어도 그렇지 않나.
애니메이션으로 듣기만큼은 원어민 수준으로 숙달한 사람이, 정작 메뉴판도 못 읽고 창문 열어달라는 말도 못하고는 한다.
‘연기에서 쓰이는 영어라면 또 다를 테니까, 영미권에 진출한다면 따로 공부를 많이 하기는 해야겠지.’
이민기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사이 박한모 매니저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요즘은 해외 진출도 흔한 시기이니까요. 배우님이라면 다음 작품은 해외에서 찍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미리 준비를 갖춰야겠지만 말입니다.”
“……생각은 해 볼게요.”
“진심입니다.”
“네, 저도 진심으로요.”
이민기가 피식 웃었다.
‘하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국이 미래 미디어 산업에서 한 자리 차지하게 되는 건 정해진 일이다.
그 미래에 내 자리 하나라도 마련하려면, 지금 잘나가는 신인 됐다고 안심할 게 아니다.
더 빡세게 일해야지.
박한모 매니저의 말마따나, 할리우드에서도 먹힐 배우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좋아, 열심히 살아 보자.’
그렇게 생각을 먹은 찰나였다.
“배우님, 이건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박한모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해외에 진출해 볼 생각 있으십니까?”
“네?”
“참고로, 지금 당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