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106
Chapter 106 – 평화의 상징 (3)
길쭉한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쌓고 보드카를 조금. 그 위로 오렌지 주스를 잔이 가득 차도록 따른다. 길쭉한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주면 완성.
칵테일 스크류드라이버다. 한재중은 과거 고시 준비용으로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얼굴을 노출시키기 싫은 그가 맡은 일은 주방이었고, 그런 그에게 이런 간단한 칵테일을 만드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다.
백아희에게 그것을 건내곤 앞 자리에 그도 앉았다.
“감사합니다.”
오오,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백아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잔을 살폈다. 이 싸구려 칵테일이 지고의 미주(美酒)라도 된다는 듯 경탄하는 그녀를 보며 한재중은 픽 웃었다.
“그냥 평범한 칵테일이에요.”
“제 꺼는요?!”
“미성년자가 술은 왜 마십니까. 그냥 주스나 드세요.”
“약이나 담배보단 훨씬 건전한데에….”
하루는 작게 울먹였다. 그녀에겐 평범한 오렌지 주스만을 따른 잔을 건냈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다.’
동시에, 방금 하루가 지껄인 말은 그저 과장된 비교군이라 여기기로 했다. 해외 마법 소녀가 그런 걸로 심신을 달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부서질 게 뻔했다. 마법 소녀는 이슬만 마시고 산다고!
“내 껀?”
“아까 커피 남았잖아.”
“아까 그 친구 얼굴 보니까 술이 필요해져서 말이야. 그냥 커피에 보드카만 따를까?”
“휘핑크림이나 우유라도 좀 섞어. 그래야 맛있지.”
“알았어~ 오빠 것도?”
“응, 부탁할게.”
재료만 조금 바꾼 화이트 러시안이 되겠네. 낮부터 술을 마신단 죄악감을 억누르며 한재중은 조아윤에게 부탁했다.
“오오… 이거 달아요!”
“달게 했으니까요.”
“술은 이런 맛이구나….”
헤실헤실 웃으며 백아희는 연신 잔을 움직였다. 어느새 잔은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한재중은 그제야 스크류드라이버가 레이디 킬러류의 칵테일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여자를 쉽게 취하게 만드는 칵테일이라 하여 레이디 킬러. 도수가 높은데도 달아 쉽게 마실 수 있고 동시에 빠르게 취하게 만드는 칵테일들을 일컬어 그리 말한다.
처음 마시는 술이라 접하기 쉽도록 달게 만들어 버린 것이 역효과를 냈다.
“아희 씨. 천천히 마시세요.”
“헤헤~? 왜요? 맛있는데? 재중 씨가 타줘서 그런가? 왜 더 맛있지?”
“비교군도 없으면서 무슨 말이에요. 진짜 천천히 마시세요. 그러다 취해요.”
“네에~”
백아희는 듣는둥 마는둥 하며 다시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아까까지 툴툴거렸던 하루는 이제 다시 흥을 되찾은 건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백아희를 바라보았다.
“직녀가 취한 모습… 보고 싶습니다!”
“안 돼. 감당 못 해. 아희야 좀 천천히 마셔라.”
단호하게 거절한 조아윤이 한재중의 앞으로 술을 탄 커피잔을 가져와 주었다.
“고마워.”
“그래서? 여길 거점으로 삼고 싶다니 무슨 얘기야.”
하루를 패면서도 들을 건 다 듣고 있던 건가. 조아윤이 심각한 얼굴로 백아희에게 물었다.
“에이 그런 건 됐잖아요! 재중 씨~ 언니~ 건배해요 건배!”
가볍게 조아윤의 말을 무시한 백아희는 잔을 높이 치켜들면서 건배를 종용했다. 차가운 잔이 볼을 가볍게 치고 가는 걸 느끼며 한재중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아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걸 처리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제대로 진행되긴 힘들어보였다.
“…저거 오빠가 감당해.”
“이럴 땐 선배가 챙겨줘야지.”
“너무해라… 저랑 마시기 싫은 거에요?”
“오빠가 책임져 빨리.”
백아희는 그가 주도나 매너를 가르쳐주기도 전에 거하게 취했다. 얼마나 알코올에 약한 것인가. 이게 내 탓인가. 한재중은 돌연 억울해졌다.
그럼에도 백아희의 술시중을 들어주란 조아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던 한재중은 내심 언짢아하면서도 잔을 올렸다.
“네네 건배하고 이제 본론을….”
“헤헤~ 그럼! 성공을 기원하고!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성….”
“네네 건배!”
“건빠이~!”
한재중은 민망해지는 건배사가 완성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잘라 건배를 외쳤다. 어딜 봐서 저게 성인이란 말인가. 그냥 야한 말이나 행동을 하며 깔깔대는 사춘기 중학생이지.
건배사가 완성되지 못한 게 아쉬운듯 백아희는 에이~ 하며 투덜거렸다. 그리곤 단숨에 잔에 남은 내용물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아희야… 내가 인터넷 작작 하랬지.”
“왜 그렇습니까? 왜 직녀의 말을 자른 겁니까?”
“넌 그냥 몰라도 돼….”
“검색하겠습니다!”
“하지 마.”
화이트 다비흐도 그렇고 이 후배들은 왜 인터넷에서 나쁜 것만 배워올까. 조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한 편 마법 소녀의 디지털 리터러시 상태를 본부 차원에서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과연 원래는 이런 언어유희를 노린 거군요! 직녀 센스쟁이!”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를 뒤로 조아윤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우리 가게를 쓰고 싶다고?”
“하잇(넵)! 이번 D5시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조사하기 위한 임시 거점으로 삼고 싶다고 합니다!”
“네~ 마줘요~ 재중 씨 나 한 잔 더~ 에헤헤~”
“쌉소리 마시고 다비흐 씨처럼 주스나 드세요. 제가 다신 베가 씨에게 술 드리나 봐요.”
백아희의 잔에 대충 오렌지주스를 채워넣으며 한재중은 제 잔의 내용물을 마셨다.
씁쓸한 커피향이 입 안을 한 번 감돌고 그 뒤로 단맛에 섞인 알코올의 향과 맛이 둔탁하게 목을 뒤흔들었다.
“흠….”
마법 소녀 본부의 제안 자체는 이해가 되었다. 이 동네에 일어나는 사건은 명백히 이상하다.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사람들을 데려가는 괴인이라니. 이런 현상을 방치해봤자 시민들의 불안만 초래되고 조직의 권위만 추락될 뿐이다.
이 까다로운 사건을 다룰 땐 출동 시스템보단 차라리 거점을 하나 만들어 전체적으로 도시를 관찰하는 게 이롭겠지.
하지만 이건 오직 본부의 사정에 불과하다. 그들에겐 그들의 사정이 따로 있었다.
이 가게의 인물인 두 사람이 일반인이었다면 선뜻 가게에 이들이 오는 걸 용납했을 터이다. 그러나 둘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우리의 정체가 발각될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어.’
조아윤과 한재중은 인간에서 괴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특수한 존재다. 마법 소녀 측에서 이를 깨닫는 건 곤란하다.
괴인으로 낙인찍힌다면 마법 소녀들의 공격은 물론이요, 인간의 모습일 때도 편히 쉴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그들의 얼굴을 알고 경계하겠지.
인간으로 납득당해도 곤란하다. 신뢰할 수 있는 영웅을 원하는 현대 사회에서 정체를 감추고 자경단적으로 행동하는 영웅 따위 빌런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정체를 공개해야 할 텐데….
‘그건 안 돼.’
악당으로 팔리든 영웅으로 팔리든, 어느쪽이든 사양이다.
한재중은 자신의 얼굴이 대중에 노출되는 걸 원치 않는다. 깊게 박힌 트라우마는 공포가 되어 그를 구속했다.
‘게다가, 마법 소녀 이외의 영웅이라니. 그딴 건 필요 없어.’
언제나 새롭고 파격적인 존재에 열광하는 대중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안 그래도 현재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마법 소녀의 위치를 흔들 가능성도 있다.
아군이 되며 역설적으로 가장 큰 적이 되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 소녀가 잠시 모일 수 있는 거점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을 테니까요! 숙식을 제공하란 뜻도 아니라고 해요! 당연히 충분한 돈을 줄 예정이고요! 센빠이도 동료들 성격 알잖아요! 함부로 빌린 장소를 더럽히는 성격도 아니에요!”
그들의 근심 어린 표정을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 판단한 하루가 재빨리 본부를 변호했다.
백아희의 말로는 별 거 아닌 이야기라고 했지만, 저렇게 구체적인 변호가 준비된 걸 보면 꽤 진지하게 고려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마자요 마자요~ 너무 걱정마세요 재중 씨! 이 카페가 임시 거점이 되면 제가 상시 재중 씨를 곁에서 지켜줄 수 있다고요!”
“아니 일 하세요….”
“아흐흐흐흑, 재중 씨가 너무 매정해졌어. 역시 나에겐 하루짱 뿐인가~?”
“넵! 저에게 오시죠 나의 직녀!”
“그래도 나 연하는 별론데….”
“에에 우소(거짓말)”!
둘의 만담을 뒤로 조아윤이 눈짓으로 한재중을 떠 보았다. ‘어쩔래?’라는 뜻이 담긴 눈빛이었다.
사장님이 손수 직원을 존중해주니 몸 둘 바를 몰랐다. 현실적이라면 거절하는 게 맞다. 돈은 둘째치고, 이 동네에 숨은 괴인을 찾다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버릴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숨은 괴인을 찾긴 할 테니.
하지만 한재중은 현실적일 수 없었다.
“난 좋다고 생각해.”
수호자의 수호자를 자처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이득을 우선할 수 없게 되었다. 제 안위보단 그녀들의 안위를 우선하고자 삶을 연장했다.
[퀘스트 등장. 제안을 수락하십시오. 불응할 경우의 대가는 죽음퀘스트의 수락을 확인했습니다. 퀘스트 성공.]한재중이 동의를 표하기 무섭게 벨트는 퀘스트를 내놓았다. 발생과 동시에 성공으로 처리되어 음성이 겹치는 게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들에게 이득이 된다면 본인의 이득을 포기한다. 설령 위험을 동반할 지라도.
사실 그에게도 이득이 아예 없진 않았다. 이 도시의 이상 현상은 처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협력자가 있다면 든든하다. 마법 소녀의 정보가 공유될 수도 있다.
“그럼 결정되었네.”
조아윤은 잔을 탁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에게 협력해줄게.”
“이렇게 빨리?”
“오빠가 좋다며. 그럼 나도 좋지.”
[역시 내가 선택한 사람답다! 시원시원하군! 짝사랑 진도도 좀 시원시원하게….]‘아가리.’
그가 선택했다면 조아윤 역시 거절할 이유가 사라진다. 꿈은 꾸지 못할 지언정 꿈 꾸는 사람은 지킬 수 있는 그녀는, 한재중이 가기로 결정한 길을 무한정으로 지지해줄 수 있었다.
“아싸~ 진짜죠? 진짜진짜진짜 저랑 매일 함께 있자고 맹세한 거죠?!”
“언제 그랬습니까. 그냥 가게에 맘대로 올 수 있는 권리를 준 거죠.”
“에이, 그게 그거죠!”
백아희는 헤실헤실 웃으며 한재중의 손을 잡고 쎄쎄쎄하듯 흔들었다.
“앞으로도 잘부탁해요~”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드립니다)!”
괜히 수락했나. 한재중은 별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기가 빠지는 걸 느끼며 쓰게 웃었다.
“그럼, 바로 출발해볼까요?!”
“어딜.”
“당연히 동네 순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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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아희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음~ 조용한 동네네요! 앞으로 살게 된다면 이런 곳도 좋겠어요! 재중 씨는 어때요?”
“전 제 동네가 좋습니다.”
“에에~ 난 싫은데!”
거리를 둘러보던 백아희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녀는 앞으로 감시해야 할 동네를 미리 알아볼 필요가 있다며 주변 지리를 알려달라 부탁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데다 그녀들의 고집이 워낙 완고하여 한재중과 조아윤은 제안을 승낙했다.
“알려달라 했지만 우리도 잘 몰라.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유비무환!”
“쪽바리 년이 그런 건 어디서 알아오는 거야.”
“츤데레군요! 유식한 말을 썼단 칭찬을 그렇게 돌려 말하시다니!”
씩씩하게 조아윤의 말을 받아 넘긴 하루는, 싱글벙글한 입과 달리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상가도 적잖이 있어 보이는데 거리를 걷는 게 이정도 뿐이라… 흠, 확실히 소문의 영향이 있나 보네요.”
“소문?”
“하잇! 이 동네에 투명한 괴인이 있다는….”
“재중 씨~ 나 목말 태워줘요~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고 싶어요~!”
“본심은?”
“재중 씨의 머리 위에 있고 싶어요!”
“앗 직녀 다음엔 저도 부탁드립니다!”
“어휴….”
애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느낌이다. 피곤함에 한숨을 내쉰 재중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실현.”
[Reveal the truth.]괴인이 둔갑을 해제하는 음성.
한재중은 홀린듯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로군.”
거대한 저울으로 어깨를 장식한 괴인이 바로 그 시선 끝에 위치했다.
“…리브라.”
“잊지 않았나 보군. 다행이야.”
리브라는 주먹에 빛을 모았다.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거대했다.
“정말, 다행이로군.”
주먹을 한재중이 위치한 곳으로 뻗자, 빛은 그 경로 안에 있는 것을 전부 분쇄하며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