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82
제182화
태액지 근처.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었다. 연못 근처의 버드나무가 새로 가지를 무성하게 뻗어 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옆에 있는 화원의 월계와 장미도 모두 피었다.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들의 색이 아름다웠다. 상쾌한 바람에 갖가지 꽃들의 향기가 실려 왔다.
영 귀비와 몇몇 비빈들은 팔각정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화목하고 즐거운 풍경이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일찍이 영 귀비가 총애를 받았을 때에도 아랫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긴 하지만, 어쨌든 ‘귀비’의 신분이었고, 처세에도 능해서 후궁 비빈들과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한참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그때, 누가 와서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정말 살구나무 아래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진 황후는 국화 문양의 장식이 된 단오에 금사로 구름과 용, 파도의 문양이 수놓인 붉은 치마를 입었다. 여유롭고 당당한 아름다움이었다. 진 황후의 곁에 있는 사람은 정왕비였다.
그녀는 나비와 꽃문양이 수놓인 살구색 웃옷을 입었다. 구슬을 꿴 영락 팔보 문양이 수놓인 치마가 그녀의 발걸음에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아름답고 정교한 붉은 비단 꽃신이 보였다. 신발의 코에는 반짝이는 진주 한 알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녀의 고상함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정왕비는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을 모아 만든 여인 같았다.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지만, 각자의 개성을 침범하지 않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진 황후가 다가가자 정자 안에 있던 비빈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그녀가 손을 저어 다들 일어나라고 했다.
“어찌 모두 여기에 모여들 있군그래.”
진 황후가 물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영 귀비께서 오늘 날씨가 좋아 저희를 이곳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진 황후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영 귀비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굳은 의지를 담은 듯 흔들림이 없었다.
영 귀비가 입술을 오므려 미소 지으며 물었다.
“천기 공주가 보이지 않는군요. 요즘 거의 밖엘 나오지 않는 것 같던데요. 마마께서 밖에 나와 좀 걸으라고 말씀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태의도 햇볕을 많이 쫴야 몸에 좋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진 황후는 담담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요즘 유리는 몸이 안 좋아서, 처소에서 푹 쉬라고 했네.”
영 귀비는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금사로 장식된 검푸른 옷을 입은 귀인이 말했다.
“육공주마마께선 아직도 차도가 없으신 겁니까? 얼마 전 제가 뵈었을 땐 그래도 건강해 보이셨는데.”
진 황후가 태연하게 말했다.
“유리의 명이 그런 걸 어쩌겠나. 어릴 때 독을 먹었으니, 지금 목숨이나마 건사한 게 다행이지.”
그 말에 적잖은 사람들이 맞장구쳤다. 그 귀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숙비는 정말 독한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처형하셨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했을지 모르지요.”
옆에 선 영 귀비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 참 묘한 일 아닌가.”
진 황후가 그녀들의 말을 자르더니 영 귀비를 올곧게 응시했다.
“유리가 먹었던 독의 이름은 ‘규영(奎寧)’일세. 기나나무에서 얻은 것이지. 운남(雲南)의 대리(大理)에서만 자란다던데. 듣자 하니 영 귀비의 고향이 운남이라지? 이런 독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영 귀비의 안색이 희미하게 변했다.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허리를 굽혀 말했다.
“마마, 잊으셨나 봅니다. 저는 열다섯 살에 입궁한 후로 벌써 이십 년이 흘렀습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지요.”
그 말에도 진 황후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미묘한 표정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은 서서히 얼어붙었다.
“그런가. 자네의 기억력이 이렇게 안 좋을 줄은 몰랐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다른 세 명의 비빈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한쪽에 얌전히 서서 둘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이성을 완전히 잃지 않은 진 황후는 이 자리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영 귀비를 냉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난 이만 가 보겠네. 천천히 얘기들 하다 가게나.”
“살펴 가십시오.”
영 귀비는 진 황후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소매 속에 감춘 손은 으스러지도록 쥐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고, 이도 악물었다. 옆에서 누가 부른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난 몸이 좀 안 좋아서 말일세. 자네들과 꽃을 보긴 힘들 것 같네. 난 먼저 가서 좀 쉴 테니 천천히 놀다 가게나.”
세 명의 비빈은 영 귀비가 진 황후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져 가려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황후와 영 귀비 사이의 불화가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그녀들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며 영 귀비를 배웅했다.
진 황후와 위라는 태액지 주변을 반 바퀴 돌았다. 그러다 바람이 점차 불자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봄이 되었다고는 해도 바람에는 아직 싸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특히 꽃샘추위가 찾아온 요 며칠은 자칫하다간 감기에 걸리기 쉬웠다.
그게 바로 조유리였다. 새해맞이를 하던 며칠 동안 바람을 너무 많이 쐰 데다 피로가 누적되어 일주일을 앓아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진 황후는 태의서(太醫署)의 태의들을 차례로 불러 조유리를 진찰하게 했다. 태의들은 모두 공주의 몸에는 이상이 없으며, 진즉에 나았어야 했지만 마음이 울적하고 기가 허해서 지금까지 낫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의 병에는 진 황후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위라에게 그녀를 좀 달래 보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마음의 병이 있어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명을 받은 위라는 진화전으로 갔다. 공주가 난각에 있다는 궁녀의 말에 그녀는 곧장 난각으로 향했다.
조유리가 창가의 미인탑에 반쯤 누워 있었다. 파랑새 문양이 수놓인 자줏빛 담요를 덮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반쯤 어깨로 내려왔다. 창백한 얼굴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난 병인 데다, 쓸쓸한 표정까지 짓고 있으니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절로 아렸다.
“뭐 보고 있어?”
위라가 옆에 있는 자단목 수돈에 앉았다.
조유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핼쑥했다. 촉촉한 눈망울이 더 커 보였다. 그녀는 위라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라였구나.”
위라가 웃었다.
“그럼 누구겠어? 모후께서 네가 걱정된다고, 나더러 가 보라고 하셨어.”
위라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토끼 나무 인형에 고정되었다.
“좀 괜찮아? 이건 뭐야? 나 좀 봐도 돼?”
조유리는 손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양진 오라버니가 직접 깎아서 만들어 준 거야.”
위라가 손을 거뒀다. 그렇게 넋을 잃고 있더니, 또 양진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순진한 아가씨는 정말 일편단심이었다. 한번 마음을 주더니, 무슨 일이 있어도 거두지 않을 모양이었다. 위라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한테 양진의 소식을 알아다 달라고 부탁했어. 알고 싶지 않아?”
조유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외적과 두 번의 전쟁을 치렀고, 공적을 두 번 세워서 지금은 참장(參將)의 자리에 올랐대. 얼마 후면 돌아올 것 같다던데.”
위라가 소매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조유리에게 건넸다.
“이건 양진이 쓴 편지야. 바깥의 물건은 궁에 들어올 수 없는데, 배짱도 좋지. 이걸 건네주라고 정왕 오라버니한테 부탁하다니.”
농을 섞어 던진 말에도 조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를 받자마자 급히 펼쳐 읽었다.
편지는 짧은 몇 문장뿐이었다. 양진은 아는 글자는 많지 않았고, 조유리가 가르쳐 준 게 전부였다. 어릴 때 조유리는 상서방에서 돌아오면 그를 방으로 불러 몰래 글자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 그가 아는 글자들을 모두 모아 써 내려갔을 편지를 보며, 조유리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져 금세 편지를 적셨다.
위라는 깜짝 놀랐다.
“왜 그래?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길래?”
조유리가 눈물을 닦으며 콧소리로 말했다.
“양진 오라버니가 다쳤대.”
위라가 물었다.
“심각하대?”
조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긴 없어.”
양진은 적이 쏜 화살에 가슴을 맞았으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쳤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라는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요즘 진 황후는 점점 그녀를 독촉하고 있었다. 그녀는 온갖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양진이 정말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 *
영 귀비의 침전.
홍옥 매괴의에 앉은 영 귀비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양 어멈이 부드럽게 다독였다.
“마마, 화내실 것도 없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마마를 자극하시는 건 폐하의 사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지요. 그거야말로 폐하께서 마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보여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화부터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폐하께서 오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화는 잠시 잊으시고, 폐하를 잘 보필하시는 게 먼저지요.”
그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폐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데, 무엇을 걱정하신단 말입니까?”
영 귀비가 팔걸이를 꽉 붙잡고 있긴 했지만, 그렇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 진 황후가 갑자기 그때의 일을 언급한 것이 불안할 따름이었다. 진 황후가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그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됐다. 가서 차 좀 가져오너라. 목이 마르구나.”
양 어멈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물러갔다.
얼마 후,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팔선 탁자에 차 한 잔이 놓였다. 영 귀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난초와 바위가 그려진 담황색 법랑 잔을 집어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뱉었다.
“어찌 이리 식은 게냐?”
나이 든 목소리가 말했다.
“노여워 마십시오. 다시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때, 영 귀비는 귓가를 스치는 위화감에 뒤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왜 그러느냐? 아까와 좀 다른 것 같은…….”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가의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백발이 성성한 부인이 서 있었다. 양 어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