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8
제18화
영국공부로 돌아온 아이들은 곧장 흩어졌다. 위라와 상홍은 송원으로 갔고, 위쟁은 반쯤 가다가 방향을 틀었다. 은행원 쪽으로 가는 걸 보니 두 씨에게 하소연하려는 모양이었다.
오늘 위쟁이 가여운 구석도 있었다. 물에 빠진 것도 모자라 코까지 다쳤으니, 두 씨가 얼마나 마음이 쓰라릴지 불 보듯 뻔했다.
위라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두 씨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상상을 마치고 금루를 불렀다.
“금루 언니, 아버지는?”
금루가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닦아 주며 말했다.
“오노야께선 방금 돌아오셨어요. 지금은 앞마당에서 함께 온 손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세요. 노야가 보고 싶으세요?”
위라가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충의백부에 갔었는데, 위쟁이 잘못해서 물에 빠졌어. 지금쯤 부인한테 하소연하겠지. 그러면 부인은 아버지를 뵈려고 할 거고. 아버지는 요즘 부인 얘기만 나오면 기분이 안 좋아지시는데.
언니, 나는 아버지가 부인을 만나는 게 싫어. 그리고 위쟁은 충의백부에서 진찰도 받았는데 아무 이상 없댔어. 아버지께서 최근에야 기분이 좀 나아지셨는데, 부인이 아버지 기분을 망치지 않게 할 순 없을까?”
금루가 보기에 그녀의 말은 참으로 합당했다. 금루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가씨께서 노야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 깊으시네요. 노야께서 아시면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은행원에 한번 가 볼게요. 만약 거기서 오노야를 뵈러 가겠다고 하면, 오노야께서 지금 손님을 만나고 계셔서 마님을 만나기 힘드시다고 얘기할게요.”
위라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반달을 만들어 냈다. 금루는 참으로 영리해서,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니 말을 적게 해도 되었다. 게다가 위곤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두 씨는 위쟁의 하소연을 듣자마자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예전처럼 위쟁을 지켜 줄 수 없었다. 떨어진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과연 그녀의 쟁아에게 살길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위곤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 이걸 핑계로 송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위곤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녀는 위곤이 지금 손님을 접대하는 중이라 그녀를 만날 수 없다고 답했다.
두 명의 호위무사가 문을 지키고 있어, 두 씨는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다가가기만 하면 길을 막고,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그녀를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이듯이 돌아갔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 가까스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두 씨의 가슴속은 화산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거듭 생각해 봐도 화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한편, 위라는 설 선생의 수업을 예습해 둘 참이었다. 그때 시녀 금옥(金屋)이 들어와 고했다.
“아가씨, 오노야께서 전청(前廳, 바깥 대청)으로 잠깐 오시랍니다.”
위라는 자단목 수돈(綉墩, 도자기로 만든 북 모양의 정원용 걸상)에서 뛰어내리며 서책 표지의 먼지를 털었다.
“나를? 왜?”
금옥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가씨께 누구를 소개해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위라는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소개해 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책장에서 힘들게 찾아낸 을 옻칠한 자단목 평두안(平頭案)위에 고이 올려 두었다. 앳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았어. 가자.”
금옥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초수유랑(抄手遊廊, 좌우의 방을 따라 정방까지 이어진 긴 낭하)을 지나고, 천당(穿堂, 중국 가옥에서 두 개의 뜰 사이에 있어 통로 역할을 하는 대청)을 지나 전청에 도착했다. 전청으로 가는 도중에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위라는 전청 입구에 선 사람을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위라를 데려다주었던 호위무사, 주경이었다.
그렇다면 안에 있는 사람은…….
위라가 전청에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두메밤나무 관모의에 앉은 소년이 들어왔다. 금사로 수놓은 구렁이가 소년의 하늘색 금포(錦袍)에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었고, 허리에는 상아로 만든 접선과 백옥으로 만든 이호(螭虎, 이무기와 호랑이를 닮은 전설의 동물) 문양의 옥패를 달아 두었다.
소년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옷과 장식은 소년의 풍채와 고귀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만 송휘처럼 부드럽고 자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소년은 송휘보다 조금 더 서늘하고 고고한 시선을 지녔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년이 훨씬 더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소년은 턱을 괸 채 위라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느긋하게 위라의 궤적을 좇는 소년의 봉안(鳳眼)에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전청에는 그들 외에도 영국공 위장춘과 아들들이 앉아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위장춘이 상석에 앉지 않았다. 상석은 소년의 몫이었다. 아무래도 소년의 신분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신분을 모르는 위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위라는 곧장 가볍게 뛰어 위곤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위곤이 그녀를 품에 안으며 웃었다.
“아라야, 어서 인사 올리거라. 지난번에 널 구해 준 사람이 정왕야의 호위무사였더구나. 오늘은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정왕야를 모셨다.”
위라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조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신분이 높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위라도 정왕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숭정황제가 물러나면서 황위를 정왕의 동생 조장(趙璋)에게 물려주었는데, 정작 모든 권력은 정왕이 쥐게 되었다. 정왕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황제는 권력을 빼앗긴 채 대량(大梁) 최초의 꼭두각시 황제로 자리매김했다.
손쉽게 섭정왕이 된 정왕은 모든 대신들을 움직였고, 앞으로는 더 큰 권력을 쥐게 될 사람이었다. 다만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 있어, 위라에게는 음흉하고도 고집스러운 악역으로 기억에 남았다.
위라의 시선은 금빛 보상화문(寶相華文, 불교에 등장하는 가상의 식물을 새긴 무늬)이 수놓인 정왕의 오른쪽 소매에서 멈췄다. 별안간 소맷자락이 흘러내리더니 진한 잇자국이 드러났다. 분명 며칠이 지났건만, 그녀가 남긴 잇자국은 흐릿해지긴커녕 더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위라를 스쳐 갔다. 지금 저 잇자국을 일부러 보여 주고 있는 건가? 설마, 그 일로 자신과 결판을 내러 왔단 말인가?
그리 터무니없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때 위라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깨물었다. 그의 호위무사는 위라를 잡아가려고 했고, 이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눈물로 호소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가 남아나지 않을 뻔했다. 게다가 위라가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원한은 반드시 갚는 정왕이 그녀를 순순히 용서해 줄 리 없었다.
위라는 위곤의 품에 폭 안긴 채 곰곰이 생각했다. 환생하자마자 죽는 것도 싫었지만 권력자의 미움을 사 척을 지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경우의 상황을 다 따져 보았다.
지금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한번 미운털이 박혔으니, 당장 사죄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두다가 그의 전략을 역이용하면 활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생각을 마친 위라는 고개를 들었다. 반짝거리는 큰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이 더없이 천진난만했다.
“감사합니다, 정왕 오라버니.”
조개는 왕야였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를, 위라는 스스럼없이 불렀다. 지금 그녀의 위치에선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더더욱 불가했다. 그만한 친분이 있어야 가능한 호칭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린 나이와 앳된 목소리 때문일까, 다들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오라버니라 부르는 모습을 귀여워하는 듯했다.
조개는 위라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입꼬리가 아무도 모르게 슬쩍 올라갔다.
지금도 그는 위라의 사나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깨문 것도 모자라 마차에 올라타 맛없다고 하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그가 성경성 거리에서 파는 팔보압(八寶鴨, 오리 몸통에 온갖 재료를 넣어 봉해서 통째로 익힌 후 먹는 요리)이나 호로계도 아니고. 그날의 위라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한데 지금의 차분하고 얌전한 위라에게는 그날의 모습이 조금도 겹쳐지지 않았다. 어른들 앞이라는 건가. 조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듯 상아 접선을 만지작거렸다.
조개의 빈 찻잔을 알아차린 영국공이 시녀를 시켜 새 잔을 채웠다. 이윽고 그가 위라에게 직접 차를 가져가라 일렀다.
“이건 올봄에 새로 수확한 아미설아(峨眉雪芽, 아미산의 눈이 다 녹지 않았을 무렵 수확한 찻잎)입니다. 일반적인 차보다 훨씬 향기롭지요. 반 근이나 남았으니, 왕야께서 마음에 드시면 전부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조개도 거절하지 않고 위라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시녀가 수묵화가 그려진 작은 찻잔을 위라의 앞으로 가져왔다. 위라는 위곤의 품에서 내려와 찻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조개에게 다가갔다. 잠시 쭈뼛대던 그녀가 이윽고 팔을 뻗었다.
“오라버니, 차 드세요.”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아이만의 앳된 목소리에 끝소리를 끄는 습관이 더해지니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귓가에 다가왔다.
조개는 찻잔을 받는 대신 관모의의 구름 문양 팔걸이를 잡고 위라를 응시했다. 희고 부드러운 얼굴에서 동그란 눈은 새벽별이 떠오른 듯 반짝이고, 풍성하고 긴 속눈썹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서역에서 들여온 도자기 인형이 떠오르는 외모였다.
조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세게 물리지만 않았다면, 이 사랑스러운 외모에 푹 빠졌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요상한 아이였다. 그리 고약한 면모가 있는데도, 지금 이렇게 앙증맞게 굴지 않는가.
그가 묵묵히 쳐다보기만 하자, 위라는 다시금 끝소리를 길게 빼며 입술을 달싹였다.
“오라버니…….”
그제야 조개는 미소를 띤 채 찻잔을 받아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조개가 말을 하려는데, 위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라야, 이분은 정왕야(靖王爺)시다. 오라버니가 아니야.”
친분은 없다지만 세세히 파고들자면 위라는 조개를 오라버니라 부를 자격이 있었다. 조개는 진 황후(陳皇后)의 소생이었고, 후궁에서 황후 다음가는 이는 영 귀비였다. 영 귀비의 종친이 충의백부고, 충의백부는 두 씨의 친정이니 복잡하긴 해도 아주 관계가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위곤은 사소한 격식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기에 주의를 주었을 뿐이다.
위라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술을 모으고는 호칭을 바꿨다.
“정왕… 오라버니.”
그러나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안 고쳐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