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24
제124화
그녀를 돌려세운 조개는 문에 기댄 채 짙은 시선을 보냈다. 머릿속에는 그녀가 했던 말만이 맴돌고 있었다. 최대한 만나지 말라던 위상홍의 말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가 몸을 굽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어찌 이리 달콤한 게냐?”
“으음…….”
위라도 눈을 감고 까치발을 든 채 그의 입맞춤에 화답했다.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옷 안을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살결을 마주하자 잠시 멈칫했던 손은 더욱 대담해졌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녀의 말흉 안을 대담하게 어루만졌다.
위라는 그를 막아낼 수 없었다. 막아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눈을 꼭 감은 그녀의 볼이 달아올랐다. 그제야 조개가 그녀를 놓아주더니, 엄지로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꿀보다 더 달구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 위라가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문 바깥에 서 있던 위상홍에겐, 모든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얼굴이 납빛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 조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못한 게, 뼈저린 후회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경희궁, 소양전.
홍목 나한상에 앉은 진 황후는 비단 영침에 기대어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 보고 있었다. 그림 속의 소녀들은 하나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자세도 제각각이었고 표정도 다양했지만, 묘령의 소녀라는 점은 동일했다.
진 황후가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옆에 있던 추 마마에게 말했다.
“집안이 좋고 소양이 있는 아가씨가 이게 전부란 말이냐?”
추 마마가 디딤판에 무릎을 꿇고 진 황후의 다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진 황후가 한 번 더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가씨는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림 하나를 추 마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예부상서의 딸은 예쁘긴 한데, 미간이 너무 넓어서 얼핏 보면 조금 이상하고…….”
또 다른 그림이 추 마마 앞에 놓였다.
“유(劉) 태부(太傅)의 손녀는 너무 마르지 않았느냐?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구나. 아이를 낳고 기르기가 영 힘들 것 같아.”
진 황후의 평가가 쭉 이어졌다. 이 사람은 너무 말랐고, 저 사람은 외모가 별로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추 마마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난처해했다.
황후마마께선 그동안 예쁜 아가씨들을 너무 많이 보아 오셔서,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아가씨들은 마음에 차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고단양, 고정양, 위라 같은 아가씨들을 봐도 전부 함초롬하니 제일가는 미인들이었다. 특히 영국공부의 넷째 아가씨 위라는 정말이지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부족할 정도였다.
추 마마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진 황후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장생이 단양이도 싫다고 하는데, 이런 아가씨들은 말해 무엇 하겠느냐. 이를 어쩐다? 평생을 혼자 살면 어쩌냔 말이다.”
추 마마가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정왕야께서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하신 것뿐입니다. 이 그림들을 정왕야께 보여 드리는 게 어떨지요? 혹시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진 황후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터였다.
심지어 그녀는 아들이 여자가 싫다고 할까 봐 겁이 났다. 떡두꺼비 같은 손자는커녕 가정을 이루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 될 테니 말이다.
마침 그때, 조유리가 치마를 들고 들어와서는 나한상에 펼쳐진 그림들을 보더니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모후, 이게 다 뭐예요? 무슨 그림이 이렇게 많아요?”
진 황후는 급히 그녀를 옆으로 불러 앉혔다. 옆에서 거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조유리의 손을 끌어당기는 진 황후의 손길은 마음만큼이나 조급했다.
“어서 이 애미 좀 도와다오. 개아가 어떤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겠느냐? 나는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없구나. 하도 봐서 눈이 침침해질 지경이다.”
조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진 황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보나 마나 오라버니의 아내를 물색하려는 것이었다.
열 장도 넘는 그림을 살피던 조유리는 한참 후,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다 별로인 것 같아요.”
진 황후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진 황후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오라버니는 이런 여자를 안 좋아해요…….”
진 황후가 눈을 번쩍 뜨며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개아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안다는 말이냐?”
“알지요.”
조유리가 촉촉한 눈망울로 배시시 웃고는 위라를 떠올렸다. 그녀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느릿느릿 말했다.
“오라버니는 보는 눈이 높아요. 아주 예뻐야 해요… 그냥 예뻐서는 안 되고, 손쉽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뻐야 해요. 그리고 피부가 하얘야 하고, 앙증맞으면서도 귀티가 나야 해요. 성격도 너무 나쁘면 안 되고… 목소리까지 좋으면 가장 좋겠지요.”
열심히 듣고 있던 진 황후의 얼굴에 또다시 실망이 깃들었다. 들을수록 조유리가 자신을 놀리는 듯했다. 그녀가 조유리의 이마를 콕 찌르며 말했다.
“아니, 그런 아가씨를 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이냐? 너도 네 오라비가 평생 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야?”
조유리는 내심 억울했다. 어째서 그녀를 탓한단 말인가? 오라버니가 위라를 좋아해서 위라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니 하나도 틀림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도, 진 황후의 머릿속에 스쳐 간 수많은 아가씨들 중 위라는 없었다. 이미 혼사가 정해져 있는 몸이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아직 송휘와 위라의 혼사가 틀어진 일을 모르니, 그녀를 떠올리지 못할 수밖에.
조유리는 입을 비죽거리더니 말을 아꼈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에 매단 향낭을 만지작거렸다. 연꽃 문양의 청옥 장식에 손이 닿을 때면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이 향낭은 그녀가 자어산장에 머물 때, 양진이 사다 준 것이었다. 게다가 안에 든 꽃잎은 그가 직접 말린 것들이었다. 손재주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 햇볕 아래에서 꽃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말렸을 모습이라니. 그 광경을 상상하면 조유리의 입꼬리는 절로 올라가곤 했다.
그녀가 실없이 웃고 있자, 진 황후가 입을 열었다.
“유리야, 그 향낭은 어디서 난 것이냐? 요 며칠 계속 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예전엔 못 보던 것이로구나.”
조유리가 황급히 고개를 들면서 눈을 깜박였다.
“아라가 준 거예요. 안에 든 꽃잎도 직접 말린 거고요.”
진 황후도 위라가 작은 온실을 가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예쁘구나.”
조유리가 향낭을 그녀에게 건네며 빙그레 웃었다.
“향도 무척 좋아요. 모후께서도 한번 맡아 보실래요?”
손을 내젓던 진 황후는 마침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잠시 망설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자어산장에서 정국공부의 삼공자와 만난 적이 있다던데?”
한참 만에야 그녀가 가리키는 이를 알았지만, 조유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황후가 물었다.
“너희가 어렸을 때 같이 놀고 그랬는데. 삼공자가 너한테 바람개비도 선물했었지. 그때 네가 아주 좋아하지 않았느냐.”
진 황후는 대부분 경희궁에서 머무르며, 한가할 때마다 아들과 딸의 혼사를 걱정하는 데 시간을 쏟곤 했다. 조개의 혼사에 비하면 조유리의 걱정은 가끔 하는 정도였지만, 그녀가 무사히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딸이었다. 평생 가까운 곳에서 보살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찬 딸을 출가도 시키지 않고 둘 수만은 없었다. 혼기를 놓친 조유리가 자신을 원망하는 일은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진한 아쉬움을 억누르며, 딸을 위한 혼사 자리를 찾는 데 열심이었다.
진 황후의 마음에 짓눌린 채, 조유리는 향낭의 주름을 만지작거렸다.
“기억 안 나요.”
그러나 진 황후는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는지,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삼공자와 우연히 마주쳤지 뭐냐. 그런데 오랫동안 못 본 사이에 의젓한 소년이 되어 있더구나… 아직도 널 기억한다면서, 너희가 어렸을 적 얘기를 하는데… 나도 잊어버린 얘기를 어쩜 그렇게 또렷이 기억하는지…….”
“모후.”
조유리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입을 비죽거렸다.
“그 얘긴 별로 안 듣고 싶어요. 다른 얘기 하면 안 될까요?”
그녀도 바보가 아니니, 진 황후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의도를 뻔히 알고 있었다.
혼인할 나이가 되었음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진 황후에게 어찌 말할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고종훈도, 다른 누구도 아닌 호위 무사 양진인 것을.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추 마마가 분위기를 바꿔 주었다.
추 마마는 두 손을 소매에 넣으며 보고했다.
“마마, 정왕야께서 오셨습니다.”
진 황후의 관심은 금세 그쪽으로 쏠렸다. 그녀가 바깥을 바라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영지 문양이 금사로 수놓인 검푸른 직철을 입고, 허리엔 옥대를 맸다. 그가 걸을 때마다 금사로 장식된 먹색 장화가 매끄럽게 빛났다. 조개가 다가와 진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소자, 모후를 뵈옵니다.”
진 황후가 그를 가까이 불러 위아래를 훑어보며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 어쩐 일로 이리 단정하게 갖춰 입었느냐? 누구를 만나러 가기라도 하는 것이냐?”
조개가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잣나무 궁등(宮凳)에 앉아 느긋하게 말했다.
“소자가 모후를 뵈러 오는 것 말고 또 누구를 보겠습니까?”
진 황후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도 어미를 잊지는 않았구나? 요즘 뭐가 그리 바쁜지 한 번도 오지 않더니. 나는 또 네가 이 어미를 잊은 줄 알았지.”
조개가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소자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나한상에는 여전히 그림들이 펼쳐져 있었다. 조개가 고개를 들자마자 그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그림은 유 태부의 막내 손녀 유영(劉瑩)이었다. 조금 전 진 황후가 너무 말랐다고 했던 아가씨였다.
그림 속 소녀는 연두색 추사 치마를 입고 둔덕 위 버드나무 옆에 서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든 채 활짝 미소 짓는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뼈만 남은 듯 마른 소녀였다.
그의 시선을 유심히 관찰하던 진 황후가 본론을 꺼냈다.
“마침 잘 왔구나. 이 그림들 좀 보거라.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느냐? 있다면 이 어미에게 말하거라. 내가 직접 혼사 자리를 마련하마.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없으면, 다른 아가씨를 더 찾아보마.”
이리 된 이상, 그에게 혼인을 독촉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