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28
제28화
조그마한 입술은 꾹 다물리더니, 추 마마가 무슨 말을 해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추 마마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약을 안 먹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조금 전에 갑자기 심각한 증상이 나타난 것도 약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버티다간 무슨 후환이 닥칠지 몰랐다.
공주의 숨이 붙어 있는 것도 약 덕분인데, 이제 와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뜻인가? 지금까지 진 황후가 그녀에게 쏟은 정성과 노고를 떠올리자, 추 마마의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마마, 제발 약 좀 드세요……. 약을 안 드시면 황후마마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입이 닳도록 애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자신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유리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안 먹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추 마마가 약을 그녀의 입에 가져갔지만, 그녀가 휘두른 손에 숟가락만 깨졌다. 조유리의 눈도 붉게 물들었다.
“안 먹어. 다른 사람은 다 안 먹는데, 나만 먹어야 해? 나도 쟤네랑 똑같이… 연도 날리고 싶고 제기도 차고 싶어. 매일 약만 먹기 싫단 말이야……. 너무 쓰다고…….”
말을 하던 그녀는 솟구치는 서러움에 점점 맹렬히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던 끝에 결국은 숨을 헐떡거리며 추 마마의 품에 안겼다. 추 마마는 그녀를 감싸며 아린 가슴을 달래야 했다. 독약을 탄 흉악범을 아무리 욕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공주마마…….”
슬픔이 두 사람을 덧그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고명부인들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진 황후가 천기 공주를 애지중지한다는 건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이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누군가는 약을 먹어야 낫는다며 조유리를 달랬고, 누군가는 힘이 빠지니 울지 말라며 달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번 서러워진 마음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밝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홀린 듯이 각루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수양버들 아래서 한 여자아이가 건자를 차고 있었고, 그 옆에서 다른 여자아이가 개수를 세고 있었다. 건자를 차는 여자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얇은 비단으로 만든 앵두 색 치마가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깜찍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지만, 명부들은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다지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린 공주가 서럽게 울고 있는데 위로는 못할망정 건자를 차다니, 명부들은 속으로 여자아이의 무례함을 흉보았다.
그러나 건자를 차는 여자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제비처럼 가볍게 몸을 놀리는 아이는 꼭 묘기를 부리는 듯했다. 한 번 차올렸다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건자를 빨간 꽃신을 신은 발로 띄워 올렸다. 아이는 허공으로 떠오르는 건자의 궤적을 여유롭게 지켜보더니, 날개라도 달린 듯 뛰어올라 자세로 건자를 받아 냈다…….
동작이 하나같이 민첩한 데다 깔끔하니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덧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만 쳐다봤다. 우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천기 공주마저 어느샌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의 틀어 올린 머리에 묶인 비단이 나풀거리면, 비단의 끝에서 네 개의 금 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동시에 청명한 울림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방울 소리와 함께, 백 개를 채우자 위라는 동작을 멈췄다. 이렇게 건자를 많이 찬 건 오랜만이라 두 다리가 저릿해 왔다. 전생의 그녀는 백씨 부부와 살면서 심심할 때마다 이웃집 여자아이와 함께 건자를 찼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많이 찼고, 제일 많을 때는 삼백 개도 찰 수 있었다.
전생의 그녀는 상상이나 했을까. 건자를 차서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를 웃게 만드는 날이 올 줄은.
위라는 집어 들고 팔보유리탑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한참 몸을 움직여 발갛게 생기가 도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조유리를 바라보았다.
“공주마마, 저 건자 잘 차죠?”
넋을 잃고 보던 조유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병아리가 쌀을 쪼는 듯 맹렬한 모양새였다.
“응!”
그냥 잘 차는 게 아니라, 기가 막히게 잘 찼다! 조유리는 그녀만큼 잘 차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새 조유리의 눈에는 존경의 빛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위라가 입을 오므리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배워 보고 싶어요?”
조유리가 다시금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응!”
대답을 하고 난 그녀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가르쳐 줄 수 있어?”
“그럼요.”
위라의 콧등에는 반짝이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땀을 흘리면서도 맑게 웃는 얼굴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조유리가 기뻐하는 틈을 타 화제를 돌렸다.
“대신 건자를 차려면 몸이 건강해야 해요. 안 그러면 다칠 수 있거든요. 건자로 노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튼튼해지는 게 먼저예요. 마마께서 건강해지시면, 가르쳐 드릴게요.”
위라도 왜 이렇게까지 나섰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조유리가 너무나도 서럽게 울어서였을까. 어느새 조유리의 눈은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그녀가 위라의 소매를 붙잡으며 물었다.
“내가 튼튼해지면 조금 전에 했던 온갖 재주도 가르쳐 줄 거야?”
위라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그러더니 눈을 깜박이며 옻칠을 한 자단목 찻상에 놓인 약을 가리켰다.
“하지만 먼저 약부터 먹어야 해요.”
위라가 보인 재주에 홀딱 빠진 조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먹을게, 먹는다고. 너 말 바꾸면 안 돼.”
위라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자신이 말을 바꿀 일이 있을까. 어차피 조유리의 몸은 낫지 않을 터였다. 전생의 천기 공주는 병약한 몸으로 십수 년을 버텼지만, 결국 열여섯을 넘기지 못했다.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던 그 공주에게서, 위라는 자신을 겹쳐 보았다. 제대로 생을 살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똑같이 불쌍한 처지가 아닌가. 이번 생에서 약을 잘 챙겨 먹으면 몇 년은 더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옆에 있던 추 마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보였다. 위라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약이 식었습니다. 약을 다시 데워 오라고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유리는 알겠다고 말하며 궁녀가 약을 다시 데워 오길 기다렸다. 추 마마가 먹여 줄 필요도 없었다. 스스로 그릇을 받쳐 들고 고분고분하게 약을 다 마셨다.
신안루는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다. 사람들은 모두 위라에게 다양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위라는 지금이라도 넷째 백모를 찾으러 갈 생각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 진 씨가 다급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위라가 진 씨를 불렀다.
“백모님!”
고개를 돌린 진 씨가 그녀를 발견하곤 얼른 달려와 안아 들었다. 단순히 그녀를 찾아서 기쁜 태도가 아니었다. 진 씨는 어디 갔었느냐고 묻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며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아라야, 어서 가자. 상홍이와 여양왕(汝陽王) 세자(世子)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더구나. 세자가 상홍이를 밀어서 태액지에 빠뜨린 것 같다…….”
위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며, 어두운 빛이 퍼져 나갔다.
상홍은 남과 다툴 성격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일부러 시비를 걸면 모를까. 그 상대라는 여양왕 세자 이송李頌은 그녀로서는 잊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상홍이 실의에 빠져 살게 된 건 그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위쟁 모녀와 손잡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위라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쳐 갔다. 이때쯤이었다. 전생에서도 이즈음에 이송이 나타났었다.
둘이 왜 다퉜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감히 상홍을 물에 빠뜨리다니. 위라는 상홍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놈을 죽이고 또 죽여서 백 번을 채울 수도 있었다. 그녀는 진 씨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분홍빛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데, 뜻밖에도 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조금 전 위라가 건자를 차던 수양버들 아래에 조개가 서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 씨가 걸음을 재촉하니 그의 모습은 점점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그는 잠시 서 있는 듯하더니, 곧 느긋한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왔다.
진 씨와 위라가 태액지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떼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고관대신도 있었고, 명문 세가의 귀족도 있었고, 사람을 구하려 뛰어온 태감도 있었다…….
저 멀리, 물가에 누워 있는 사람이 위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서 위곤이 쪼그려 앉은 채 합곡혈(合谷穴)과 인중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위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진 씨의 품에서 내려와 짧은 다리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상홍아!”
초여름이라 물은 그리 차갑지 않다지만, 태액지는 수심이 깊었다. 깊이 가라앉았었다면 시간이 지체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너무 늦게 구한 거라면… 위라는 덜컥 겁이 났다. 더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상홍의 팔을 꼭 잡고 애타게 그를 불렀다.
“상홍아, 일어나…….”
위라는 두려웠다. 상홍이 이번에 죽지 않을 것을 알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었다. 환생하며 그녀의 상황이 여러 번 바뀌었듯이, 이번에도 무슨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그 속에서도 상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일이 생기고 말았다.
위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보상화문이 수놓인 감청색 옷을 입고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아이에게 닿았다.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잘생겼지만 눈빛이 사납고 고집스러웠다. 그는 입술을 오므린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위라의 사나운 시선과 마주치자 남자아이는 멈칫했지만, 이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고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그가 바로 여양왕 세자 이송이었다. 장성한 후와 외모가 많이 달랐지만 위라는 보자마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잊을 수 없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눈 아래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연분홍색의 제비 꼬리 모양이라 기억에 남았다.
그의 옆에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여양왕이 서 있었다. 여양왕은 정색을 하고 아들을 훈계하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황궁이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