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Star by Luck RAW novel - Chapter (97)
운빨로 탑스타-97화(97/200)
제97화
사단이라는 것을 아는가.
흔히 군대에서는 병사들을 편성해 놓은 것을 말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티브 오도슨 사단] [노호연 사단] [양차옥 사단]바로 특정 감독 아래에서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온 집단을 사단이라고 부르고는 하였다.
연출가.
각본가.
조명.
CG, 의상.
배우진까지 통틀어서 말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이 사단이라고 할 집단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단이 어디인가 하면.
‘역시 황의성 사단이다.’
황의성 감독을 중심으로 뭉친, 황의성 사단이 그러했다.
‘끝내준다. 어딜 봐도 거물밖에 없잖아. 평균이 교수급이야.’
이민기가 놀라운 표정으로 대본 리딩실에 모인 사단 구성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역시 국내 최고의 사단이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황의성 사단이란 국내에서 최고라 불려 마땅한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돈을 많이 주어서일까.
아니다.
황의성 사단에 들어갈 정도의 인물이라면, 국내 어디에서든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할리우드 입성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황의성 감독의 인품이나 명성이 뛰어나서일까.
아니다.
그의 인품은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버겁다.
눈빛만 마주쳐도 피곤하며, 말을 섞으면 자리를 떠나고 싶어진다.
커리어?
커리어가 뛰어나기는 하나, 황의성의 커리어가 뛰어난 것이지 그 밑 사람들의 명성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황의성 사단의 수준이 그리도 높다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작품 하나에 미친 사람들이라지.’
오로지 작품성 하나만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감독이 괴팍하든 말든 작품만 잘 뽑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뭉쳤다.
이들에게 황의성 감독의 작품은, 곧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였다.
[이번 작품으로 아카데미를 뚫겠다.]이 정도의 각오는 갖춘 이들이 태반.
황의성 감독이야말로 국내에서 곧 최고의 작품을 찍을 수 있다고 마음속 깊이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이민기 또한 그중 하나였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민기입니다. 존경하는 황의성 감독님의 작품에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부족한 게 있거든 따끔한 지도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민기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자, 대본 리딩실에도 일견 온건한 시선이 흘렀다.
까다로운 이들이 많지만, 황의성 감독 수준으로 까다롭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속으로 흥행한 배우라고 해서 고고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네.’
‘김도하랑 무슨 일 있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냥 뜬소문이었나?’
‘젊은 사람이 황 감독 같은 괴짜한테 반해서. 쯔쯔.’
누군가는 그를 좋은 시선으로.
누군가는 불신의 시선으로.
또 누군가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 속에 담긴 동일한 감정이 하나 있었으니.
‘과연 얼마나 잘할까?’
호기심이었다.
이민기의 연기자로서 쌓은 명성은 슬슬 업계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캠퍼스 스토리]에서는 가능성을 보였다. [언제까지고 푸르른]에서는 신인답지 않은 숙련도를 보였다. [카페 델 디아]에서는 한 작품을 끌고 나가는 장악력을 보여주었다.그렇다면 과연, [패션 앤 패션]에서는 어느 모습을 보일 것인가.
‘쉽지 않을 텐데.’
각본의 난이도는 이미 확인했다.
최상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연기는 없……지는 않고, 꽤 드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주문을 해 놓았다.
‘자, 해 봐라.’
모두의 기대감이 회의실 천장을 뚫을 정도로 뭉게뭉게 차오른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3번 씬부터 시작해 보지요.”
“네.”
“알겠습니다.”
황의성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두 배우가 일제히 답했다.
한 명은 이민기였으며, 다른 한 명은.
‘강세황 배우님.’
강세황이었다.
황의성 사단 속에서 명품 조연이라는 별칭으로 종종 불리는 사람.
캐릭터가 없다 못해 증발한 마스크에도 불구하고, 순수히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배우에게 연기파라는 수식어는 사실 수치에 가깝다.
배우라는 직업은 원래 연기를 잘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파라는 말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강세황이었다.
“아, 아.”
그가 입을 열었다.
“모델, 해 볼 생각 없어?”
“모델이요?”
“나 이 앞에 쇼핑몰 사람이거든? 하루에 한두 시간만 나와서 찰영하면 돼. 찰칵찰칵. 폼 나지?”
주인공 [이종호]가 모델 에이전시 직원 [노영훈]에게 캐스팅을 받는 장면이었다.
그 짧은 대사에도 불구하고 이민기의 촉각이 온통 곤두섰다.
‘역시 강세황이다.’
연기 속에 담긴 노련함이 차원이 달랐다.
“이 앞 학교 다니지? 공부 잘했겠네. 명함 받아. 학생이면 용돈도 필요하겠네. 돈 벌어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녀야지.”
짧은 대사만 들어도 느껴진다.
강세황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은 이미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사실, 이미 잘하는 배우들과의 대본 리딩이라면 수차례 겪어 봤다.
[언제까지고 푸르른]을 촬영했던 시절, 강도원과 최유창 배우만 해도 그렇지 않았나.둘 다 한국을 대표한다고 봐도 좋을 명품 배우들이다.
하지만 강세황은 달랐다.
“내가 보니까 학생 스타일이 좋더라고. 옷 좋아하지?”
뭐라고 해야 할까.
‘잘한다는 티가 전혀 안 난다는 타입이야.’
그저 한없이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마치 영화 속 배역이 현실에 튀어나온 것처럼.
그저 그 장면의 음원을 틀어놓은 것처럼 이질감을 기계적으로 거세했다.
그렇기에 무서웠다.
강도원 배우의 연기는 바위처럼 묵직했다.
[대답하지 마. 안 했으면 좋겠거든.]최유창 배우의 연기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이고! 사장님! 뭘 이렇게 많이 주셨어!]두 사람에게는 명백히 캐릭터가 있었다.
마치 사람 그 자체에서 비롯한 듯한 캐릭터가 연기 속에 풍부하게 배여 있었다.
이 점에서 볼 때, 두 거물의 연기는 공략할 방안이 정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상대역으로 적절한 캐릭터를 붙잡고 섞여 들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강세황의 연기는 달랐다.
‘불편하다.’
단점이 없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압도적인 장점을 내세우기보다는, 단점이 없다.
그렇기에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연기였다.
제아무리 부드러운 머리카락이라고 한들, 밍크 앞에서는 한낱 푸석푸석한 털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이 참 넓고도 넓구나. 강세황 배우님이 잘하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잘하실 줄이야.’
최고의 조연은 이 정도란 말인가.
자기 차례로 넘어오기까지 불과 3초의 시간, 이민기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북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재밌었다.
‘이러니까 실력이 늘지.’
이번 작품을 마칠 무렵이면 그 또한 얻어가는 게 있을 테니까.
본론으로 돌아가,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길 수 있는가.
둘 중 하나였다.
비슷하게 완성도로 정면 승부를 펼쳐 보거나, 아니면 압도적인 장점 하나를 살려 비벼보거나.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둘 사이에서 이민기의 선택이라면 단 하나였다.
“모델하면, 돈 많이 줘요?”
캐릭터였다.
* * *
“……!”
이민기의 입이 열렸다.
그 한마디에 리딩실의 모두가 일제히 놀란 사이, 이민기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돈이요.”
그 말에 김세황 배우가 움찔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응, 돈 많이 주지.”
명백히 떨었다.
하지만 저 떨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이민기의 연기에 놀란 것으로 보일 뿐.
실제로는 자기 대본 리딩의 일환에 불과했다.
그리고.
‘역시 가드가 견고하네.’
이 사실은 다름 아닌 이민기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강세황의 작품이라면 적어도 20편은 봤기에, 사소한 뉘앙스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였다.
“됐고요. 얼마 주는데요.”
짧은 대사다.
모델 일을 해보겠냐는 권유에, 돈을 얼마나 주겠냐고 대답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 속에 캐릭터가 한없이 극한으로 농축되어 있었다.
‘진짜 돈밖에 관심 없구나.’
‘밥맛 뚝 떨어진다.’
마네킹처럼 무감정한 연기 속에서,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감정 하나만이 유일하게 번들거렸다.
완숙하다.
신인답지 않게 과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의 맛이 살았다.
마이클 잭슨의 춤은 동작이 아닌 멈춤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했던가.
이민기의 연기 속에서도 절제의 미가 밤 구름 속 초승달처럼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야.’
리딩실을 둘러싼 스태프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물건이네.’
‘강세황 배우님 연기에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당황도 안 하고?’
‘재밌네. 디테일이 살아 있어.’
아이러니하다.
이민기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감정하기 짝이 없었다.
감정을 거세당한 마네킹처럼 차가웠다.
아니, 미적지근했다.
그 미묘한 간격에서 깊이를 연출하다니.
강세황 배우가 실로 자연스러운 웃음을 희미하게 입가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우리 친구, 돈 이야기부터 먼저 하면 아저씨가 좀 그런데.”
“그럼 안 해요.”
“사무실 가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지?”
“…….”
“야, 하지 마, 하지 마. 안 해도 돼.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아.”
“네.”
“……어우, 씨.”
철벽이다.
여기에서 이민기의 연기.
그의 연기가 생각보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철저한 인풋이었다.
그것도 작품이 아닌 인생에서 쌓은 인풋이.
‘나도 사기당했었지.’
어수룩해서 사기를 당하는 인간 말이다.
이민기가 겪어 왔던 지난 삶이란 것이 그러했다.
데뷔에 실패하고 또 실패해, 인간으로서 절벽에 다다랐을 때 사기꾼에게 당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계약했지.
이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의 마음이라면 잘 알고 있다.
이민기는 그저, 그 시절 품었던 기분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마음이 병든 사람은 그 아픔을 티 내지 않는다.
그저 아픔이 배어날 뿐이었다.
‘이종호는 나다. 조금 더 불행한 삶을 살 나.’
이민기가 자기 자신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며 입을 열었다.
“병원비 낼 정도는 줘요?”
“병원비? 무슨 병원비.”
“우리 아빠, 아파요. 병원에서 나가래.”
그렇게 마지막 대사와 함께 3번 장면이 끝을 맞이했다.
불과 2분조차도 안 됐던 리딩이다.
하지만 그 전과 후로 이민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명백히 달라져 있었다.
‘그냥 신인이 아니네.’
이민기는 달랐다.
그는 뭐라고 해야 할까.
‘특별한 맛이 있어.’
그렇다.
특별했다.
업계에서 오랜 시간 일하면서, 극히 소수에게만 목격할 수 있는 반짝거림이 그의 연기 속에 녹아 있었다.
강세황마저도 본인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야 말았다.
‘요즘 신인 배우들이 다 이렇게 잘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은퇴해야 했을지도 모르겠군.’
후배가 기특하다.
그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완성했던 숙련도를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남자 신인이 가지고 있는가.
김도하를 보고 업계의 미래가 박살 났다고도 생각했는데, 이민기를 보니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듯했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태양이 될지도 모르는 불씨가.
“후우, 이민기 잘하네.”
그렇게 누군가가 본능적으로 중얼거린 찰나였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사람이 변한 것처럼 밝고 활기찬 이민기 본연의 목소리가 울렸고.
조금 전까지 연기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기는 한 건지, 압도적인 갭 사이에서 대본 리딩실의 모두가 움찔한 찰나.
“4번 장면도 한번 보죠. 일어서서.”
어느새 황의성 감독의 다음 지시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이민기의 단독 연기였다.
그리고.
‘감독님이 또 웃으셨다.’
오직 김 연출 감독만이 다시 한번 황의성 감독의 웃음을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