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83
제183화
영 귀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하여 물었다.
“누구냐? 어째서 여기 있는 게야?”
그녀가 소리쳐 사람을 부르려는 찰나, 부인이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들고 물었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십오 년 전 마마를 모시던 청비입니다.”
청비, 청비는 영 귀비와 함께 입궁한 시녀이었다……. 기어이 떠오른 이름에 영 귀비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경악이라는 단어로는 그녀의 감정을 설명하기 부족하리라. 그녀가 매괴의의 팔걸이를 꽉 부여잡으며 물었다.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느냐? 출궁한 게 아니더냐?”
청비는 당시의 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영 귀비는 그녀를 곁에 두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차마 죽일 수는 없어 그녀를 내보내고 먼 곳으로 시집가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십오 년이 지난 지금 홀연히 나타나다니!
청비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마마께선 모르시겠지요. 그동안 궁 밖에 있었지만, 도저히 양심의 가책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황후마마와 천기 공주마마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영 귀비가 갑자기 매괴의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게냐? 누가 널 궁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야?”
사납게 소리치는 영 귀비의 머릿속에 진 황후의 모습이 스쳤다. 어쩐지, 오늘 심상치 않은 말을 하더라니.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황후가 널 매수한 것이냐? 나에게 이런 얘길 하라고 시키든?”
청비가 고개를 저었다.
“황후마마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마마를 뵙고 싶었을 뿐……. 그때 어린 공주마마를 해한 대가로, 지금은 제 손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늘이 제 잘못을 벌하는 것이겠지요.
마마, 간청드립니다. 저 대신 부처님께 말씀 좀 드려 주십시오. 마마께서 제게 지시한 것이고, 저는 그저 명에 따랐을 뿐이라고, 제 가엾은 어린 손자를 살려 달라고 말입니다.”
영 귀비는 화가 나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당장 궁에서 나가거라! 그러지 않으면 옛정 따위는 봐주지 않을 게다.”
청비는 가족의 목숨이 조개의 손에 달려 있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가족들만 무사히 살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그녀는 영 귀비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도 아이가 있으시니, 어미 된 여인의 어려움을 잘 아시겠지요. 설마 그동안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영 귀비가 그녀를 걷어차며 분노했다.
“여봐라, 당장 이 미친년을 끌어내라!”
청비는 영 귀비의 치마를 꽉 붙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마마, 제발 한 번만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다……. 매일 후회 속에 살고 있어요. 그때 왜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공주마마를 해하려 하셨는지, 마마, 부처님의 벌이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아직까지 바깥에선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청비를 잡으러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궁 안에 영 귀비와 청비만이 남았다는 듯이.
그러나 머리끝까지 화가 난 영 귀비는 이 점을 생각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청비의 말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급기야 그녀는 청비의 턱을 틀어잡고 말했다.
“내가 왜 무서워해야 하지? 난 한 번도 부처를 믿은 적이 없다. 독을 먹인 건 먹인 거고, 조유리가 여태 살 수 있었던 건 제 복이겠지. 부처가 날 벌하려 했다면 진즉에 하지 않고 왜 여태까지 미뤄 두었단 말이냐?”
청비는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궁전 안은 고요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그제야, 영 귀비는 선득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정도로 큰 소리가 나면 궁녀나 호위 무사들이 들어오기 마련이건만, 그녀가 몇 번을 불렀음에도 사방이 조용했다. 차를 내오겠다던 양 어멈은 왜 아직도 보이지 않는가?
괜스레 심장이 조여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영 귀비를 뒤덮고 있었다.
“부처님이 벌하지 못한다면, 짐이 벌하는 건 어떤가?”
마침내, 분노에 찬 차가운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렸다.
영 귀비가 고개를 돌렸다. 두 마리의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문양의 검푸른 평상복을 입은 숭정황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순간, 영 귀비의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숭정황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황망하기만 했다.
황제가 전 안으로 들어왔다. 뒤에는 붉은색 예살을 입은 궁인 둘이 따라왔다.
그제야 영 귀비는 양 어멈의 말을 떠올렸다. 황제가 오늘 처소에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왜 이렇게 빨리 온 걸까? 평소에 비해 반 시진은 빨리 온 것 같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폐하…….”
황제는 그녀가 아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청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방금 그 말이 사실이냐?”
청비가 황공하다는 듯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제가 비명횡사를 당해도 쌀 것입니다…….”
“닥쳐라!”
영 귀비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녀가 황제를 향해 다급히 내뱉었다.
“폐하, 이 정신 나간 여자의 말은 절대 믿지 마십시오. 저는 이 여자와 모르는 사이입니다. 어떻게 궁 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고요. 필시 누군가 절 해하려고…….”
숭정황제의 시선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의 말참견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짐은 네게 물은 적이 없다.”
순간, 영 귀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의 일을 말해 보거라.”
뒷짐을 지고 선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유리가 어쩌다 독을 먹게 되었는지 말이다.”
청비는 그때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공주마마의 돌잔치였습니다. 저는 마마의 명을 받아…….”
조유리의 돌잔치 당일, 그녀는 유모의 품에 안겨 난각에서 젖을 먹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당시 숙비는 호기심이 일어 어린 공주를 보러 가고 싶었다. 진 황후는 어멈에게 숙비와 함께 가도록 일렀다.
숙비가 공주를 보고 떠난 후, 청비가 난각에 도착했다. 다른 두 명의 궁녀가 난각의 궁녀들을 따돌렸다. 청비는 조유리의 작은 입을 비틀어 연 다음, 규영을 조유리의 혀에 발랐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아기는 심하게 울었다. 작고도 가녀린 울음소리는 아픈 새끼 고양이처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청비는 모진 마음을 먹고 모든 일을 끝낸 후 조용히 난각을 빠져나갔다.
그 후 조유리에게 일이 터졌고, 모든 죄는 자연스럽게 숙비의 잘못으로 귀결되었다. 그때 난각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숙비는 완강히 부인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저 변명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어린 딸을 잃을 뻔한 숭정황제도 마찬가지였고, 그녀에게 독주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청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 후 평생을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육공주마마께 면목이 없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지만, 황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손등의 핏줄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불거졌다. 그는 눈을 내리감더니, 힘주어 말했다.
“영 귀비,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영 귀비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가 애처롭게 말했다.
“폐하, 이 여자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신첩은 이 여자를 모릅니다. 한데도 왜 신첩을 모함하려 하는지…….”
황제가 비로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른다고?”
영 귀비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황제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가 소매를 휘저었다.
“그렇다면 짐이 상궁국(尙宮局)의 궁녀를 불러 물어야겠다. 이 사람이 궁에 있었던 사람인지 말이다!”
잠시 후, 상궁국의 궁녀가 달려왔다. 손에는 모든 궁인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가 들려 있었다. 궁녀는 황제의 의도를 알고 얼른 명부를 훑더니 아뢰었다.
“폐하, 원가 십 년에 영 귀비마마께서 세 명의 궁인을 내보내셨습니다. 청비가 그중 하나입니다. 청비의 손바닥에 점이 하나 있으니,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청비를 내려다보더니 준엄하게 말했다.
“두 손을 펴 보거라.”
청비가 두 손을 펼쳤다. 왼손 손바닥에 점이 하나 있었다. 촛불에 비친 점은 드러난 진실만큼 또렷했다.
영 귀비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제, 영 귀비를 향한 황제의 시선에는 실망과 냉혹함만이 담겨 있었다. 황제는 문득 진 황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두 사람이 서먹한 관계가 되기 전, 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때 진 황후는 조유리가 독을 먹은 일을 다시 조사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녀는 진상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처음으로 그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며 매달렸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녀는 모든 희망을 그에게 건 듯 필사적이고,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떠했는가. 조사는커녕 그녀가 예민하다며 나무랐다. 당시 진 황후의 친정은 나날이 권세를 늘리고 있었고, 그의 마음에는 경계심만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진 황후를 대하는 태도도 냉랭해졌고, 영 귀비의 친정에 힘을 실어 주려 했다. 매일 밤 영 귀비의 침소를 찾기까지 했으니, 그가 누구의 손을 들어 주었는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그 후, 진 황후는 다시는 이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봐라.”
밖에서 두 명의 궁인이 들어왔다.
“폐하를 뵈옵니다.”
“오늘부터 영 씨 귀비의 봉호를 박탈하고 서인으로 강등한다. 일단은 염금전(捻金殿)에 가두어라.”
황제의 명에, 영 씨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폐하!”
염금전. 이름과는 달리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있어 음산하기 짝이 없는 궁이었다. 궁에는 딱히 냉궁(冷宮)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없었지만, 이 궁전만큼은 냉궁이라 불러도 좋을 터였다. 그동안 죄를 지었거나 총애를 잃은 비빈은 예외 없이 모두 그곳으로 보내졌다.
영 씨가 다가가 황제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그는 매정하게 그녀를 뿌리쳤다. 영 씨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신첩, 오로지 폐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폐하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신첩이 무슨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던가? 말이란 참으로 기억 속에서 흩어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물론 짐은 너를 용서할 수도 있고, 폐할 수도 있다. 한데, 짐의 공주를 독살하려 들고 감히 용서를 바랐더냐?”
궁인들이 양쪽에서 영 씨의 어깨를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높디높은 귀비의 신분에서 서인으로 추락하는 이 순간을, 그녀가 상상이나 했을까?
황제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 그의 준엄한 음성이 청비를 향했다.
“이자를 종인부(宗人府)에 끌고 가 능지처참에 처해라!”
청비는 새하얗게 질린 채 궁인들에게 끌려갔다.
이제 전 안에는 황제만이 남았다. 시중을 드는 궁인들은 모두 밖에서 일렬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어쩌면 이 자리의 모두를 처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황제는 어느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었고, 전 안에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저(儲) 태감이 물었다.
“폐하, 어디로 가시는지요?”
황제가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만에 대답했다.
“소양전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