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37
제37화
아이의 손은 힘이 약해서 가위를 사용하지 않고는 한 송이도 딸 수 없었다. 위라는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결국 조개의 품에 안겨 포도알만 따다 먹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가장 크고 동그란 포도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짧은 팔을 뻗어서 포도알을 잡아당겨 땄다. 입에 막 집어넣으려는데, 조개의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어른스럽게 포도알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오라버니 드세요.”
진 황후가 심은 채소와 과일들은 모두 깨끗했다. 평소에 세심하게 관리되는 편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바로 먹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까다롭고 꼼꼼한 조개는 씻지 않은 포도는 먹지 않았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말든가. 위라는 민망해진 나머지 더는 그를 챙기지 않고 혼자 맛있게 포도를 먹었다. 금세 반 송이가 사라졌다. 조개가 그녀를 내려놓았을 때, 그녀는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빵빵한데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조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
위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질투 나서 그러는 게 아닌가.
본인이 못 먹으니까 신 포도라고 말하는 격이지, 뭐.
그러나 진 황후가 만든 계화 달걀찜을 먹고 영국공부로 돌아가는 마차에 타자마자, 정말로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살살 아팠다 나아지기를 반복하니 처음엔 참을 만했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위곤과 상홍은 그녀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위곤은 다급히 시녀를 시켜 의원을 불러왔다. 의원이 왔을 때, 그녀는 구토와 설사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희고 통통한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반나절 만에 핼쑥해진 듯했다.
의원은 가녀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은 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찬 과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에 무리가 간 것뿐이었다. 아이의 몸은 탈이 나기 쉬웠다. 평소에 아무리 원기 왕성한 아이라 해도 이런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의원이 옆에서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고, 위곤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의원이 처방을 써 주고 떠난 후에야 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금루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위라를 일으켜 약을 먹이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궁에서 뭐 드셨어요? 어쩌다 배탈이 나신 건가 해서요.”
위라는 꽃무늬가 새겨진 영침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지친 얼굴로 맥없이 대답했다.
“포도. 많이 먹었어.”
대답하고 나니 조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불길한 말을 잘한단 말이야. 말만 했다 하면 현실이 되잖아.’
* * *
정말로 배탈이 난 그녀는 내일 수업에 갈 수 없었다. 며칠 병가를 내고 몸이 회복된 다음 다시 가겠다고 전해야 했다. 다행히 약을 먹은 후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구토와 설사가 멈췄고, 정신도 좀 멀쩡해졌다. 처음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태부인과 백부, 백모들이 병문안을 와서 상태를 살폈다. 지금 위라는 영국공부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였다. 천기 공주의 공부 친구가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진 황후의 총애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 황후가 수시로 영국공부 다섯째 아들의 집에 이것저것 물건을 보내는 통에 위라의 백부, 백모들은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태부인 나 씨는 본디 위라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강묘란 때문에 자신의 두 아들이 싸우고 반목하여 지금까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여겼으리라. 그 때문인지 태부인은 언제나 위라와 상홍에게 시큰둥했다. 가끔 생각나면 한두 마디 안부를 묻는 정도이지, 다른 손자와 손녀들을 아끼는 것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위라가 진 황후의 총애를 얻게 되자,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예전처럼 냉대하지 않았고, 위라를 보면서 미소 짓는 횟수도 훨씬 늘었다.
위라가 태부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녀도 태부인을 친근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국공부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넷째 백모였다. 다른 어른들은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단 이불 속에 누워 손바닥만 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사람들 사이를 데굴데굴 구르다 진 씨에게서 멈췄다.
“넷째 백모, 저랑 있어 주세요…….”
진 씨가 침상 옆에 앉았다. 그녀는 세심하게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내가 옆에 있으마.”
사람들은 그녀가 무사한 걸 보고 하나둘 떠났다.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위라도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렇게 위라는 사흘을 누워서만 지내야 했다.
조유리는 이틀을 참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완전히 폭발했다. 추 마마가 계속 내일이면 올 거라고 조유리를 속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틀을 기다려도 위라는 오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 안 오는 게 아닐까? 천기 공주에게 공부 친구는 처음이었으니, 위라가 중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위라는 지금 아프니 몸이 다 낫고 나면 올 거라고 추 마마가 달랬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조유리는 급기야 약까지 거부했다. 위라가 오면 먹겠다며, 약이 입에 들어오는 즉시 뱉어 버렸다.
맙소사, 영국공부 넷째 규수가 어쩌다 이런 만병통치약이 되었을까?
추 마마는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급히 소양전으로 돌아가 진 황후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마침 조개와 고단양도 함께 있었다. 조개는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가 이모를 뵈러 온 고단양과 마주친 것이다. 추 마마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난처하다는 듯 물었다.
“마마,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요?”
진 황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라의 병세가 어떠하냐? 입궁할 수 있다더냐?”
추 마마(嬤嬤)가 말했다.
“아마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영국공부에서 사람이 왔는데, 아직도 누워 있다고 합니다.”
큰일이었다. 하나는 입궁을 못 하고, 하나는 약을 안 먹고.
진 황후는 마음이 초조하게 타들어 갔다.
태사의에 앉아 얘기를 듣던 조개는 두채계항배(斗彩鷄缸杯, 전통 자기 공예 기법으로 닭 그림을 그려 넣은 고대의 화려한 찻잔)의 잔 가장자리를 만지며 물었다.
“위라가 아프단 말씀이십니까?”
홍목 나한상에 앉은 진 황후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저께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어쩌다 갑자기 병이 났을꼬. 상태가 가볍지는 않은 모양이더구나. 이틀 동안 상서방에도 오지 못했다.”
조개가 시선을 거두며 생각에 잠긴 듯 “예.” 하고 대답했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의 맞은편에 있던 고단양은 위라의 이름을 듣자마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모님, 그 아이가 영국공의 넷째 손녀입니까?”
고단양은 오늘 특별히 더 예쁘게 꾸몄다. 두약 문양이 수놓인 월백색 유선군(留仙裙, 주름이 잡힌 치마) 덕분에 그녀의 늘씬하고 맵시 있는 몸매가 돋보였다. 틀어 올리고 남은 머리는 아래로 늘어뜨렸고, 귀밑머리 부분에는 한 쌍의 원앙 장식을 비스듬히 꽂았다.
미간에는 매화 모양의 화전(花鈿, 이마에 붙이는 장식용 문신의 일종)을 붙였는데, 그녀의 이목구비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조개는 화전을 보자마자 위라의 미간에 있던 작고 붉은 점을 떠올렸다. 그 점은 앞머리를 젖혀야만 보였는데, 일부러 찍어 넣은 화전보다 훨씬 예뻤다.
진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리의 공부 친구란다……. 그런데 네가 그 아일 어찌 아느냐?”
고단양은 저도 모르게 조개 쪽을 쳐다보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릅니다. 얘기를 듣기만 했어요.”
고양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조개는 눈을 내리깐 채 손에 든 두채계항배를 무심하게 훑었다. 마치 그녀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
진 황후는 위라가 조유리를 설득해 약을 먹이게 된 일을 쭉 설명했다. 반 정도 얘기하던 황후는 조유리가 아직도 약을 먹지 않은 게 생각나 얘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추 마마와 진화궁에 가서 직접 딸을 타일러 볼 작정이었다.
사실 고단양은 위라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즐겁게 얘기하는 진 황후의 흥을 깨기가 송구하여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듣고 있었다. 마침 진 황후가 진화전에 간다고 하니 그녀도 가서 조유리를 볼 참이었다.
고단양은 일부러 조개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조개는 태사의에서 일어나며 거절했다.
“난 일이 있어서. 내일 가 보지, 뭐.”
그러고는 고단양에게 인사도 없이 곧장 나가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저 멀리까지 가 버린 조개의 뒷모습을, 고단양이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조개는 뒤따라오는 주경에게 말했다.
“영국공부에 가서 한번 살펴보거라. 어디가 아픈지, 언제 다 나을 것 같은지. 필요한 약재는 내 집에 차고 넘치니까.”
주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장 명을 받들었다.
* * *
영국공부.
위라는 거의 다 나았다. 다만, 첫날 구토와 설사가 심해서 몸이 많이 허해진 상태였다. 이틀을 쉬고 나니 거의 회복되었고, 내일은 상서방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궁 안의 상황을 모르는 그녀는 쓴 약의 맛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참이었다. 그때, 상홍이 겹사법랑(掐絲琺瑯, 가는 금속 선으로 문양의 윤곽선을 고정한 뒤 색깔 있는 유약을 발라 구워 내는 기법) 연꽃 문양 함을 들고 들어와서는 보물을 바치듯 그녀의 품에 안겼다.
“누나, 이거.”
위라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함을 열어 보았다.
“이게 뭐야?”
상홍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에 든 물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함 안에는 영롱한 색깔을 뽐내는 알사탕이 들어 있었다. 빨간색은 산사 열매 맛, 노란색은 귤 맛, 보라색은 포도 맛……. 투명한 포장지로 싸인 사탕은 예쁘기도 하거니와 예쁘고 맛있어 보였다. 위라는 산사 열매 맛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설탕의 단맛과 산사 열매의 신맛이 섞이니 조금 전 먹은 약의 쓴맛이 금세 사라졌다.
이런 알사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하나를 꺼내 상홍의 입에도 넣어 주었다.
“어디서 났어?”
상홍은 웬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얼굴이 웃으니 더 싱그러웠다.
“오늘 큰형님이 출타하신다길래 같이 나갔었어. 길에서 산 거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애어른처럼 말했다.
“누나가 좋아하면 됐지, 뭐.”
위라가 법랑 함을 들고 반달눈을 떴다.
“너무 좋다.”
자신이 먹는 쓰디쓴 약을 생각해 상홍이 이걸 사 왔을 거라 생각하니 감동이 몰려왔다. 그러나 곧 의아해진 위라는 돈이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상홍은 새해에 아버지가 주신 용돈이라고 했고, 그녀는 그제야 안심했다.
상홍이 떠나고, 위라는 법랑 함을 침상 머리맡에 두었다. 이게 있으니 앞으로 약 먹을 때 쓴맛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궁에 가져가 조유리에게 맛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물론, 너무 많이 줄 순 없었다. 상홍이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으니 많이 먹기가 아까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위라는 침상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