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위라는 양옥용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자갈이 깔린 좁은 길을 따라가자 정말 빨간 홍초화(紅蕉花) 아래 하얀 새끼 고양이가 두세 마리 있었다.
태어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듯 자그마한 고양이들은 새파란 풀잎 위에 누워 있었다. 주변엔 궁녀도 없었고, 돌봐 주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양옥용이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아라야, 고양이 너무 예쁘다. 반점도 하나 없이 너무 하얘. 너도 빨리 와서 봐.”
위라는 온몸이 털로 뒤덮인 작은 동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양옥용을 따라 나온 건 순전히 안에 있는 게 따분해서였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고양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예쁘긴 했다. 눈은 감청색이었고, 온몸이 눈처럼 하얬다. 자기를 보고 있는 줄 안다는 듯, 고양이들도 그녀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금세 빠져 버릴 듯한 순진한 눈빛을 보고 있으려니, 위라도 처음으로 고양이게 흥미가 생겼다. 한 마리의 귀를 만지려 손을 뻗는 순간, 고양이가 앞발을 뻗더니 그녀의 팔을 잡고 풀쩍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그녀는 화들짝 놀라 홱 일어나며 고양이를 떼어 내려 했다.
위라는 깜짝 그때, 위라의 머릿속에서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궁 안에 있는 데다 희귀한 품종의 고양이라면, 주인이 없을 리가 없었다. 만약 어느 빈첩 혹은 공주의 고양이이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다치게 했다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뻔했다.
하는 수 없이, 위라는 뻣뻣하게 굳은 채 고양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마치 어미를 찾은 듯이 그녀에게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혀를 날름거리더니 그녀의 손등을 핥는 게 아닌가. …난 맛있는 게 아니야! 위라는 속으로 외치며 양옥용을 돌아보았다.
“얘 좀 내려 줘…….”
팔에 닭살이 돋았다. 털이 긴 동물에게 도저히 정이 가질 않았다.
양옥용은 그녀를 보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도와주기는커녕 구경하는 모양새였다. 위라는 상홍을 찾았지만, 그는 내려오자마자 위곤의 곁에 있던 사람이 불러서 가고 없었다. 그 와중에 고양이가 또 핥아 대니, 고립무원이 따로 없었다.
양옥용은 위라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보자 웃음기를 거두고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다. 양옥용이 손을 뻗는 순간, 앞쪽에서 낭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흰 누구야? 왜 여기 있는 거지?”
양옥용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금장화(金妝花) 무늬의 앵두 색 유군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홍초화 뒤에 선 소녀는 열서너 살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위라와 고양이를 번갈아 보았다. 비록 인상을 쓰고 있다지만 새카만 머리카락과 뽀얀 피부, 빛나는 눈동자와 하얀 이는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녀가 고양이 주인인 줄 알았는지, 양옥용이 쭈뼛거렸다. 소녀가 다가오더니 위라의 팔에서 고양이를 떼 내고 말했다.
“너희가 만져도 되는 고양이가 아니야.”
이윽고 소녀가 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오라버니, 어떻게 고양이를 이런 곳에서 키워? 그래도 내가 준 건데, 신경 좀 써 주면 덧나?”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조개가 서 있었다. 그는 금사로 사합여의운(四合如意雲) 문양이 수놓인 하늘색 금포를 입은 꼿꼿한 자세로 서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소녀가 아니라, 얼굴을 찡그린 위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위라에게 다가간 조개가 허리를 굽혔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한 손에 다 잡혔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매만지며 물었다.
“어디 보자, 고양이 발톱에 긁히진 않았느냐?”
위라의 손등은 어떤 상처도 없이 매끈했다. 다만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침 자국이 선명했다.
그 고양이는 위라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다만,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너무 갑작스럽게 표현하는 바람에 위라를 놀라게 했으니 호감을 바라긴 틀린 건지도 몰랐다. 조개는 문득 조금 전의 위라를 떠올리고 실소했다. 뻣뻣하게 굳은 몸, 적군을 앞에 둔 장수처럼 비장한 얼굴. 천하에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더니, 고작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위라는 손을 빼고 입술을 오므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조개의 눈에 웃음이 담겼다. 그가 검지로 위라의 빨개진 눈시울을 닦아 주었다.
“그럼 왜 울었지?”
위라에게 내려앉은 조개의 목소리는 한없이 근사했지만, 애석하게도 위라는 우는 게 아니었다. 다급할 때면 금세 눈이 충혈되는 탓이었다. 그녀는 조개가 어째서 여기에 나타났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고양이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 신안루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안 울었습니다.”
조개는 말없이 그녀의 앞니를 바라봤다. 눈빛이 미묘한 조롱을 담고 있었다. 위라는 얼른 입을 가리고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췌재에서처럼 그가 또 코를 잡고 입을 벌리게 할까 봐 겁이 났다.
조개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위라는 말할 때마다 이 하나가 빠진 민둥민둥한 잇몸이 보였다. 발음도 분명치 않았다. ‘울었습니다.’라고 할 때도 바람이 샜는데, 조개에겐 참으로 사랑스러운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데 그녀는 그가 웃기만 하면 정색을 하는 듯했다. 조개의 두 눈엔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점잖은 척하려 애썼다. 그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라라고 했나? 고양이가 무서우냐?”
위라는 그를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그가 또 물으려는데, 옆에 있던 소녀가 궁금하다는 듯 나섰다.
“오라버니, 얘는 누군데?”
조개가 열 살 아래의 아이들에게 참을성이 없다는 건 그의 주변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 여자아이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직접 눈물까지 닦아 주는 진귀한 광경을 보여 주었다. 소녀의 시선이 위라를 면밀하게 살폈다. 다른 여자아이에 비해 예쁘고 앙증맞은 외모였다. 설마 이 때문이란 말인가?
소녀는 진국공부인의 큰딸, 고단양이었다. 조개보다 한 살 어렸는데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하고 함께 자란 사촌 남매지간이라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가까웠다.
조금 전 조개가 진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소양전(昭陽殿)으로 갔을 때, 고단양도 거기에 있었다. 진 황후는 두 사람을 함께 보냈고, 조개는 진 황후의 체면을 생각해 고단양과 함께 나오는 길이었다. 그렇게 걷던 와중에 고양이와 씨름하는 위라를 발견한 것이었다.
조개가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영국공의 넷째 손녀, 위라.”
조개의 시선이 위라를 스쳤다.
“내 말이 맞느냐?”
위라는 양옥용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저희는 정왕 오라버니의 고양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먹을 걸 좀 주려던 건데, 정왕 오라버니와 언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위라가 말하며 몸을 돌렸다.
조개가 그녀를 불러 세우더니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 한 마리일 뿐인데, 뭐.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다.”
옆에서 고단양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위라가 고개를 젓더니 촉촉하고 큰 눈망울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언니가 오라버니께 드린 거라고 하니, 아라가 가질 수는 없지요.”
위라가 떠난 후, 조개도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눈에 어려 있던 미소는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가 고단양을 바라보았다.
“여긴 신안루와 가까우니 데려다줄 필요 없지? 혼자 가.”
고단양은 고양이를 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가려고 하자 얼른 ‘오라버니’ 하고 그를 불렀다. 신경이 쓰였던지, 고단양이 조개에게 다가왔다.
“고양이 별로 안 좋아하나? 그럼 얘기해. 당장 데려갈 테니까. 아니면 유리한테 주든가. 고양이가 갖고 싶다고 한참을 얘기하던데.”
그녀가 말한 유리는 조개의 여동생, 천기 공주 조유리(趙琉璃)였다. 공주는 올해 일곱 살로, 한창 개나 고양이를 좋아할 때였다. 특히 이 고양이 세 마리를 얼마나 눈독 들였는지, 볼 때마다 손에서 놓질 않았다. 아쉽게도 고단양이 고양이들을 조개에게 줘 버렸고, 공주는 조개에게 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오전 수업이 끝나면 와서 쓰다듬기만 했던 것이다.
고양이들은 파사(波斯,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품종으로, 눈이 푸르고 털이 새하얬으며 크기가 작았다. 태어난 지 석 달이 된 고양이들의 앙증맞은 모습은 공주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터였다.
반면 조개는 고양이들에게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할 일이 워낙 많아 자기 자신을 돌볼 틈도 없는데, 고양이를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고양이를 궁 안에 둔 채 전혀 돌보지 않았다. 대신 궁녀들이 돌아가며 먹이를 챙겨 주었다. 정왕의 고양이인 만큼 홀대할 수 없던 것이다. 고양이 세 마리는 이렇게 몇 달을 보내면서 잘 자랄 수 있었다.
고단양의 단호한 말투에 조개가 잠시 말을 골랐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고단양이 뜸을 들이며 고양이의 귀를 어루만졌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축 처져 있었다.
“오라버니가 조금 전에 그 여자애한테 고양이 가져가라고 했잖아…….”
조개는 실소를 흘렸지만, 반박하진 못했다. 위라에게 고양이를 주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 고양이들은 위라와 매우 닮지 않았는가? 작고, 하얗고, 애교스럽다가도 도도한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이 반감이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아쉽게도 위라가 받으려 하질 않으니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지만.
조개가 생각 끝에 말했다.
“그럼 유리한테 줘, 아주 좋아할 테니. 내가 돌볼 시간이 없어.”
이윽고 그는 임강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멀어지는 조개의 뒷모습에 고단양의 시선이 오래도록 꽂혔다. 고단양은 분풀이를 하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거만하고 고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속상한 소녀의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뒤에서 연분홍빛 유군을 입은 시녀가 말했다.
“정왕야께선 너무 무심하십니다. 아가씨께서 드린 고양이를 어찌 다른 사람한테 주겠다고 하시는지…….”
고단양은 속으로는 시녀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불쾌한 척 쏘아보았다.
“오라버니가 어디 네가 맘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 입 다물어.”
시녀가 웃었다. 그녀는 고단양이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말이 많았습니다. 용서하세요……. 제가 다 서러워서 그러지요. 몇 년 동안 아가씨께서 보인 호의를 정왕야께선 모르고 계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고단양은 말이 없었지만, 안색이 굳어 있었다. 그동안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듯했다.
조개는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개의 차가운 모습이 그의 천성이라 생각했건만, 오늘 보니 전혀 아니었다. 조개도 자상하게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었을 뿐. 고단양은 분홍빛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걸으면서 말했다.
“가서 좀 알아봐. 영국공의 넷째 손녀와 오라버니가 무슨 사이인지. 내가 지시한 걸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돼.”
시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알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후 소리 없이 고단양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