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78
제78화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에는 애교가 섞여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들며 말했다.
“어디 보자…….”
희고 보드라운 손목에는 정말 둥근 멍 자국이 있었다. 조금 전엔 빨갰는데, 이제는 푸르스름하게 퍼지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힘 조절을 잊어버린 탓일 터였다. 푸른 멍 자국은 흰 피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소녀의 피부는 어찌나 부드러운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금세 자국이 남고 말았다. 조개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약해서야, 나중에 그의 여자가 되면 어떻게 마음껏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간 켜켜이 쌓인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때가 온다면, 이렇게나 연약한 그녀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조개가 그녀의 멍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아프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위라가 뾰로통하게 답했다.
“오라버니라면 안 아프시겠어요?”
그가 닿자마자 위라는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고 물었다.
“오라버니께선 거기에 왜 오신 거예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팔각정을 지나다가 네가 대숲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거긴 워낙 복잡하고 어지러우니, 네가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었지.”
나름 그럴듯한 이유였기에, 위라는 천천히 수긍하는 눈빛을 띨 뿐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 서 있어선 안 되었다. 누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을 보기라도 하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조개는 그녀를 데리고 가면서 지나가던 하인 하나를 불러 약술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이대로 둔다면 소녀의 피부는 내일이면 자줏빛으로 변할 듯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위라를 객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끔 정국공부에 오는 그는 이곳의 구조를 잘 아는 편이었다. 객방은 오랫동안 사람이 묵지 않았는데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구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창도 깨끗했다. 잠깐 머물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인이 약술을 가져오자 우선 자신의 손에 약술을 붓고 문질러서 열을 낸 다음,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문질렀다. 커다란 멍 자국은 그 크기만큼 조개의 마음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약을 다 바른 그가 몸을 일으켜 옆에서 손을 씻었다. 그러고는 무심한 척 물었다.
“아라야, 내가 정자를 지날 때, 왜 날 모른 척한 것이냐?”
위라의 손목에서 약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콧등을 찡그린 채 냄새를 맡으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단양 언니가 오라버니한테 가셨잖아요.”
그가 멈칫하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단양이 나한테 오는 걸 어찌 신경 쓰느냐?”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모두가 오라버니와 단양 언니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하던데요.”
그러면서 눈알을 굴리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녹주석 팔찌도 선물하셨다면서요. 언니가 저한테 보여 줬어요. 아주 예쁘더라고요.”
손을 닦던 조개가 미간을 찌푸렸다.
“팔찌?”
그로서는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위라는 연극을 보러 갔던 일까지 포함해 고단양이 자신에게 했던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물었다.
“오라버니, 옥석이 아주 많으신 건가요? 너무 많아서 못 쓰실 정도면 저한테도 좀 주세요.”
말인즉슨, 조개의 선물은 소녀의 마음을 얼러 환심을 사는 수단일 뿐, 진심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꼬집는 말이었다. 고단양에게 녹주석 팔찌를 준 것이나, 자신에게 녹송석 다람쥐 허리 장식을 준 것이나, 본질은 같은 게 아닌가.
그러나 조개는 그녀의 말에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의 일이 떠오르긴 했지만, 결단코 팔찌를 선물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모후의 작품일 터였다. 불쾌한 빛이 조개의 얼굴을 스쳤다. 고단양이 이 얘길 그녀에게 한 이유가 뭘까? 별 뜻 없이 한 말일까, 일부러 한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단서를 잡아냈다. 문득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아닐까? 자신이 고단양에게 선물하는 걸 원치 않아서?
일단은 소녀의 오해를 풀어야 했다. 해명할 것은 해야 하니,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단양에게 선물을 준 적은 없으니, 그 팔찌도 내가 준 것이 아니다. 선물은 오직 너한테만 하는 것이니.”
그를 바라보는 위라의 눈동자가 맑았다. 아주 잠깐, 눈동자에 물결이 일다가 사라졌다.
분홍빛 입술을 다문 그녀는 조유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유리는 양진이 그녀에게 해 주었던 것들을 행복한 듯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양진이 조유리에게 했던 것들을 조개도 그녀에게 해 주었다. 양진이 다른 이들에겐 차갑더라도 조유리에게는 자상한 것처럼, 조개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른 사람에겐 언제나 차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에게만은 달랐다.
앞으로도 계속 그녀에게 잘해 줄까? 그녀 한 사람에게만 잘해 줄까?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새끼 사슴처럼 촉촉한 눈망울이 조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조개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앞으론 다른 사람한테 선물하지 마세요. 잘해 주지도 말고요. 저한테만 잘해 주셔야 해요.”
조개의 눈동자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어째서?”
위라 자신도 이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기에, 오히려 그녀가 더 혼란스러웠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둥둥, 가볍고 느리면서도 두려움이 담긴 소리였다.
두 사람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금루가 문 앞에 서서 뻘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정왕야… 일곱째 도련님을 찾았습니다. 백람이 도련님을 모시고 대숲 뒤편의 연못에 갔는데, 거기서 여양왕부의 따님과 마주치셨어요…….”
* * *
위라를 따라 후원의 팔각정에 갔던 위상미는, 금세 지루함을 느꼈다. 위라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자신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혼자 팔각정을 나와 대숲 근처를 걸어 다니는데, 백람이 뒤쫓아 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숲 뒤편의 연못까지 가게 되었고, 팔각정과는 점점 멀어졌다.
아직 시기가 아닌지 연못에 연꽃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작은 물고기만 보였다. 위상미는 연못가에 서서 멍하니 물고기를 쳐다봤다.
한편 이상은 앞뜰에서부터 이송을 찾아다녔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포기하고 혼자 돌아가던 길이었다. 연못가를 지나는데 그곳에 서 있는 대여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귀엽게 생긴 아이는 연못을 바라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은 그 아이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청에서 본 아이가 아닌가. 위라의 남동생임을 깨닫자마자, 혐오감이 밀려왔다. 이상은 위가 사람들에겐 조금의 호감도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을 지나치려던 이상은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린 이상이 위상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고기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아이는 곁에 있는 시녀뿐만 아니라 자신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이상이 그를 불렀다.
“위상미?”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위상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새카맣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절 아세요?”
그에게 다가온 이상이 미소 띤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들어 봤지.”
그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아서 쇠비름을 한 움큼 뽑아 물고기 밥으로 뿌렸다. 물고기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너도나도 풀을 먹으려고 야단이었다.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지만, 위상미는 소매로 슥슥 닦고는 계속 풀을 뽑아 물고기 밥을 주는 데 열중했다.
이상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음이 명백했다. 알면서도, 이상은 다시 물었다. 그의 주의를 끌어야 했다.
“왜 여기에 혼자 있어? 누나는?”
물고기들이 퍼덕이며 위상미의 검정 장화에 물방울을 흩뿌렸다. 그는 통통한 손으로 장화 끝을 문지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아라 누나는 저쪽에서 얘기 중이에요. 그래서 방해 안 하고 혼자 노는 거예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팔각정 쪽을 가리켰다.
이상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위라 누나 말고, 내가 말하는 건 위쟁이야. 위쟁 누나 어디 있냐고?”
위쟁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위상미의 토실토실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그 누나 싫어해요… 같이 안 놀아요.”
위쟁은 그를 볼 때마다 표정이 험악해졌다. 마치 그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노려보곤 했다. 아무리 아이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위쟁의 적대심은 대단했고, 자연스레 그는 위쟁을 무서워하며 피해 다녔다.
위라도 말로는 그가 밉다고 했지만, 그녀와 위쟁의 미움은 결이 달랐다. 위라는 거리에 나갈 때마다 그를 위해 간식을 사 왔다. 항상 진 씨에게 주려고 사 온 것이라 말했지만 대부분의 간식은 그의 배로 들어갔다. 그 역시도 위라가 진짜로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때문에 위상미는 위라를 좋아하고 따랐다.
위상미의 대답에 이상은 잠시 의아해하더니, 이내 비단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까랑까랑한 웃음소리에 조롱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듣기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거슬리는 수준이었다.
위상미가 통통한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누나, 왜 웃어요?”
한참 후, 이상이 드디어 웃음을 멈추고 비단 손수건을 내리더니 말했다.
“네가 웃겨서.”
위상미는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제가요?”
“그래. 네가 웃겨.”
이상은 입꼬리를 올린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해괴하고도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시선이었다. 위상미의 반응이 어떻든, 한참을 바라보던 이상이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말했다.
“네가 바보 같아서, 불쌍해서 웃은 거야. 남들한테 속은 것도 모르다니. 위라가 너한테 뭐라고 말하던? 네가 진 씨의 아들이라고 했어? 내가 말해 줄게. 넌 진 씨의 아들이 아니야. 널 낳아 준 어머니는 다섯째 부인이야. 위쟁이 네 친누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