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62
제162화
조유리가 고개를 떨구며 눈을 비볐다.
“난…….”
산비탈 아래에서 화각 소리가 울렸다. 장렬하고도 아득한 소리가 계곡을 메웠다. 화각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기세등등하게 발맞춰 행군했다. 월동으로 가는 마지막 분대가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양진이 조유리의 어깨를 꽉 잡았다. 부탁 같기도 했고, 애원 같기도 했다.
“기다려 주세요. 예?”
조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군대가 벌써 출발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말에 올라탄 양진은 조금 가다가 결국 다시 돌아왔다.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조유리를 말 등에 태우고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산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조유리는 깜짝 놀라 말갈기를 붙잡았다. 목소리가 바람에 날렸다.
“양진 오라버니?”
양진이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대열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며 말했다.
“조금 이따 뒤에서 마차가 따라올 겁니다. 궁으로 모셔다드릴 테니 저와 조금만 같이 가 주십시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애절함이 조유리를 붙들어 놓았다.
조유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에서 ‘만(萬)’ 자가 수놓인 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줄게. 군대에서 은냥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거야. 뭔가 돈이 필요할 곳은 있을 것 아냐?”
그녀는 입고 먹는 것에 걱정이 없으니 한 번도 은냥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었다. 생계를 걱정해 본 일이 없으니 은냥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할 터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것까지 챙길 정도면, 얼마나 그를 생각했다는 것일까. 양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잠시 억누르고 있었다. 이어 조유리가 자신의 목에 걸린 옥 장식을 풀어 그의 것과 바꿨다.
“이건 오라버니 생일 때 내가 준 거야. 난 왼쪽, 오라버니 건 오른쪽.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바꾸자. 안 돌아오면, 나는…….”
양진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재잘거리는 입을 막았다. 물론, 그는 돌아올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몸이 성치 않거든 기어서라도. 그녀가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모습을 볼 순 없었다.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아래쪽에서 행군하던 병사가 고개를 들더니, 산비탈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씩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아이고, 어떤 분이 이렇게 복이 많으실까? 애인이 먼길도 마다 않고 배웅을 나오다니. 우리더러 부러워 죽으라는 건가!”
궁상맞은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보니, 산비탈 위에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는데, 눈썰미가 좋은 누군가가 말했다.
“정왕이 직접 추천한 양 수비(守備) 아니야? 쯧쯧, 아주 사랑에 푹 빠지셨구먼…….”
“안고 있는 사람은?”
“피풍으로 가려서 잘 안 보이네.”
“얼핏 보면 일단 미인 같은데…….”
병사들은 흥미진진하게 수다를 떨며 자꾸만 그쪽을 쳐다봤다. 양진은 조개가 친히 추천한 사람으로, 군대에 들어오자마자 정오품 수비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또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그에 대한 비평은 자연스레 늘어났다.
얼마 후, 뒤에서 마차 한 대가 따라왔다. 양진은 조유리를 마차에 태웠다. 위라가 가림막을 걷어 조유리가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유리의 뒷모습만 봤을 뿐,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한 병사들이 실망하던 그때, 마차 안에서 손 하나가 쑥 나왔다. 백옥처럼 흰 피부에 청옥이 박힌 금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는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얼핏 드러났던 아름다운 자태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희미한 형태만 봤을 뿐, 위라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가림막이 내려가고, 바깥의 모든 시선이 차단되었다.
“참나, 저쪽은 더 예쁘네. 양진은 전생에 무슨 공을 세운 거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누군가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위라와 조유리는 왔던 길을 따라 성경성으로 돌아갔다. 성안에 들어섰는데도 조유리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다. 이대로 궁에 돌아가면 진 황후에게 들킬 게 뻔했다. 위라는 생각 끝에 버드나무 골목의 찻집으로 조유리를 데려가 잠시나마 평탄(評彈, 민간 문예의 한 가지)을 듣기로 했다.
위라는 별실 하나를 잡아 조유리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의 별실은 칸마다 가림막으로 나뉘어 있어 독립된 공간을 누릴 수 있으면서도 난간에 기대어 아래에서 하는 평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는 을 병창하고 있었는데, 구슬픈 곡조가 흘러나왔다.
맞은편에 앉은 조유리는 모든 슬픔이 자기 것 같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위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고른 듯싶었다. 평탄을 들으러 오는 게 아니었나…….
위라는 오히려 양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척하고, 당당하게 조유리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으리라.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고 싶겠는가?
물론, 당사자인 조유리로서는 양진과 헤어져 있는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 당연했다. 위라는 그녀를 위로할 방법이 없기에, 그저 스스로 납득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일은 조개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가 쉽게 외출을 나온 데는 조개의 허락이 있었을 테니까. 위라는 국화 꽃잎 모양의 편호(扁壺)를 들어 두 찻잔에 차를 따른 다음, 국화 문양이 그려진 오색 찻잔을 조유리 앞으로 밀었다.
“이렇게 울다간 찻집이 네 눈물에 가라앉겠어.”
조유리가 눈물을 닦으며 위라의 볼을 꼬집었다.
“나빴어. 자꾸 날 놀리고. 내가 울고 싶어서 우니? 나도 참을 수 있으면 좋겠다.”
위라가 그녀의 손을 피하며 다른 쪽 모서리에 앉아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진이 난을 평정하러 월동으로 가는 건 좋은 일이야. 공을 세울지 어떻게 알아? 당당하게 돌아오면, 양진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황께서 먼저 너와 양진의 혼사를 추진하실지도 모르잖아.”
위라의 말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양진의 실력이라면 소소한 공적을 쌓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조유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걸 어떡해.
위라가 또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언니랑 양진 오라버니랑 둘이 살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겠지. 그거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거 아니겠어?”
조유리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아가씨라 부끄러움이 많았다. 조개에게 훈련이 되어 능청스러운 위라와는 달리 그녀는 금세 민망해서 버럭 소리쳤다.
“자꾸 놀리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너, 내가 너와 오라버니의 일을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위라가 멈칫했다.
“무슨 일?”
조유리가 위라의 귀에 속닥였다.
“모후께서 정왕부에 보낸 어멈이 매일 궁에 와서 보고를 하는데 말이야. 너랑 오라버니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안 일어난다던데. 매일 방 안에서 뭘 하길래 안 일어나니?”
이제 위라의 얼굴이 달아오를 차례였다. 그녀가 조유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안 알려 줘.”
누가 조개 아니랄까 봐. 밤에 그녀를 괴롭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낮에는 본인의 권법 연습이 끝나도 그녀를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잔뜩 땀을 흘리고 진한 향을 풍기며 그녀를 품에 안고 비비다, 결국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 그녀를 안고 정실에 가서 목욕을 했다…….
위라가 말하지 않으니 조유리도 더는 독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장난을 치고 나니 조유리는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아까처럼 애가 타고 슬프지도 않았고,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다.
위라는 조유리와 한참 담소를 나누다가 후원에 가려고 금루를 데리고 별실에서 나갔다.
그녀가 칸막이 문을 열자마자 바로 옆 별실의 문도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그녀가 있던 별실은 가장 안쪽에 있어서 나갈 때 무조건 옆의 별실을 지나야 했다. 걸음을 옮기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이글대는 시선을 마주했다.
이송이 별실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가녀린 아가씨가 바싹 기대어 있었는데, 낯익다 했더니 조금 전 을 병창한 광대였다.
“나리, 왜 안 가세요?”
아가씨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내밀면서 물었다.
이송이 한 손으로 거칠게 그녀의 얼굴을 별실 안으로 밀어 넣으며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꺼져라.”
아가씨는 불쾌했다. 조금 전만 해도 자상하기 그지없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던 그녀는 그의 험악한 얼굴을 보자마자 금세 주눅이 들어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위라는 더러운 것을 본 것처럼 시선을 옮기며 이송을 지나치려 했다.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그가 위라의 앞을 막아섰다. 위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왼쪽으로 한 발 갔다. 한데 이송도 그녀를 따라 왼쪽으로 한 발 옮기더니, 그녀가 오른쪽으로 향하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건장한 그의 몸은 거대한 산처럼 위라의 앞을 막아선 채 도무지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송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길고 살짝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날갯짓하는 나비의 모습 같았다. 그가 손을 뻗은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조롱과 멸시가 담긴, 이송이 가장 싫어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이 멀길 바랐다. 그녀의 찬란한 날개를 꺾고, 그녀가 다시는 그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자신을 다시금 밀어내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이송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위라가 냉랭하게 말했다.
“꺼져.”
이송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오만함과 냉랭함을 담은 시선으로 위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 손을 이 층의 난간에 대고 있었는데,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니 위라는 아예 그를 빙 돌아서 지나가려 했다. 이런 사람은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이송은 끈질겼다. 팔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기까지 했다.
위라가 멈춰 섰다. 지독한 술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계속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다시 보니 이송의 초점 없는 눈과 축 처진 눈썹은 누가 봐도 만취한 주정뱅이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송에 대한 반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위라가 손목을 빼려 하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이송, 창피하지도 않나?”
그 말에 자극이 되었는지, 이송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긴커녕 오히려 더 꽉 잡았다. 그녀를 뒤에 있는 수화문으로 밀어붙이더니, 어두운 시선이 위라를 붙들었다.
“내가 왜 창피한지 어디 한번 말해 보시지?”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