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82
제82화
그녀는 얌전히 앉아 사탕 하나를 다 먹었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위상인을 바라보더니 동그랗고 큰 눈을 깜박였다. 영락없이 “하나 더 있어요?” 하고 묻는 눈빛이었다.
위상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더니, 금사로 팔보 문양이 수놓은 소매에서 작은 유지 포장을 꺼내 건넸다. 그는 단 음식을 멀리하지 않아 사탕을 한두 개 들고 다녔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하나씩 먹으면 금세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소녀가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하나를 준 것인데, 뜻밖에도 효과가 좋았다.
사탕을 먹으니 양옥용은 과연 졸지도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다 먹고 나니 마침 주지승의 강의가 끝났다.
소보전을 나선 양옥용이 앞에 가던 귀목 바퀴 의자를 쫓아갔다.
“상인 오라버니!”
위상인이 그 소리를 듣고 의자를 밀던 하인에게 멈추라 명했다.
다가온 양옥용이 유지 포장지를 건네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제가 오라버니 사탕을 다 먹어 버렸네요. 다음에 만나면 사탕 사 드릴게요. 어떤 맛 좋아하세요?”
위상인의 우아한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다 좋아해.”
다 좋아한다니? 뭘 사 주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그녀는 잠시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고, 금세 한 상점을 떠올렸다.
“팔진방(八珍坊)에서 정말 맛있는 사탕을 팔아요. 우유랑 과일청으로 만든 건데, 달면서도 안 느끼해요. 한번 먹어 보실래요? 보답으로 사 드릴게요.”
얘기를 나누는 사이, 향을 올리러 온 방문객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자연히 두 사람은 길을 막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양옥용은 아무렇지 않게 위상인의 뒤로 가서 바퀴 의자를 밀며 걸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문득 어릴 적 지금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눈이 오던 날, 그는 홀로 동백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머리와 어깨에 하얀 눈을 소담하게 얹은 채. 그녀가 다가가 바퀴 의자를 밀어 주려 했지만, 아무리 밀어도 의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녀가 된 지금, 여전히 힘이 들긴 해도 나름 밀 만했다.
위상인이 그녀를 말렸다.
“넌 못 밀어. 하인에게 시키면 돼.”
양옥용이 의자를 천천히 밀면서 고개를 저었다.
“무겁지도 않은데요, 뭐. 미는 게 힘든 것도 아니고요.”
위상인은 머뭇거리다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가다 보니 저 앞에 대웅보전이 보였다. 그녀는 위상인이 아직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을 떠올리고, 다시 물어보았다.
“오라버니, 제가 팔진방에서 사탕 사 드릴게요. 어때요?”
그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러기로 한 거예요? 다음에 제가 사서 아라 편으로 보낼게요.”
문득 양옥용은 두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 보니 썩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아라가 몰래 먹진 않을지 모르겠네요…….”
대웅보전 입구.
위라는 위상인의 바퀴 의자를 밀고 오는 양옥용을 보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막아도, 결국 올 것은 오게 되어 있었다.
양옥용은 위상인을 깍듯하게 ‘큰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위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몇 마디 나누더니, 하인을 불러 후원의 객방으로 갔다.
양옥용은 한참이나 위상인을 눈으로 배웅한 후에야 위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라야, 몸이 안 좋다고 하지 않았어? 왜 나온 거야?”
위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큰오라버니랑 어디 갔다 온 거야?”
위라의 진지한 표정에, 양옥용이 얼른 뒤편의 소보전을 가리켰다. 그녀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기에서 주지 스님의 강의를 들었어.”
돌아가는 길, 양옥용의 하소연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경법(經法)은 정말 어렵더라. 잠이 들 뻔했지 뭐야. 다행히도 상인 오라버니가 사탕 한 봉지를 주셨어. 먹다 보니까 잠이 깼지.”
두 소녀는 응회암이 깔린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후원 객방에서 앞뜰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어느 정도 걸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검은 직철을 입고 황색 끈을 묶은 스님과 마주쳤다. 스님들은 합장하며 예를 갖췄고, 그녀들도 예의 바르게 화답했다.
객방에 도착한 후, 위라가 자신의 방 앞에 서서 물었다.
“상인 오라버니가 너한테 사탕을 줬다고?”
양옥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라가 못 믿는 건가 싶어서 고이 접은 유지를 보여 주며 거짓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상인 오라버니께 사탕 한 봉지 사 드리기로 했어. 아라야, 내가 사탕 사서 너 줄 테니까 대신 좀 전해 줘.”
위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싫어.”
양옥용은 멈칫했다. 당연히 알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하니 오히려 자신이 더 민망했다.
“왜?”
왜냐하면… 당연히 두 사람의 만남이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느니, 이렇다 할 감정이 없을 때 싹을 잘라야 했다. 위라는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상인 오라버니는 용원(榕園)에서 거의 안 나오셔서, 나도 본 적이 몇 번 없어. 전해 주기가 쉽지 않다고.”
이유가 너무 무성의했다. 이런 이유를 누가 믿을까? 같은 집 안에 살면서 얼굴 한 번 보는 게 뭐가 어렵다고? 말인즉슨, 양옥용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양옥용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동그란 눈으로 위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네가 안 도와주면, 내가 나중에 직접 갖다 드리면 되지, 뭐.”
위라는 발을 멈추고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가 대신 사탕을 전달해 주면, 최소한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양옥용이 직접 전한다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전해 주는 게 안전하지 않겠는가.
위라가 몸을 돌려 마지못해 받아 준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전달해 줄게.”
양옥용은 얼굴로 신이 나서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 * *
천불사 후원에는 산허리의 반을 차지하는 드넓은 복숭아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위라는 천불사로 오는 마차 안에서 복숭아나무 숲을 보았다. 끝없이 흐드러진 복숭아꽃들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진즉부터 양옥용과 얘기를 해 놓았다. 점심을 먹은 후 사람들이 쉬고 있을 때, 후원의 복숭아나무 숲을 함께 걸을 계획이었다. 위라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며 나선 순간, 눈에 들어오는 두 사람의 형체에 멈칫하고 말았다.
멀지 않은 고무나무 아래, 온화하고 우아한 한 명과 준수하고 싱그러운 한 명이 서 있었다. 위상인과 위상홍이었다.
위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인 오라버니는 어떻게 오셨어요?”
양옥용이 뒷짐을 지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초대했어. 상인 오라버니께서 외출은 거의 안 하신다길래, 함께 복숭아꽃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오전에 대웅보전에서 나오던 길에 그녀가 위상인에게도 함께 가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위상인은 노는 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거절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오라버니가 저희를 방해할지 어떻게 아세요? 저희가 오라버니를 귀찮게 할까 봐 안 가고 싶으신 거죠? 조용한 걸 좋아하신다면서요? 저희도 그렇게 시끄럽지 않아요. 같이 가 보면 아실 거예요. 복숭아꽃은 일 년에 딱 한 철만 피는데, 지금이 그때라고요. 안 보면 얼마나 아쉬워요.”
그녀도 위라처럼 말주변이 좋아, 몇 마디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위상인은 웃고 말았다. 듣는 이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웃음소리였다. 함께 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지금,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은 온화했고 수려한 눈매엔 웃음이 어려 있었다.
“옥용이가 뒷산의 복숭아꽃이 예쁘다길래, 초대도 안 받았는데 내 맘대로 와 버렸네. 아라는 내가 온 게 싫은 건가?”
옆에 서 있는 양옥용의 미소가 환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럴 리가요? 큰오라버니와 같이 가면 당연히 좋죠.”
잠시 생각하던 위라가 웃으며 덧붙였다.
“얼른 가요.”
일행은 절의 뒷문으로 나갔다. 복숭아나무 숲은 천불사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저마다 시녀나 하인을 하나씩만 데리고 왔다.
앞서가는 양옥용과 위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양옥용은 말주변이 좋은 데다 성격도 활발해, 함께 있으면 답답할 일이 없는 소녀였다. 그래서인지 위상인과도 잘 어울렸다. 활발하고 유쾌한 여자와 온화하고 차분한 남자. 재잘거리는 양옥용과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위상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에 담길 듯했다. 두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만 아니었다면,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을 터였다.
위라는 전생의 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영국공부로 돌아왔을 때였다. 두 씨와 위쟁의 지시로 쫓겨난 후, 그녀는 구석진 곳에서 위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작 마주친 사람은 위곤이 아니라, 양옥용이었지만.
당시 양옥용은 평원후 부부의 독촉에 못 이겨 다른 사람과 약혼한 후였다. 그러나 위상인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영국공부에 온 것이었다. 위상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한쪽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긴 울음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그녀는 웅크려 앉아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흐느낄 때마다 절망에 짓눌린 등이 들썩였다. 그렇게 쾌활하던 사람이, 웃음기라곤 보이지 않은 채 공허한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위상인을 만나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질 때쯤 평원후부의 사람에게 이끌려 돌아갔다.
이번 생에서도 같은 결말이라면, 위라는 단 하나만은 막을 작정이었다. 양옥용이 위상인을 사랑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면 안 되었다.
* * *
천불사 뒷문을 나서자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길 양쪽에는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정중앙으로만 가야 했다. 다행히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폭은 되었고, 평탄했다.
위라는 양옥용이 위상인과 말을 섞지 못하도록 가는 내내 그녀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양옥용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으니, 나름 순조로운 작전이었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시야가 확 트였다. 흐드러지게 핀 분홍빛 꽃잎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을 펼쳐 놓은 듯했다. 일행을 환영하듯, 향기를 머금은 꽃잎들이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복숭아 꽃잎 하나가 살랑거리다 위라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상홍이 꽃잎을 집으며 물었다.
“누나, 어디 아파?”
그 말대로, 위라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 듯 입술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