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124
Chapter 124 – 낭만사망사건 (4)
최근 불만이 쌓인 건 레드 베가 뿐만이 아니었다.
블루 시리우스.
현재 이 나라의 마법 소녀 중 단연 최고라고 평가 받는 사람. 승률 및 토벌수만 따져도 압도적. 특유의 청렴하고 우아한 이미지 탓에 광고계에서도 섭외 일순위로 손 꼽힌다.
이런 마법 소녀 계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그녀에게도 많은 불만이 있었다.
불만(不滿).
채우지 못했다는 그 말 뜻처럼, 그녀에겐 커다란 공허가 존재했다.
아무리 귀하고 값비싼 걸로 자신을 치장해도, 산해진미를 목구멍 안으로 채워넣어도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
그녀에게 오는 모든 칭송, 흠모, 동경과 선망은 모두 바위와도 같았다. 자신이 실수라도 하는 순간 언제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짓눌러 죽일 바위.
타인들의 시선은 구멍 뚫린 방 안처럼 징그러웠으며 타인들의 수근거림은 모기들의 날개짓 소리처럼 거슬렸다.
그녀는 마법 소녀란 지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법 소녀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은 그녀를 공허하게만 할 뿐 충족시키지 못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걸 꺼리는 그녀로선 광고 같은 건 썩 질색이었다. 가끔씩 공익 광고 같은 것엔 동참해 주었지만 그 이상 상업적으로 본인을 노출시키긴 싫었다.
하지만 업계의 최정상으로서 선례를 만들어주어야만 했다.
괜히 자신이 상업적 광고를 꺼린단 이유로 청렴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광고를 찍는 후배에게는 ‘돈에 미친 사람’이란 조롱이 붙을 테고. 돈이 궁하지 않단 이유로 광고비를 싸게 부른다면 그 밑에 아이들에겐 더욱 싼 광고비가 지급될 테니 말이다.
겉에 드러나지 않는단 희소성과 광고비를 최대로 부른단 면모가 결합되어 블루 시리우스의 광고비는 마법 소녀 업계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최대를 달렸다.
이 탓인지 최근 활동자금이 궁해진 마법 소녀 업계에서 블루 시리우스 그녀에게 광고를 권유했다.
오늘이 그 촬영일이었다.
카메라와 눈을 맞추며 블루 시리우스는 회한에 잠겼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역겨웠다. 여기에 있는 그 모든 게, 자신이 걸은 이 모든 길이 후회스러웠다.
‘내가 이런 비싼 돈을 받고 여기서 이런 비싼 가방을 들고 있을 사람이 맞기나 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지켜봤자 뭐하는가.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데.
그간 수없이 강해졌다. 기회 역시 있었다. 하지만 쓰질 못했다. 강함도 기회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납치되었을 때에도, 새해 첫날부터 괴인에게 습격받았을 때에도, 반드시 지켜야 했을 작전에도, 자신은 그를 지키지 못했다. 그 혼자서 운 좋게 무사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왜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돈을 받아야 하는 거지? 보여줄게 뭐가 있다고, 이딴 걸 보여서 뭐가 좋다고.
무심코 떠오른 의문은 잔잔한 호수 위에 던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철저히 이성적으로 자어냈던 미소가 철저한 본성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혹적으로 올라간 입꼬리는 파르르 떨리며 아래로 쳐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위치와 그에 따른 부담스런 칭송, 남들이 우러르는 것에 반해 한없이 조그맣게만 보이는 자신의 모습. 렌즈 안에 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얼굴은 너무나 가증스러워 보였다.
“죄송해요.”
결국 그걸 참지 못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오늘은 안 될 거 같아요.”
그 날의 광고 촬영은 파토가 났다. 열심히 사죄의 인사를 돌린 후 블루 시리우스는 홀린듯 어딘가로 향했다.
한동안 절대 입에도 대지 않겠다며 다짐한 술병을 한 아름 들고, 최근 주변에서 자주 이야기가 오가는 한 곳으로.
카페 백호로.
그렇게 가게에 입성 후, 그녀의 기억이 끊겼다.
**
“으음….”
햇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자신의 집과는 다른 천장에 놀랐다. 하지만 놀란 만큼 몸이 따라와 주진 않았다. 몽롱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으며 일어났다. 숙취 특유의 끈적한 두통은 마법의 힘으로 어찌 될 게 아니었다. 변신하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과 다름 없는 그녀는 고통스럽게 기상했다.
“…여기는?”
몽롱한 몸은 시야 마저 흐릿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본 적 있던 건물이란 생각은 났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나른하게 하품을 쏟아내며 비적비적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오, 깼네?”
“하하… 잘 잤어 설화야?”
윤설화는 제 눈을 의심했다. 왜 그들이 여기 있는 거지? 헛, 하며 숨을 삼킴과 함께 주변을 둘러 보자 이 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 조아윤의 집임을 깨달았다. 옛날에 이사를 도와주고 집들이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니, 그, 그게… 어… 응? 내가 왜 여기 있어…? 재, 재중이는 왜… 앗!”
혹여 흉칙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윤설화는 재빨리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었다. 다행히 꼴 사납게 몸 이곳저곳을 노출한 꼴은 아니었고, 어제 입었던 옷과 동일했다. 두꺼운 청바지에 목티. 명품도 아닌 싸구려. 그녀에게 가장 편한 옷이었다.
“…선배, 어제 기억 안 나?”
“내, 내가 뭘…?”
“아니 그 지랄을 해놓고 기억을 못한다고? 와… 너무하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데.”
“내, 내가?! 아니 내가 확실히 술 마시고 진상을 부리긴 하는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재중 앞에서 진상을 부렸다고? 윤설화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얼마나 이미지 관리를 철저히 해 왔는데.
쿨하고 시크하며 여유 있는 커리어 우먼 같은 모습만 보여주도록,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본인 기준)했는데.
설마 어제 하루만에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고?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렇게 믿는 한편 싸늘하고 불안한 감각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셔놓고 진상을 부리지 않을 자신이 그녀 본인에게도 없었다.
윤설화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윤설화인 만큼, 그녀는 본인을 신뢰할 수 없었다.
“어, 어떻게 했는데…?”
“듣고 싶어?”
“…아니. 아 그래도 내 책임을 알아야 하니 듣긴 들어야… 으아아 그래도 듣기는 싫어….”
자신의 수치를 남의 입에서 전해듣기 싫단 마음과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고 제대로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무슨 그 정도에 책임 운운을 하고 있어.”
한재중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생수병과 머그컵을 내밀었다. 머그컵 안에선 따스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부드러운 향기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자, 물이랑 스프야. 물 마시고 정신 좀 차린 다음에 마셔.”
“어. 으, 응… 고마워. 진짜. 고마워… 근데 재중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아윤이랑 같이 사는 거니?”
“그건 아니고. 너 데리고 오면서 나도 겸사겸사 묵은 거지.”
“어, 왜?! 그, 그냥 같이 사는게… 재중이 네 집은 위험한 장소고….”
“그래도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같이 있겠어. 자, 수프 식겠다.”
어벙벙한 채로 생수병을 잡은 다음 그의 손길에 이끌려 식탁까지 도착했다. 보살핌 받는 아이처럼 주는 대로 물을 마시고 수프를 마셨다. 따뜻해서 행복했다. 좋지 않던 속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괜찮아? 해장 라면이라도 좀 끓여줄까?”
“아, 아냐! 그 정도까지 필욘 없어! 이거 먹고 바로 나갈….”
“선배 지금 시간 못 봤어?”
조아윤이 턱짓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시침은 벌써 10시를 한참 지나는 중이었다.
“어차피 선배 늦는다고 연락 넣어놨어. 유니콘 그 새끼가 광고 관련으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더라. 3시 쯤에 약속 잡혔으니까 여유 있게 있어.”
“그, 그래도….”
그러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윤설화의 얼굴이 단풍처럼 붉어졌다. 무언갈 먹으며 식욕이 돌기 시작했다. 어제 별 다른 안주도 없이 독한 술을 내리 들이 부었던 부작용일까. 커다란 허기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그릇만….”
“오빠 들었지? 마님이 끓이시란댄다.”
“오냐.”
한재중은 신난 발걸음으로 주방에 다가갔다.
이후 콩나물과 바지락이 들어간 한재중표 특제 해장 라면까지 먹은 뒤에야, 그녀의 허기가 잦아들었다.
“…미안.”
“이때는 미안이 아니라 잘 먹었습니다라고 해야지.”
한재중은 빈그릇을 치우며 쓰게 웃었다.
“내, 내가 할 게. 재중이는 거기 가만히 쉬어. 원래는 내가 너 손에 물 한방울 묻히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언제적 관용어를 쓰고 있어. 술 마신 몸으로 설거지 하다 그릇이라도 깨게? 그냥 이럴 땐 뻔뻔해져. 그게 우리 입장에서도 더 편해.”
그는 빈 그릇에 향하는 그녀의 손을 마치 귀한 장식품이라도 옮기듯이 조심스레 치우며, 거절의 의사를 내보냈다.
“맞아 선배 뻔뻔해져. 그래도 오빠 수준으로는 뻔뻔해지지 말고.”
“내가 왜.”
“오빠는 너무 뻔뻔하잖아.”
“에이 하루 씨나 아희 씨보단 내가 좀 낫지.”
“걔네 둘은 어나더야. 요새 애들 무서워….”
“너도 요새 애들이야.”
“에이 내가 무슨 애들이야.”
“네가 애야 우리 둘이 젊어지지.”
“그럼 더욱더 내가 늙은 사람이어야겠네. 그래야 오빠랑 선배가 아줌마 아저씨가 될 테니까!”
“죽는다.”
둘은 시덥잖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윤설화는 꼭 학생이었던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 때는 참 행복했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도 그들만 있더라면 뭐든 게 괜찮을 거 같았다.
“후후, 맞아. 우리 아직 젊다고 해줘. 아직 난 ’소녀‘ 소리 듣고 사는데. 아줌마라고 하면 너무하잖아.”
“그럼 이제 선배는 마법 미시 되는 거지.”
“아직 나 결혼도 안 했거든…?! 아, 그, 물론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만.”
특정 누군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꿈만 같은 상상을 펼쳤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제 끊었다는 술까지 마시면서, 우리 가게에 와서. 그것도 오빠 앞에서까지 진상을 부린 거야?”
조아윤의 말에는 묘하게 가시가 서러져 있었다. ‘우리 가게’라는 말에 묘하게 강조가 되어 있어 얼핏 가게 영업 시간에 민폐를 끼친 것을 혼내나 싶었다. 하지만 곧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민폐를 가게 안에서가 ‘우리’에게 끼친 점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윤설화는 이 셋 중에서 본인 혼자 외부인임을 깨달았다.
조아윤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한들, 그녀는 그렇게 느껴버렸다. 특유의 자격지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까지 왜곡시켰다.
“미안….”
특히, 한재중에게 보일 낯이 없었다. 침울하게 숙인 눈동자가 가리키는 자신의 창백한 손이었다. 곧 그 손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신의 것보다 훨씬 크고 우락부락한 손. 혈관이 손등에 돋아난 남성미가 돋보이는 손. 한재중의 손이었다.
“설화야. 우린 지금 이유를 묻고 있는 거야. 듣고, 너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그래. 왜 갑자기 그랬던 거야? 그날따라 힘든 일이 있었어? 아니면….”
참 우습고 가증스럽게도, 그녀는 이 손길 한번 자신의 괴로움이 씻기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눈이 녹아내리듯 고통이 사라졌다.
알코올로 넋을 달래는 건 못할 짓이다. 윤설화도 그걸 안다. 그렇기에 그 죄악을 범하면서까지 고된 날을 지우려 했다. 자신에게 남은 윤리나 양심을 지워내, 지금처럼 그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을 채우려 했다.
“…딱히 그런 거 아냐. 그날따라 힘든 일이 있던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잠시 지쳐서.”
그는 햇볕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눈사람같은 사람이다.
그에게 녹아내리지만, 그를 배알하기엔 자격이 없는 초라한 누더기.
“정말 잠시 지쳐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미안하단 말이 아니라….”
“재중아.”
윤설화는 그에게마저 자신의 고민과 고통과 고뇌를 지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바위처럼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어깨는 가볍고, 또한 자유로웠으면 했다. 자신의 얼룩으로 더럽히기엔 그는 너무나 고결한 사람이니까.
“그냥 아무말 없이, 꼭 안아줄래? 그럼 난 다 괜찮아 질 거야.”
그렇기에 그녀는 제 고통을 나누는 대신, 그에게 빛을 받기로 했다. 잠시 세상을 살아갈 빛을. 다 녹아버리더라도 괜찮을 따스함을.
“…그래.”
한재중은 별 말 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윤설화는 카메라 앞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순수한 미소로 그의 포옹을 받았다. 그의 목덜미에 제 볼을 부비며 온기를 전달해 받았다.
점심이 되기 전, 윤설화는 집을 떠났다.
**
궁수자리는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방금 본 광경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중간에 추억에 잠겨서 잠시 이탈한 사이 무언가 특별한 일이라도 벌어졌나 하고 부랴부랴 돌아왔 건만. 수확이 없었다. 게다가 영웅이라는 마법 소녀는 약한 소리 뿐. 한심했다.
“영웅이 지쳐? 빠져가지고… 영웅을 자처할 거면 언제나 완벽해야지. 아… 이래서 요즘 애들은.”
마약 자국이 잔뜩 난 팔을 혈관이 다 보이게 긁으며 짜증을 냈다.
“낭만이 없어 낭만이! 영웅이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사람은 영웅을 칭송하지 못하고! 적은 교활하기만 하고 당당하지 못하며 영웅은 그 교활함에 급급하기만 한 현실이라니… 아아아아아!”
탄식은 길게 이어졌고, 궁수자리는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내었다.
“…그러면. 내가 그 적이 되면 되지 않을까?”
이제 감시도 재미 없어졌고, 몸도 근질근질하다.
“아, 그래. 오랜만에 한 번 나서봐야겠다.”
그는 웃음과 함께 제 활을 꺼내들었다.