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115
Chapter 115 – 평화의 상징 (12)
“도와달라니 뭘?”
갑작스레 무릎을 꿇어도 이쪽은 곤란할 따름이다.
“확실히. 난 너에게 은혜를 입었지. 넌 나에게 어느 정도의 제안을 요구할 자격이 있어. 염치가 없는 건 내쪽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에겐 지금 네 부탁을 들어줄 만큼의 여유가 없어.”
이동한 건 아마 나 혼자가 아닐 터이다. 다른 마법 소녀들 역시 이동했겠지. 단체로 모여 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면 문제다. 통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각개격파. 그 미래가 선명하게 비추어졌다.
“지금은 일단 사람을 찾아야 하거든. 미안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그 찾을 사람이라면 방금전 같이 있던 여인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제이슨은 무릎 꿇은 상태에서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에게 협력해준다면 그 여인들은 무사할 것이오.”
“…협박이야?”
“그건 아니오. 말 그대로, 자네가 날 협력하는 과정에서 여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란 말이오. 내 형제가 콜키스로 자네들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내가 능력을 써 자네만을 원래 목적지에서 벗어나게 했소.”
“콜키스?”
“아 이 섬들을 말하는 것이라네. 아무튼, 자네 혼자 동떨어진 거니 안심하게. 여인들은 아마 함께 있을 것이오. 그리고 내가 목표로 삼은 곳 역시 그녀들이 있는 곳이라네.”
제이슨은 고개를 들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이저 같은 재질의 무기질적인 눈에 불과했지만 그 시선엔 분명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 드넓은 바다에 맹세하지. 난 자네와 자네 곁의 사람을 해칠 의사가 없소.”
뭘 또 맹세까지 거창하게.
“목적 없이 흐르는 이 바다의 파도에 휩쓸려 내 길을 평생 잃더라도, 난 이 맹세를 깨지 않겠단 말이오. 어떻소. 꽤 그럴듯 하지 않소? 방금 막 생각한 맹세법인데.”
“지랄병이 낫진 않았구나.”
스틱스 강에 맹세한다 같은 거창한 말일 줄 알았건만, 그냥 마음대로 지껄인 거였나.
“아, 아무튼 난 진심일세. 정말이라네. 정말 자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아 그래그래 알겠어.”
부담스러워 죽겠다. 도대체 목적이 뭐길래 저 따위 말투를 현대에 쓰는 건지. 난 한숨을 푹 내쉬며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무릎 꿇은 그와 시선이 맞춰졌다. 제이슨 역시 아르고 패밀리의 일원. 소탕해야 할 적의 정보를 얻을 기회기도 하다.
“말해봐. 뭔데.”
“…! 고, 고맙소! 그래, 별 건 아니고……”
제이슨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섬에 갇힌 사람들을 살려주게.”
“별 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사람 목숨 오고 가는 이야기가 어떻게 별 게 아니야. 제이슨은 이해를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아무튼. 좀 설명하겠소. 이 섬엔 노예가 있소. 정확히는 옆 섬이지.”
“여기 넓었구나.”
“아무래도 바다인 만큼.”
“그래서? 그 노예들은 뭔데?”
“형제들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소. 남자들은 병사로 확보하고 여자와 아이 노인은 노예로 삼아 식량을 확보하게 만들었소. 이런 생활을 원한 이도 있었지만 원치 않는 이가 훨씬 많다오.”
“그렇겠지.”
“형제들은 죄를 짓고 있소.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자신들의 이상에 동참하게 만들 생각이오. 이건 옳지 않은 일이오. 낭만도 없지.”
“…그래서, 나보고 그 노예들을 자유로 만들어 달라.”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간단하오.”
제이슨은 별 거 아니란듯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형제들을 전부 줘패면 된다오. 폭력은 곧 질문이고, 언제나 하나의 답을 도출하는 법이라오. 그렇게 답을 이끌어내주게. 우리 식대로의 설득법일세.”
“아 그거 좋네.”
참 마음에 드는 설득 방식이다.
“근데 잠깐. 그럼 나와 같이 있던 마법 소녀들은 어디로 간 건데?”
“아, 그걸 이야기 안 했군. 우리가 갈 곳에 있다네.”
“어디.”
“어디긴 어디겠나.”
제이슨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거대한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적 경관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인공적 건물이었다. 방금 전까진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도 괴인의 능력이란 걸까.
“저기에 있소. 우리의 거점이지.”
제이슨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 빌딩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렸다.
“저기를 개박살 내주시오.”
**
“…뭐, 뭐지?”
오렌지 알타이르는 허망하게 분홍빛 괴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괴인으로 변하기 전에 보았던 윤곽은 조아윤의 몸이었다. 언제나 눈으로 쫓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본 게 정말 진실이라면….
하지만 말도 안 된다. 조아윤은 틀림 없이 은퇴했다. 제 수명을 제물 삼아 마지막 발악으로 수천을 구하고 빛을 잃었단 말이다. 검사 결과도 확인했다. 그녀는 틀림 없는 사람의 몸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것은 대체 왜.
“아, 아하! 그래!”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말이 된다. 무언가 착각이거나 오해일 수도 있고. 괴인 특유의 기묘한 능력으로 인한 착란이나 환각일 가능성도 있다.
오렌지 알타이르는 항상 자랑으로 삼았던 뛰어난 시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언제나 무시했던 조아윤을 긍정했다.
“…그래, 그런 거야.”
애초에 괴인은 한재중이다. 그래야만 한다. 조아윤을 속이고 다른 이들을 기만하고 마법 소녀를 언제나 위험에 빠뜨리기만 하는, 그런 존재여야 한다.
잠깐, 언제 봤다고 그를 이렇게 억지스러울 정도로 몰아가는 거지? 난 그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오래 보았나?
“아냐.”
아무것도 확신하지 말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자. 정보를 모아, 확인하면 된다. 오렌지 알타이르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마음 속에 싹 튼 의심을 지워낼 순 없었다.
전에 카페에 가기 전에 건낸 괴인의 말. 그는 카페 안에 자신의 동지가 있다고 했다. 만약 그 ‘동지’가 한재중이 아니라 조아윤이라면?
아 그래. 저 분홍 괴인은 언제나 와쳐라고 자칭하는 괴인과 함께 다녔다. 만약 접근했던 괴인이 와쳐이고 조아윤이 그의 파트너라면?
알고 보니 한재중이야 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이었고, 조아윤이 그를 이용 중이었던 거라면?
“아냐!”
아직 이상한 점은 수없이 남는다. 아르고 패밀리의 일원이라 자처한 사람이 그를 공격할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괴인은 원래 즉흥적이지 않나. 그게 단순한 보복성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공격 행위였다면?
“…아, 머리 아파.”
머리가 아프다 못해 속이 메슥거린다. 열병이라도 난 것만 같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게 부정되는 느낌이다. 기분이 나쁘다.
조아윤이 괴인일 수도 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명제인가.
말은 험해도 언제나 사람 목숨을 일순위로 챙기던 그녀였다. 수많은 안티들에게도 당당했던 사람이다. 그게 부러웠고, 그렇기에 질투했다. 그런 그녀가 도당체 무슨 이유로 괴인으로 타락했단 말인가.
“아니지. 아냐. 괴인은 그 놈. 괴인은 그 놈….”
확신하지 말자는 결심을 깨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조아윤은 괴인이 아니며 괴인은 한재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방금 전 결심을 깨는 결정이었으나 그래야만 했다. 물론 효과는 별로 없었고 의심도 제대로 지워지진 않았으나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숲길을 걷고 있다 보니. 어느새 섬 안 깊숙이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멍한 그녀의 발치에 누군가가 닿았다.
“…?! 누구.”
“아.”
오렌지 알타이르가 정신을 번뜩 차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열매 같은 걸 한아름 들고 있던 소녀가 있었다.
“아, 아… 우와! 우와!”
소녀는 들고 있던 열매마저 다 떨어뜨리고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왜 이곳에 이렇게 작은 소녀가 있는 거지? 설마 이 아이도 괴인인가.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 별빛을 응축해 화살을 창조해낸 그녀에게 아이는 해맑게 물었다.
“마법 소녀다! 저, 저희를 구해주려고 오신 거죠?”
“네, 네?!”
“여, 역시 언니 말이 맞았어요! 언젠가 저희를 구해주려고 마법 소녀가 올 거라고!”
“아, 아니 저는….”
“제가 안내할게요!”
아이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손을 잡아 길을 이끌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남아있던 경계심이 물로 씻긴 듯 사라졌다. 당혹감 때문이기도 했고, 순수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아이들마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녀도 마법 소녀니까. 가장 지켜야 할 것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니까. 아직 그녀에겐 마법 소녀가 될 때 당시의 양심이 존재했다. 또한, 버릴 수도 없었다.
오렌지 알타이르의 손에 있던 화살이 다시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구해주러 온 게 아니라 나도 잡힌 건데. 이 따위 사실을 말할 순 없었으므로 꾹 참고 궁금한 것만을 물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무서운 괴인들이 집에 쳐들어 왔어요! 그리고 갑자기 여기로 이동했어요! 어, 엄마랑 언니도 함께 왔고요. 아빠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어, 엄마 말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언젠가 다시 올 거래요!”
제대로 정리되지는 못한 말이었지만 오렌지 알타이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실종된 피해자 중 하나임을.
“아, 지금 가는 데는 어른들이 있는 데에요. 저 말고도 구해줄 사람이 되게 많아요.”
아이의 말을 듣는 오렌지 알타이르에겐 자신이 없었다. 구해주라니 무슨 수로.
내 한 몸 간수하기에도 벅차며,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게 많다. 당장 이 곳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동료들과는 뿔뿔이 흩어졌다. 저격 실력이 뛰어나 봤자 괴인에게 한달음이면 거리가 따라잡힌다.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이 이 아이 하나만은 아닌 거 같은데. 그 많은 인원을 자신 혼자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구하고 싶다면 당연히 구하고 싶다. 하지만 자신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내가 레드 베가나 블루 시리우스처럼 강했다면….’
하다 못해 홍익오라도 있어서 연락이 가능했다면.
남과 비교를 하자 자존감이 다시 떨어졌다. 애매한 무력에 애매한 지원 능력.
“전 다 알아요. 마법 소녀는 괴인을 쉽게 무찌를 수 있죠? 저 예전에 봤어요. 엄청 큰 괴인이 순식간에 펑 터졌거든요! 대단했어요! 불꽃 놀이같기도 했고, 아, 아무튼 짱이었어요! 짱쎄서 짱 멋있었어요! 저, 저도 그렇게….”
영웅이라기엔 형편 없다.
“그렇게 되고 싶어요!”
“….”
오렌지 알타이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긍정하는 말을 건내든, 이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면 타이르든 하겠지만.
그녀는 어떤 말을 건내야 할지, 그 말을 건낼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도 못했다.
어느덧 소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기에요! 저기!”
확실히 건물이 밀집된 마을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기에 사람들이…..
“자, 잠깐!”
“여러분 이리 와보세요!”
아이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향했고, 그곳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아이는 아직 어려 모르겠지만 오렌지 알타이르는 안다. 자신은 유명하지 않으며, 별 활약도 못 올리는 자에 불과하단 사실을.
“마법 소녀가 왔어요!”
만약 이 어른들이, 자신들을 구하러 온 마법 소녀가 이런 약골이라면 뭐라고 생각할까. 어떻게 실망할까.
오렌지 알타이르는 두려움을 담아 고개를 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냉랭한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