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25
제125화
조개의 얇은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거절 대신, 묵묵히 그림들을 살폈다.
오히려 진 황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단박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얌전히 그림을 살펴보고 있지 않은가.
조개는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한 다음, 직접 자호선필을 들고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가위표를 그었다. 열 장이 넘는 그림을 다 보고 나자, 모든 그림에 가위표가 그어졌다.
진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으려는데, 그가 그림들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모후, 전부 소자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진 황후로서는 괜히 기뻐한 셈이다. 역시, 그림을 유심히 본 게 아니라 빨리 나가려는 게 목적이었군. 골이 난 진 황후가 반문했다.
“그럼 네 마음에 드는 아가씨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그가 눈을 내리깐 채 미소 지었다.
“그림에는 없습니다.”
순간, 진 황후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있긴 있다는 얘긴가? 자기를 놀리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조개는 한참 만에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천천히 말했다.
“영국공부에 있습니다.”
영국공부에는 총 다섯 아가씨가 있었다. 첫째 아가씨는 진즉에 출가했고, 둘째는 이제 막 약혼했으며, 다섯째 위쟁은 며칠 전 여양왕부로 시집갔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아가씨는 셋째와 넷째 둘뿐이었다. 진 황후는 셋째 위야와는 그리 면식이 없었고, 넷째 위라만 가깝게 알고 지냈다. 눈이 휘둥그레진 진 황후의 표정이 이내 복잡해졌다.
“그… 그럼 어느 아가씨란 말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영국공부의 셋째 아가씨 위야는 인물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궁에서 열리는 연회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조심성이 많고 약간 소심해 보였다……. 그녀도 별로 주의 깊게 보지 않았으니 조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위라는 달랐다. 위라는 어릴 때 조유리의 공부 친구였고, 그 후로는 조유리와 자매처럼 지내며 함께 자라다시피 했다. 자연히 조개는 그녀를 자주 보았을 테고, 어린 동생과 다름없이 보살폈으리라. 자연히 주의 깊게 볼 때도 있었겠지.
이리저리 생각이 뻗어 나가자, 진 황후의 마음은 괜스레 복잡해졌다. 그래, 내가 왜 여태 위라를 생각하지 못했지?
위라는 올해 열넷이었다. 소녀는 입궁할 때마다 유리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수려했다. 이가 하얗고 고른 데다 눈동자는 흑진주처럼 아름다웠다. 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위라가 며느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늘 어리게 보았던 소녀가 이만큼 장성하지 않았는가. 진 황후의 마음에 흡족함이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불안했다. 만약 위라가 아니라 셋째 위야라면 어쩐다? 도대체 아들의 취향을 알 수가 없으니, 원!
진 황후는 손에 땀을 쥐며 조개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한상에 앉아 있던 조유리가 몰래 웃었다. 몰래 음식을 훔쳐 낸 쥐처럼 뿌듯한 웃음이었다. 이 상황이 못내 기쁘기도 했다.
역시나 조개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넷째 아가씨, 위라입니다.”
순간, 진 황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던 바위가, 드디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진 황후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조개가 언제부터 그 소녀를 좋아했을까? 계속 혼인하길 거부했던 게 위라 때문이었나? 위라는 종종 소양전에서 조개와 마주친 적도 있건만, 조개는 진 황후에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능청스러운 아들이었다. 이왕 좋아한다면 자신에게 말하면 될 것을 혼자 숨기고 있다니, 설마 자신이 위라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던 걸까?
진 황후의 마음은 쉴 새 없이 파도를 탔다. 자신이 초조해하는 동안, 아들은 이미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었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맥이 빠졌다가도, 잔잔한 기쁨이 포말이 되어 흩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진 황후가 황급히 물었다.
“아라는 충의백부의 송휘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더냐? 네가 아라를 좋아하면 충의백부의 며느리를 빼앗는 것 아니냐?”
조유리가 비취 콩떡을 한 입 베어 물면서 방긋 웃었다.
“모후, 그 혼사는 진즉에 틀어졌어요. 모르셨어요?”
조유리의 말에 모든 걸 깨달은 진 황후는 그제야 진심 어린 미소를 내비쳤다. 연신 잘했다는 칭찬을 내뱉던 그녀가 조개에게 얼른 물었다.
“그래서 어찌할 계획이냐? 영국공에게는 언질을 줬느냐? 황상께는 말씀드렸고? 다들 어떤 반응이시던?”
조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황께는 아직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우선 영국공의 승낙을 받고 나서 부황께 성지를 내려 주십사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그것도 좋지…….”
진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혼사에 드디어 진전이 있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위라가 마음에 들었는데, 이제는 그 아이가 아들의 혼사까지 해결해 주었으니 더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장생아, 네가 아라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데 영국공이 동의하겠느냐? 그 고지식한 영감은 규율을 끔찍이도 잘 지키는 사람인데 승낙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자단목 매괴의에 앉아 찻잔을 든 조개의 손이 멈칫했다.
“아홉 살 차이가 큰 것입니까?”
옆에 있던 조유리가 콩떡을 삼키며 끼어들었다.
“안 크지, 안 커. 조금 나이 차가 나는 것도 괜찮지.”
“…….”
진 황후가 손가락을 구부려 조유리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조유리가 이마를 가렸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오라버니가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그녀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오라버니, 농담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아라보다 아홉 살밖에 안 많네, 뭐. 열 살까지는 아니잖아. 열 살이 넘게 차이 나면 그건 좀 그런데, 오라버닌 조금 많은 것뿐이야.”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던 조개가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일 없으시면 소자는 가 보겠습니다.”
아들이 당장이라도 며느리의 손을 잡고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기에, 진 황후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를 붙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개가 나간 후, 진 황후는 조유리를 옆으로 불러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정색하며 물었다.
“말해 보거라,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게지?”
조유리가 빙그레 웃으며 진 황후의 품에 파고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그녀도 상황 파악을 할 줄 알았다. 위라의 평판을 위해서라면 위라와 조개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게 마땅했다. 그녀는 진 황후가 아무리 캐물어도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송이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모른 척했다.
결국 진 황후가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 * *
소양전에서 나온 조개는 늘 지나던 오솔길에 들어섰다.
초가을이었다. 오솔길 양쪽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멀지 않은 곳에 새빨간 석류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문득 조개가 걸음을 멈췄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나아갔다. 그의 맞은편 나무 아래에서, 나비와 꽃문양이 수놓인 분홍색 웃옷을 입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정말 위라를 좋아하는 거야? 영국공부에 가서 혼담을 꺼낸다는 게, 걔를 아내로 맞겠다는 얘기야?”
그녀의 초조한 표정과 달리, 조개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더냐?”
그 말이 날카롭게 고단양의 가슴에 꽂혔다.
어떻게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에게 시집갈 사람은 자신이었건만, 위라가 나타나 자신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조금 전 진 황후를 뵈러 소양전에 갔던 그녀는 문밖에서 모든 대화를 들었고,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조개는 정말 위라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찌 호감도 없이 그 소녀에게 이토록 오랜 시간, 주의를 기울였을까?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개는 스스로의 입으로 사실을 털어놓아, 고단양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충격이 지난 자리에는 불쾌함이 몰려왔다.
이전까지는 자신이 위라에게 뒤처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묘령의 소녀였을 때, 위라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햇병아리였다. 한데 조개가 그녀의 어떤 부분에 마음을 줬단 말인가?
고단양이 고개를 들고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그럼 나는?”
조개가 문득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단조로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다른 혼사 자리를 찾아보거라. 널 아내로 맞을 수는 없으니.”
말을 마친 조개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고단양이 그의 소매를 덥석 움켜쥐었다.
“오라버니가… 위라를 아내로 맞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는, 난 정부인이 아니어도 괜찮아.”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깊이 고민할 시간도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오랜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는 것보단 나았다. 그녀의 마음은 늘 조개를 향해 있었고, 다른 누구에게도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단양은 최대한 양보했다고 생각했지만, 조개의 눈에 비친 그녀는 심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단양의 손을 뿌리쳤다. 무미건조했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지 몰라도, 난 아라를 섭섭하게 하고 싶지 않구나.”
고단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굴욕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붙들린 양,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조개가 점점 멀어진 뒤에도, 그녀는 걷는 법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석류나무 뒤에서 잔잔한 꽃문양의 하늘색 망사 웃옷을 입은 아가씨가 걸어 나왔다.
고청양이 그녀의 곁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언니, 정왕 오라버니가 저렇게 확실하게 말하잖아. 그냥 어머니랑 이모님이 말씀하신 대로 서(徐) 각로(閣老) 아들한테 시집가. 그 사람 초상화 봤는데 외모도 괜찮더라고… 인품도 훌륭하고 말이야.”
고단양의 얼굴에 시린 한기가 맺혔다. 그녀가 끝내 비단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흐느꼈다.
“네가 뭘 알아……. 좋아하는 사람이나 있어?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아냔 말이야! 서 각로 아들한테 시집갈 바엔 그냥 비구니가 되는 게 낫겠어!”
고청양이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있다고 해도, 이렇게 죽기 살기로 매달리진 않을 거야. 그 사람이 날 싫다고 하면, 다른 남자를 또 찾아보면 되지 뭐.”
고단양에겐 동생의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점점 작아지는 조개의 뒷모습을 향해, 들리지 않는 흐느낌을 내뱉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