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35
제35화
‘그날의 일을 내가 아직 갚지 못했단 말이다. 넌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송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조개와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체면을 짓밟았으니, 당연히 두 사람이 미울 수밖에.
조개를 괴롭힐 기회는 아직 잡지 못했지만, 마침 길에서 위라를 발견했으니 놓칠 수 없었다. 이송은 그녀가 들고 있던 면인을 내려다봤다. 그녀와 똑같은 모양새에, 이송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면인을 낚아채 내던졌다.
“못생긴 계집애 같으니라고. 안 비키겠다면, 어쩔 건데?”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면인은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더는 웃음 가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위라가 면인을 응시하더니,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혜련은 어느새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그 소녀가 정말 아대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이송이 길을 막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송 이놈은 전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재수 없긴 마찬가지야!’
이송은 여동생 이상과 외출한 참이었다. 이상은 시녀와 함께 어화루(御和樓)에 팔진(八珍, 고대의 간식)을 사러 가고, 그는 혼자 마차에 남았다.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가림막을 걷자마자 위라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너무 거슬렸다. 날 그렇게 처참하게 짓밟아 놓고, 지금 웃음이 나와? 이송은 참지 못하고 마차에서 내려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못생긴 계집애’라고 불렀다. 사실 그녀가 정말 못생긴 게 아니라, 앞니가 빠진 것 때문이었다. 그녀가 입을 벌리자마자 이가 빠진 자리가 보였다. 조금 우습긴 해도 절대 못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송도 얼떨결에 ‘못생긴 계집애’라는 말을 내뱉었지만, 위라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화를 더 돋우고 싶었다.
“뭘 쳐다봐, 내 말이 틀렸냐…….”
그 순간, 위라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조그마한 입술에서 “으앙”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눈물이 나는 모양이었다. 분명 사나운 표정이었건만, 순식간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금세 그녀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그녀의 옷섶까지 적셨다. 그녀는 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흐느끼며 누군가를 불렀다.
“오라버니… 송휘 오라버니……!”
이송은 얼떨떨했다. 별안간 왜 우는 거지?
잠시 후, 송휘가 사람들 사이로 나타났다. 그는 위라를 안아 들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며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아라야, 왜 울어? 누가 그랬어? 왜 갑자기 뛰어간 거야? 없어진 줄 알고 놀랐잖아.”
위라가 갑자기 뛰어갔을 때, 금루와 금옥만 그녀를 쫓아갈 수 있었다. 한발 늦어 버린 송휘와 상홍은 도저히 그녀를 찾지 못했다. 그녀가 대성통곡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녀를 찾지 못하고 있었을 터였다.
위라는 전에 없이 서럽게 울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고, 새카만 두 눈도 눈물로 반짝거려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났다. 그녀가 훌쩍거리며 이송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쟤가 오라버니가 준 면인을 바닥에 던졌어……. 그리고 나더러 못생긴 계집애라고 했어…….”
그녀는 송휘의 목을 감싸고 계속 훌쩍거렸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송휘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이송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갑자기 울어 버린 위라 때문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에 일그러진 면인이 떨어져 있었다.
행인들은 울음소리에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여덟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 중 누가 맞고 틀렸는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송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들의 눈빛은 왜 약자를 괴롭히냐는 듯한 질책을 담고 있었다…….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그래? 쟤가 날 계속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이송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송휘를 마주 보았다. 그는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시녀가 이상을 데리고 어화루에서 나왔다. 멀리서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시녀는 행인에게 물어본 후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이송의 맞은편에 선 아이들은 옷차림이 화려했고 외모가 준수했다. 시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시녀는 이상을 안아 마차에 태운 뒤, 위라와 송휘에게 사과하며 면인을 하나 더 사 주겠다고 했다.
송휘는 드물게 성난 표정을 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시녀는 고분고분하게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시녀는 더는 서 있고 싶지가 않아서 이송을 데리고 급히 돌아갔다. 마차에 오를 때 이송은 위라 쪽을 한 번 더 쳐다봤다. 황당하게도, 그녀는 이미 울음을 그친 채였다. 두 눈은 비가 그친 뒤의 하늘처럼 맑게 반짝였다. 조금 전의 그 서러운 표정은 어디 갔단 말인가?
송휘는 위라를 안고 몸을 돌렸다. 위라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송의 시선을 느낀 위라가 힐끔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목적을 이루었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영락없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이송이 자신의 변한 표정을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송은 그제야 깨달았다. 전부 가짜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청수산에서 돌아온 후에도, 위라는 거리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번 생에서 백양 부부는 아대를 수양딸로 삼은 게 분명했다. 그럼 아대는 전생의 자신처럼 생매장당하게 된단 말인가?
쫓아가서 제대로 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송이 끼어드는 바람에 엉망이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송을 싫어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최근에 그와 조장은 상서방에 오지 않았다. 듣자 하니 조장은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처소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다. 이송은 오황자의 공부 친구였으니 오황자가 안 오는 마당에 그 역시도 올 필요가 없었다. 말썽 부리는 두 사람이 없으니 상서방은 한결 조용해졌다.
수업이 끝난 후, 위라와 조유리는 진화궁(辰華宮)에서 글자 쓰기를 했다. 둘은 모서리가 말려 올라가고 옻칠을 한 나전 책상의 양 끝에 앉아 양호필(羊毫筆, 양털로 만든 붓)로 의 내용을 따라 썼다. 위라의 글씨는 단정하고 우아했다. 예쁜 해서체의 느낌도 담겨 있었다.
그녀는 글자 쓰기를 할 때마다 몰입했지만, 오늘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멀어지던 아대와 임혜련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결국 그녀는 글자 두 개를 쓰자마자 붓을 내려놓았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멍하니 풀려 있었다.
조유리가 왜 그러는지 물어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진화전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궁녀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사람을 부르려는데, 그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이무기 문양이 새겨진 군청색 금포를 입고, 허리에는 기(夔, 전설에 나오는 다리가 하나이며 용과 비슷한 동물의 일종)가 투조 기법으로 새겨진 옥패를 찼다. 걸을 때마다 옥패 두 개가 서로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그가 바로 앞에 왔음에도, 위라는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그가 위라가 쓴 글자를 들며 느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평가를 할 때까지.
“손놀림이 바르고 필적이 아름답군. 다만 조금 풀어진 느낌에 힘이 부족하다. 네가 쓴 것이냐?”
위라는 드디어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조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살이라는 걸 감안하면 위라의 글씨는 훌륭한 편이었다.
하지만 조개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이 닿는 건 무엇이든 완벽해야 했다. 그가 보기에 위라의 글씨가 너무 경박하고 차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붓을 들고 그녀의 글자 옆에 새로 두 글자를 쓰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렇게 쓰는 거다. 잘 봤느냐?”
위라는 화선지 위의 점잖고 차분한 글자 두 개를 응시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가 희고 부드러운 손으로 글자를 가리키며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 이름을 쓰셨는지요?”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았지만, 위라도 자기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았다. 조개가 쓴 두 글자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획이 많고 복잡해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전생에서 용수촌의 수재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조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글자를 아느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듯하게 꾸며 내었다.
“아버지께서 자기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한다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사 출신의 위곤은 한림원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딸에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조개는 아무 의심 없이 붓을 들고 또 다른 글자 두 개를 썼다. 이윽고 그가 양호필을 백산호 붓걸이에 걸고, 기이한 짐승 모양으로 조각된 전황(田黃, 짙은 황색 반투명체의 아름다운 돌) 서진으로 화선지를 누른 다음 물었다.
“그럼 이 글자는 뭐라고 읽지?”
…조개.
위라는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왜 그의 이름을 쓴단 말인가? 엄연히 황족의 이름인 만큼, 소리 내어 읽다가 벌이라도 받는 건 아닐까. 그녀는 생각 끝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모르는데, 뭘 주저한단 말인가?
조개는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뭘 알아채진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놀리려던 마음을 접고 일어나서 두 꼬마에게 말했다.
“모후께서 후원에 계화가 아름답게 피었으니 거기서 놀아도 좋다고 하셨다. 간 김에 계화도 좀 꺾어 오고. 어마마마께서 직접 계화 달걀찜을 해 주신다는구나.”
진 황후는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지만, 다른 비빈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숭정황제를 따라 오융을 토벌하러 갔을 때도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직접 사냥을 하고, 가죽을 벗기고, 불을 피웠다……. 그녀는 새장에서 애지중지 길러진 금사작(金絲雀, 카나리아)이 아니었다.
진 황후는 어릴 때 모친이 만들어 준 계화 달걀찜을 가장 좋아했다. 지금도 그 맛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에게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직접 만든 음식은 궁중의 어선방(御膳房)에서 만든 진수성찬보다 훨씬 맛있을 테니까.
게다가 조유리의 병은 종일 방에만 있어선 나을 게 아니었다. 밖에 나가 움직이고 햇볕도 쬐고 꽃도 구경하는 게 좋았다. 태의는 마음이 편해야 병도 낫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진 황후는 조개에게 그녀들을 데리고 후원을 거닐다 오라고 했다.
마침 크게 바쁜 일이 없던 터라, 조개도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